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화
"여기까지로군."
"예. 여기까지입니다."
시어문드가 살라스를 힐끔 보더니 물었다.
"아쉬우십니까?"
"그래. 아쉽다네."
살라스는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모두 적의 피일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혼자서 길을 열다시피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놀라운 용맹이고 활약이다. 그런데도 본인은 전혀 만족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병사들이 살라스님의 용맹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당초 목표대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지 않았습니까."
"약삭빠른 녀석이 있더군. 덕분에 실속은 없었다."
승리했고, 아군의 피해도 적었지만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지도 못했다. 승기를 얻고 기세를 막 올리려던 시점에서 적은 이미 물러나고 있었다. 추격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살라스는 욕심을 억눌렀다. 적의 목 수백 개를 벤다 한들 그 과정에서 아군 병사들이 수십명 죽어나간다면, 그건 그에게 있어 큰 손해였다.
"엄격하시군요."
"줄곧 그렇게 보고 배워왔으니까."
장수라면 욕심을 부려도 될 때와 부려야 할 때, 부리지 말아야 할 때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무의미하게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살라스는 훌륭한 장수였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군터 크렘보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 생각할 법도 하건만, 살라스는 단 한번도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종종 착각하는 놈들도 있지만.'
살라스가 솔롬의 이인자인 이유가, 단지 가장 오랫동안 군터를 따라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끔 있었다. 주로 출세욕이 강한 이들이 그런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누구도 그들에게 충고나 조언을 건네지 않았다.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솔롬의 무관들 중에는 무능한 자가 드물다. 무능은 커녕, 다른 곳에 가면 이름을 날리고 한 자리 차지할만한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어쩌면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자리에 만족하고 진심을 다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물론 군터 크렘보르에 대한 존경심이 가장 크지만, 살라스의 존재 역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토록 뛰어난 자가 공명심에 한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게 되면 뜨거웠던 머리와 들떴던 가슴도 차분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장군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뭐라시던가."
"'수고했다'고 하셨습니다."
살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송구합니다. 장군. 다 제 능력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하킴은 마른침을 삼키고, 미리 준비했던 말들을 풀어놓았다. 처음 적의 매복을 예상하고 강을 건너지 않고 진을 쳤던 것.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적이 기습적으로 도강했던 것. 전황이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면서 결국 결단을 내렸던 것까지.
"무슨 벌을 내리시는 달게 받겠습니다. 처벌하여주십시오."
하킴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 숙이며 벌을 청했다. 죽음으로 패배의 대가를 치르라 한다면 당장 목이라도 길게 뺄 기세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겉으로만이었다.
'들리는 이야기의 중 반만이라도 사실이라면, 내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루벤 카드모스,
황제에게서 직접 녹포를 하사 받은 제국의 위장으로서, 일찍부터 바라눔 트라소프를 따랐다. 그가 본격적으로 황위 다툼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그와 함께 했으며,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렇듯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였으나, 그는 능력 보다도 성품으로 더 유명했다. 흔히 명장이라 불리는 이들, 혹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재주가 있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장수들이 엄격한 군율을 내세우며 칼같은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루벤 카드모스는 덕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수하들의 자잘한 실수들은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에게 들어온 상을 아랫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든 허허 웃기만 하는 무골호인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지만, 그는 강인함보다는 부드러움으로 휘하 장졸들을 휘어잡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킴은 자신에게도 그 너그러움이 발휘되기를 기대했다.
"서전부터 그르친 것은 뼈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지. 하킴이라고 했던가? 너는 해야 할 일을 했다.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가장 좋은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했고,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았지. 그러니 나는 너를 벌하지 않겠다. 만약 너 스스로 책임감을 느낀다면 앞으로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씻도록."
"장군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하킴이 패전의 치욕을 곱씹는 군인의 모습을 연기 하자, 루벤 카드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적은 어떻던가? 잠깐이라고 해도 직접 맞붙었으니 느낀 바가 있었겠지."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과감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과감했다라."
과감함과 무모함은 다르다. 당초 적은 강 너머 갈대 숲에 매복하고 있었고, 아군이 강을 건너지 않고 진을 치자 곧장 계획을 바꿔 기습을 가했다. 그건 확실히 과감함이라고 표현할 만한 결단력이었다.
"흐음."
