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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72화 (872/1,064)

872화

루벤 카드모스를 아는 이들에게 그가 왜 명장이라 불리는가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어물거리며 답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이제껏 숱한 승리를 일궈냈기 때문이라고 자신 없게 답하겠지.

그런데 사실, 그들의 답은 틀리지 않다.

명장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단순히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면 명장인가? 그럴 리가 없다. 전쟁이란 승리해야 하는 것이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명장이란 결국 승리하는, 승리하는 능력이 있는 장수를 일컫는다고 봐야 할 터.

그런 면에서, 루벤 카드모스는 분명 명장이었다. 승리로 점칠 된 그의 과거가 그를 증명한다.

'참을성이 대단하군.'

승리로 이어지는 길은 여럿이다. 그 여러 갈래 길중 왕도는 없다. 일반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무조건적인 왕도라고 할 수는 없다.

루벤 카드모스의 휘하에 6만이 넘는 병력이 몰렸다고 했다. 물론 그 중 정규군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용병과 되는 대로 긁어 모은 징집병의 수도 적지 않겠지.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6만이 넘는 머릿수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런 막대한 덩치를 가지고서도 좀처럼 제대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머리가 좀 돌아가는 지휘관급들의 속과는 달리, 군중의 분위기는 가벼웠다. 적의 도발은 계속됐고, 그때마다 아군은 승리를 거뒀다. 병사들은 그 가벼운 승리에 점차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장교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다잡으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다. 아군의 사기가 오르면 기뻐함이 마땅한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우니 말이다.

생각이 있는 이들은 모두 같은 느낌을 받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라스도 물론 그 중 하나였다.

"적장이 짜놓은 판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요."

시어문드의 말대로다.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적을 상대를 피해 없이 막아내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현 상황을 유지만 해도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알고 있지만, 역시 거슬리는군."

"적의 노림수는 명확합니다. 경계를 늦추지만 않으면 됩니다."

시어문드는 차분하게 답했지만, 글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살라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

"팅거 부근에서 한 차례 교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군은 적의 정찰대를 큰 피해 없이 물리쳤으며……."

"그만."

"아, 예."

골고스의 사령관. 그러나 사령관보다는 성주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더 선호하는 사내, 보머 바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수하의 보고를 끊었다.

'운도 좋구만. 잘 풀리는 놈은 길가다 자빠져도 돈을 줍는다더니.'

루벤 카드모스의 이름은 군문에서 녹 좀 먹은 이라면 모르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처음 그가 대병력을 이끌고 온다 들었을 때는 매일 밤잠을 설쳤다. 골고스를 포위한 적에 맞서 힘겹게 항전하다가 끝내 옥쇄하는 꿈까지 꿀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그 시건방진 자에게 고분고분 굴면서 죽은 듯 지내왔던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지만, 지위로 보나 거느린 병력의 규모로 보나 아쉬워해야 할 것은 이쪽이었다. 하지만 내심, 루벤 카드모스와 군터 크렘보르가 피 터지게 맞붙으면서 서로 낭패를 보기를 바랐다.

"물러가라."

"예."

홀로 집무실에 남은 보머 마쉬는 한숨을 내쉬며 펜을 들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서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루벤 카드모스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가 골고스를 돌파할 마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전투라고 하기도 뭐한 자잘한 교전이 몇 번 있었습니다만, 모두 저쪽이 먼저 발을 빼며 끝났습니다. 또한 먼 젓번에 말씀 드렸던 대로, 루벤 카드모스 휘하에 용병 병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가 용병들을 휘어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소극적으로 구는 것을 보면 군중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맞는 듯합니다.'

보머 마쉬가 잠시 펜을 멈췄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글을 이어갔다.

'군터 크렘보르 역시 잠잠합니다. 무리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전공을 세울 마음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까지만 놓고 보면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일선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본대를 거느린 채 줄곧 후방에서만 머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펜이 멈췄다. 보머 바쉬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꼴을 봐야 하는 거지.'

이 서신을 받을 사람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답을 주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눈만 한번 딱 감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 그러나.

'그 건방진 놈은 아직 어떤 실책도 저지르지 않았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그런 어쭙잖은 신념 같은 것이 아니다.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그 루벤 카드모스가 이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는 의심. 그것은 살라스 등이 직접 적과 부딪치며 느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보머 바쉬 역시 군문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다. 비록 멀리서 소식을 전해 듣는 입장인 만큼 전장에서만 흐르는 기묘한 공기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위화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혹시라도 일이 벌어진다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믿을만한 놈이 옆에 있는 편이 낫다.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

명장이라고 해서 패하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며, 만약 루벤 카드모스가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지금 같은 꼴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어차피 내가 모든 일을 다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우러러봐야 하는 권력자를 상대로 소심하게나마 할말을 했다. 그걸 권력자가 그리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만하면 할만큼은 한 셈이다.'

