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화
"이야. 적이 건너오지 않으니 직접 건너가서 쓸어버린다. 평범한 자들은 하기 힘든 발상 아닙니까."
입을 연 무관은 곧바로 자신이 우스운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평범이라니. 명실상부한 솔롬의 이인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어찌 평범할 수 있겠나. 그저 그 동안 착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장군을 대리할 때 보였던 조용 조용한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장군을 따랐던 사람이다. 군터크렘보르라는 이름과 그의 입지전적인 행적에 눈이 팔려 간과하고는 하지만, 살라스 역시 이야기로 써도 좋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의 주인공인 것이다.
"적은 규율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용병대였다고 합니다. 아군을 떠보려던 것이었을까요."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군터는 그런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아군의 사기가 올랐고, 적에게도 이쪽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적장은 루벤 카드모스라고 합니다. 바라눔, 아니 무샤라트 트라소프 휘하의 장수 중 이름값으로만 따지면 한 손에 꼽을 만한 자입니다."
이름값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위장이라는 지위는 실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녹포라면 제국의 무장으로서 오를 수 있는 지위 중 거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루벤 카드모스의 이름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낮빛이 굳어졌다. 군터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긴장과 두려움의 차이를 알았고, 구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수하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긴장이었지 두려움이 아니었다.
"어떤 자지?"
"덕장이라고 불리지요. 어떤 경우에도 서두르는 법이 없고, 늘 침착하게 군을 이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군터는 적장이 어떤 부류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폭발력은 부족하지만 정적이고 단단한, 오래 가는 싸움에서 빛을 발하는 부류. 무장으로서 군터 자신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자.
까다로운 상대다. 원하는 장소에서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깨뜨릴 자신이 있지만, 그 반대라면,
"다른 소식은 없나."
"예. 아직."
루벤 카드모스는 나이 지긋한 경험 많은 장수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역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떠올리고 있을 터.
얼굴도 모르는 적장을 떠올리며, 군터는 앞으로의 전장을 머릿속에 그렸다.
***
"정말 지독하군요."
적의 또 다른 정찰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탄식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살라스도 부관의 말에 동의했다.
정찰의 중요성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심하지 않은가. 적의 본대는 구경도 못 했는데, 정찰대 발견 보고는 과장 없이 백 번도 넘게 들어왔다.
이 정도면 신중함이 병적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지원 병력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루벤 카드모스, 듣기로 현재 무샤라트 트라소프 휘하 장수 중 손에 꼽히는 자라고 했으니 그가 이끄는 군대가 현재 파악한 것보다 더 많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게다가 용병까지 대대적으로 고용했다고 했으니, 머릿수로만 따지면 이쪽보다 월등하다고 봐야 할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적장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다른 병력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쪽에 생각이 기울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군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힘들겠지.'
지형이 문제였다. 골고스에서 닷새 거리 안의 그 어느 곳도 야전을 치르기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대부분 울퉁불퉁한 구릉이나 산지였으며, 경사도 제법 가팔랐다. 그나마 있는 평야 지대는 크기가 너무 협소해 대군이 움직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기병을 이용한 전술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솔롬의, 아니 판니른의 군대에게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골고스를 사수하는 것이 지침인 만큼 골고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질 수는 없었다.
전장을 잘못 골랐다. 큰 실수지만, 변명을 하자면, 황자의 본영에 합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 명령을 받았기에 사전에 전장을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변명에 불과했다.
'이대로 대치만 해도 나쁘지는 않다. 저쪽이 느는 만큼 이쪽도 지원을 받는다면.'
살라스는 앞으로 얼마간은 이 조용한 대치가 계속 이어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바로 다음날깨졌다.
"적이 움직였습니다! 만을 훌쩍 넘는 군세가 네 갈래로 나뉘어 이동 중입니다. 더 자세하게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다급한 보고에도 살라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중간에 등장한 신경 쓰이는 부분에 집중했다.
"네 갈래라고?"
"예. 그렇습니다."
군세를 나눈다? 어째서?
"어찌할까요?"
"놈들이 움직였다면 우리도 응당 대응해야겠지. 우선 장군께 보고부터 하고, 군을 둘로 나눈다. 4천은 이곳에 대기하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북쪽으로 우회해 오는 놈들을 맞이한다."