적의 깃발을 목격한 이들이 문장기에 대해 보고했고, 문장관은 그것이 크렘보르의 문장기라고 보고했다.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이지만, 생소하지는 않았다.
근래에 제법 자주 들은 이름이었기에.
'크렘보르, 군터 크렘보르.'
루벤 카드모스는 적장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시간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자다. 그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쪽이 들어가야 하는 처지. 어떻게 보아도 쉽지 않다.
하킴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후, 루벤 카드모스는 휘하 무장들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우선은, 진군이 늦어지더라도 확실히 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선발대의 패퇴는 사실 별로 큰 의미는 없다. 선발대라고는 해도 애초에 용병들로 구성된 잡졸들이었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래도 충실하게 해냈다고 볼 수 있었으니.
"용병들을 다시 앞세울까요?"
"아니. 이미 기가 꺾인 놈들을 다시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화살받이 밖에 더 되겠는가."
"그 말씀은."
"하루 이틀, 전투 몇 번에 끝날 싸움이 아니네. 조금 더 길게 봐야지."
"돈에 팔려 다니는 놈들입니다. 쓸모가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다 쓸모가 있는 법이네. 두고 보면 알 것이야."
아직도 반신반의 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루벤 카드모스가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상당히 조악한 지도였으나 그래도 지세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는 것은 고작해야 지휘관의 이름 정도인가.'
병력이 얼마인지 모른다. 병력의 규모를 모르니 어디에 어떻게 포진해 있을지도 짐작하기가 힘들다. 안개 뒤에 숨은 적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안개 뒤의 적은 이쪽을 대략적이나마 알아보았으리라는 것.
물론 이쪽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적장이 군터 크렘보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정도는 있다.
우선, 군터 크렘보르는 판니른에 기반을 둔 자다.
방위군단장이었던가? 제법 높은 지위를 얻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가 군대를 거느렸다면 그건 판니른의 군대일 터.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자가 일군을 이끌고 움직였다면 그 규모는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못해도 이만 이상이지 않겠는가.
또한, 이전에 테리브란의 귀족들과 지방 귀족들 간에 파벌 싸움이 제법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것이 거짓 정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이 많아지면 목소리가 겹쳐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힘도 자존심도 작지 않은 이들이 아닌가. 다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에서 모든 것을 강력하게 억누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또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파벌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적어도 당분간, 지원세력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세력의 명운이 달린 전쟁에서까지 내분을 벌이겠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위험하고 불안한 순간이기에 그런 음습한 장난질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보다 더 손쉽게 정적을 해치울 수 있는 시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때였다면 온갖 명분과 구실을 들어가며 공격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었을 상대를, 전시에는 패전 한번이면 밀어낼 수 있다.
더군다나, 군터 크렘보르는 그 자신의 능력과 황자의 총애를 통해 단기간에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다. 그를 시기하고 적대하는 이들이 과연 한둘이겠는가.
그가 한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온갖 곳에서 음험한 칼들이 날아들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시기와 선망을 샀던 젊은 장군은 올라갔을 때보다 더 빠르게 추락하겠지.
"장군.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끈다면 조정의 머저리들에게서 틀림없이 말이 나올 겁니다."
조정에서 정치를 하는 이들과 전장에서 전투를 하는 이들은 친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를 하는 이들은 군인들을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라고 여기고, 반대로 군인들은 조정에서 편히 앉아 말로만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이들을 현장을 모르는 입만 산 놈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군대라는 것이 돈을 어마어마하게 먹는 위험한 괴물이라는 점 때문이겠지만,
"괜찮네. 그자들도 당분간은 조용할 게야."
"그럴까요?"
"물론이지. 저하께서 친정에 나서셨지 않나."
친정에 나선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저쪽과 이쪽은 사정이 다르다. 이쪽의 전하께서는 피를 잔뜩 보셨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와,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귀족들을 모두 죽였다. 칼에 묻은 그 피가 아직 다 마르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먼저 입을 열겠는가.
'그렇다고 그자들이 언제까지고 조용히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때가 온다고 해도, 그자들의 시선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더 탐스러운 목표에게 향하겠지.
'송구합니다. 장군.'
루벤 카드모스는 쥬드 포트락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나이는 적었지만, 진심으로 존경했던 그를.
그리고 동시에, 쥬드 포트락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젊은 또 한 명의 포트락을 떠올렸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과 지위를 이었다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핑계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핑계라고 할지라도, 이는 틀림없는 그의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