찝찝함과 불안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보머 마쉬는 그렇게 자신과 타협했다.

***

군터는 휘하 기병 이백여 기만을 거느리고 전선을 시찰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수만 군대의 지휘관이 얼마 되지도 않는 호위만 거느리고 전선을 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적절한 때에 오셨습니다."

살라스는 군터의 방문을 반겼다. 그는 군터가 느슨해진 군기를 다잡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군터의 의도도 바로 그것이었다.

군터는 상황이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직접 전선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일선의 지휘관들로부터 매일같이 보고를 받고 있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줄타기를 잘 하는군."

"실로 그렇습니다."

적장 루벤 카드모스는 덤벼들 듯 하면서 덤벼들지 않고, 물러날 듯하면서 물러나지 않았다. 긴장감을 유지시키면서도 한편으로 조금씩 져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쪽의 분위기를 제 뜻대로 주물렀다.

"골고스를 포기해도 된다면 차라리 낫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앞뒤 잴 것 없이 전군을 동원해 부딪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후방이 뚫릴 가능성이 높다. 루벤 카드모스가 이제 와서 회전에 응해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테고, 그는 정면으로 맞붙는 대신 병력을 흐트러뜨려 방어선을 돌파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런 방법이 없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피를 흘리는 것을 넘어, 뼈가 보일 정도로 살점이 뜯길 각오를 한다면 어떻게든 상대를 붙잡고 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판니른에서, 그리고 솔롬에서 끌어 모은 병사들을 상당수 잃을 각오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시어문드가 단언했다.

승리?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승리하는 것보다 패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패하지 않는 것보다.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원칙은 솔롬을 떠나오기 전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판니른의 군대가 판니른의 재산이라면, 솔롬의 군대는 군터의 사병이며 기반이었다. 그들을 잃는 다면, 전공? 포상?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이 전쟁을 일컬어 모든 것을 건 전쟁이라고 하지만, 진정 이 전쟁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은 자콥 트라 소프와 무샤라트 트라소프뿐이었다. 그들 외에는 모두 각자의 계산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군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군터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런 것이지만, 군터 역시 남의 싸움에 필요 이상으로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 전쟁은 별 의미가 없었으므로,

"언제쯤 끝날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일단 열심히 미끼를 던지고는 있습니다만."

풀어지기를 원한다면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제 쪽이 열심히 줄타기를 하고 있다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너희가 기다리던 때가 무르익었으니 이제 간은 그만 보고 행동에 나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루벤 카드모스는 넘어오지 않았다. 신중하다는 말은 그를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마치 싸우는 법을 잊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적장의 통제력이 상당한 모양입니다. 이렇게까지 몸을 사리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요. 게다가 용병부대의 규모가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군터는 용병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용병이라는 족속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의 휘하에 용병을 둔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용병들의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알지 못했다.

"제가 알기로, 용병들의 계약은 처음에 계약을 체결할 때 받는 계약금과 전투를 치를 때마다 받는 수당, 그리고 공적에 따라 지급받는 성과급으로 나뉩니다. 물론 전쟁의 규모라든지, 용병대의 명성 등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비슷할 겁니다."

살라스가 시어문드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쪽의 용병들은 불만이 많겠군."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용병이라는 자들은 제 목숨을 팔아서 전장에 나온 만큼 한몫 단단히 챙기자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런데… 대장이 싸울 생각은 없이 저렇게 몸만 사리고 있으면 자연히 안달이 날 수밖에 없겠지요."

시어문드의 말에 따르면 군인이 전공을 탐하듯, 용병은 소위 한탕을 갈망한다. 그 정도는 대개 후자가 더 심하고, 그런데 저쪽의 용병들은 기껏 목숨 걸고 나온 전장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게 되었으니 당연히 계속 불만이 쌓이고 있을 거라 했다. 물론 한탕이 멀어진 만큼 목이 날아갈 위험도 멀어진 셈이니 꼭 싫어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목숨을 아끼고 푼돈이나 만질 거라면 왜 용병이 되었겠는가.

"필시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큰 문제 없이 그들을 통제하고 있으니, 적장의 장악력이 상당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 억누르지는 못하겠지."

"그렇습니다. 사람의 인내심이라는 것은 그리 질기지 못하니까요."

군터가 시찰을 마치고 본영으로 돌아간 지 사흘째 되던 날, 살라스와 시어문드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장군! 급보입니다! 적의 군세가 나뉘었다고 합니다! 2만 이상의 적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뒤.

"북쪽으로 향한 군대는 대다수가 용병부대인 것으로……."

시어문드의 말이 맞았다. 사람의 인내심은 그리 질기지 못했다. 욕망 앞에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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