명령을 내린 살라스는 즉시 투구를 들고 막사를 나섰다.
***
산발적인 교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골고스의 영역으로 들어서려는 적의 시도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교전이 있기는 했으나 그 규모는 작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전투가 격화되려고 하자마자 주저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마치 이 싸움에서 어떠한 손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놈들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아군의 승리입니다!"
부관의 들뜬 목소리에도 살라스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퇴각하는 적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기쁨은커녕, 냉랭함만 느껴지는 살라스의 모습에 당황한 부관은 기뻐하던 것을 멈추고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저…살라스님.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너무 쉽게 물러나지 않는가."
"그 말씀은, 놈들이 고의로 패하고 있다는……."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지."
일부러 패해서 적의 기를 올려주고, 나아가 오만해지게 만들어 실수를 유도한다. 단순히 꾀만 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전술이 아니다. 군대에 대한 장악력과 결단력, 실행력을 고루 갖춰야만 시도할 수 있는 위험한 술책. 그러나 통하기만 한다면 효과는 확실하다.
'통한다면 말이지.'
살라스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이제부터는 적보다 아군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풀어지고, 해이해 지고, 오만해지지 않도록. 쉽지 않은 일이다. 눈으로 보이는 적은 상대하면 그만이지만, 마음속에 싹트는 독은 직접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예상했지만, 역시 적은 가만히 앉아서 대치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이 들 때, 반드시 치고 들어올 것이다.
***
"병사들의 사기는 어떤가?"
"좋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래?"
"고참병들이 동요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장군을 봐왔지요. 그들의 믿음은 자잘한 패배 몇 번에 흔들릴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그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루벤 카드모스는 자신의 부관이 아첨과는 거리가 먼 사내임을 알고 있었다. 간혹 어리석게 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나저나…꽤나 지독한 놈들이군요."
"그래. 지독하군. 이쯤 되면 적당히 흐트러질 만도한데 말이야."
벌써 보름이 지났다. 보름 동안 번의 교전이 있었고, 일곱 번 모두 패퇴했다. 그 일곱 번 모두 제법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적장은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눈치챈 것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루벤 카드모스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네. 하던 대로 계속 하면 돼."
"어째서입니까?"
"비가 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가?"
"예? 그늘로 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시 말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떤가?"
"그야……."
말끝을 흐리던 부관은 그제야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입을 벌렸다.
"우리는 일곱 번을 싸웠고, 일곱 번을 졌다. 반대로 저들은 일곱 번 모두 승리했지. 그 패배가 의도된 패배라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이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소관이 아둔하여 늘 한 발 늦는군요."
"늦더라도 따라오고 있지 않나. 그것이 중요하지. 자네가 내 나이쯤 되면 나보다 더 나은 장수가 되어있을 걸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당치도 않다는 듯 강하게 부정하는 젊은 귀족을 보며, 루벤 카드모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확실히 지금의 모습만 놓고 보면 저런 반응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의미래는 특히 더 그렇다. 정말로 저 느리고 어리석은 젊은이가 다음시대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음시대가 오기도 전에 허망하게 스러질지도 모르고,
'그래.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지금이야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심지어 명장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지만 예전의 그는 흔하디 흔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뛰어나다는 말은 붙이지 못할, 그런 평범한 젊은 군관.
그랬던 그가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명장 소리를 듣고 있다. 그 많던 인재들, 심지어 천재라는 소리까지 듣던 이들 대신에 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며, 앞서 세월 속에 스러져가는 이들을 끝없이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모자란 젊은이를 보며 단언할 수 있었다. 느려도 좋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거기에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미래가 찾아온다.
'군터 크렘보르'
요 며칠 동안 그에 대해 알아보았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견줄만한 사례를 찾기 힘들 만큼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운이 따라줬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상으로 출중한 실력이 뒷받침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의심할 여지없는 천재다.
'그대의 방식대로 맞붙는다면, 난 그대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몰라.'
예나 지금이나 힘 싸움에는 자신 없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것이 아닌 이상, 루벤 카드모스는 정면대결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적이 거의 없었다. 자신도 없을뿐더러, 되도록 피를 적게 보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자네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다르지. 어디 한번 겨뤄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