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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69화 (869/1,064)

869화

사람을 이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생판 모르면서 하나같이 자존심은 센 자들을 이끄는 입장이 되면,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하킴은 이제껏 잘 해왔다고 자부했다.

어쨌거나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말이다.

혹자는 왜 그렇게 힘든 자리에 앉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머지않았다.'

그거야 당연히, 힘든 만큼 얻는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약간의 추가 보수도 보수지만, 그것보다는 이 경력이 진정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은 끝났어.'

어떤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불경하다며 당장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생각이지만, 하킴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은 황제에 의해 세워졌고, 황제에 의해 존속 되어왔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황자 중 누군가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으면 제국이 이전처럼 계속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순진하게도.

'어림도 없지.'

황제가 있기에 제국이다. 황제가 없는 제국은 제국이 아니다. 제국이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그건 이전의 제국과는 전혀 다른 제국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제국은 끝난 것이다.

'황자든 황손이든, 어차피 다 마찬가지야.'

누가 됐든 황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제국의 이름과 함께 이어져 온 그늘은 너무도 크기에.

'못해도 수십 년 정도는 난리겠지.'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혼란스러워질수록 득을 보는 이들이 있다. 용병도 그중 하나다.

'온 제국의 이목이 이곳에 쏠려 있다. 이름값을 올리기에는 최고의 무대인 셈이지.'

물론 위험한 무대에서 주인공 행세를 할 생각은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주제를 잘 알아야 하는 법.

하킴은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황손을 위해 목숨바쳐 싸울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목숨은커녕, 피 한 방울조차도 아까웠다.

'적당히 시간만 보내는 거다. 어차피 이만하면 선발대의 역할도 그럭저럭 해낸 셈이니까.'

이 전쟁을 출세의 기회로 보는 이들이 있다. 하킴과는 달리, 그럴듯하게 전공을 세워서 녹봉 타먹는 관리가 되겠다는 속셈이다. 거기서 조금 더 꿈이 큰 놈들은 아예 귀족이 되는 꿈까지 꾼다.

물론 그건 말 그대로 꿈이다. 심각한 개꿈.

'얼간이들.'

전쟁이 칼 쓰는 놈들에게 기회의 장인 건 맞다. 하지만 그 기회라는 놈이 아무에게나 기웃거리는 건 아니다. 자고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목이 꺾이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는 거다.

'으음.'

하킴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애써 모른 척하며 넘겨왔던 그간의 피로가 한번에 몰아닥친 느낌이었다. 하루 정도는 푹 쉬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던 순간.

삐이익~!

느릿하게 몸을 누였던 하킴이 발작하듯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적이다!"

그는 머리맡에 기대어 세워 둔 검을 쥐고 막사를 뛰쳐나갔다. 이미 군중은 시장 한복판처럼 소란스러웠다.

"쏴라!"

"하, 하지만 대장! 제대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알아! 대충이라도 갈겨! 놈들이 머뭇거리기라도 하게 일단 쏘란 말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킴은 걸레들을 것은 걸러 들으며,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파악했다.

'다행이군.'

일단 적이 도강을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아직 강 위에 있었고, 그렇다는 건 아군에게 대응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성질 한번 급하군.'

물론 의표는 제대로 찔렀다. 설마하니 저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찔러올 줄이야.

'역시 매복해 있었던 거야.'

아마도 적은 저 갈대밭에 숨어서 아군이 건너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곳에 진을 치지 않고 곧장 도강을 시도했다면 십중팔구 좋은 꼴은 보지 못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킴은 소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툴툴대던 놈들에게 한 마디 할 거리가 생기지 않았나.

"가까워집니다!"

"계속 쏴라! 놈들이 강을 건너기 전에 한 놈이라도 더 줄여놔!"

그야말로 화살을 쏟아붓다시피 하며 견제했으나, 적의 속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화살비에 적이 곧 물러나겠거니 하며 낙관적으로 지켜보던 하킴도 점점 표정이 바뀌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너무 빠르다.'

화살비에 물러나거나 움츠러들지 않는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이 강을 건너오는 속도는 당황스러울 만큼 빨랐다.

'막을 수 없어.'

판단을 내린 하킴이 앞으로 나섰다.

***

"거의 다 왔습니다!"

"그래. 조금 더 힘을 내라."

가장 앞에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큼지막한 뗏목. 살라스는 그 위에 있었다. 한 손에는 방패를, 한 손에는 말의 고삐를 쥔 그는 열심히 노를 젓는 수하들을 독려했다.

박자에 맞춰서 동시에 노를 젓는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동작이 일치하는 병사들은 병사가 아니라 전문 노잡이 같았다.

우연이 아니다. 훈련의 성과다. 전장에서는 온갖 상황이 펼쳐지기 마련이고, 급하게 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우리가 건너가는 즉시 돌아가라."

"옛!"

살라스는 말머리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을 방패로 쳐냈다. 형편없이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화살 중에도 몇몇은 이렇게 제대로 날아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열중 일곱 정도는 허무하게 수면을 때리고 있지만.

'통한 것 같군.'

적은 아직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저들의 당황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저 혼란이 가시기 전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 한다.

쿵!

살라스는 미리 말 위에 올라 있다가, 뗏목이 강기슭에 닿자마자 뛰쳐나갔다.

"집결하라!"

***

"기병이다!"

뗏목에서 말을 탄 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설마 했던 하킴은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정신이 아니군.'

강을 건넌 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백정도? 빠르게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수를 추려야 했겠지만, 어쨌거나 고작 그 정도다. 기병이라고 해도 저 정도 수로 뭘 하겠나? 애초에 기병은 저렇게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 있으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건 상식이다.

'머리가 뜨거운 놈은 저쪽에도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운 좋게도, 그 머리 뜨거운 놈이 자그마치 지휘관인 듯했다. 뭐, 이쪽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둘러싸라! 달릴 틈을 주지 마!"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아군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장창을 든 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궁수가 받쳐주니 포위망은 자그마한 틈도 없이 완벽했다. 게다가, 적은 고맙게도 알아서 한데 뭉쳐주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말은 최대한 피해서 찔러라! 군마 한 마리면 네놈들 몸값보다도 더 비싸니까!"

상황이 나쁘지 않다 보니 마음이 앞선 몇몇이 벌써부터 여유를 부렸다. 하킴은 그들의 안일함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굳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지는 않았다. 박하게 봐서 나쁘지 않다고 표현한 것이지, 사실 그의 속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뭐, 뭐야!"

그때였다. 잘 좁혀들어가던 포위망이 갑작스레 크게 흔들리더니, 한 곳이 불쑥 무너져 내렸다. 길쭉한 마상검을 든 적 한 명이 창과 사람을 한 번에 가르며 뛰쳐 나왔는데, 나머지 적들이 그 뒤를 바짝 뒤따랐다.

"이런 한심한! 막아!"

그때까지만 해도 하킴은 말을 빗겨 찌르려던 어떤 한심한 놈이 실수를 저지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꺼번에 달려든 서너 명이 다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고, 적의 속도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빨라지자 그런 생각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상황은 눈에 계속 보였다. 한 명이 앞장섰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른다. 흔하다면 흔한 돌파진형이다. 그런데, 어째서 막지 못하는 거지?

머릿수는 말할 것도 없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도 이쪽이다. 달리지 못하는 기병 따위는 큼지막한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제압하지 못하지?

'뭐냐, 저건.'

이유는 알고 있다. 한 명. 가장 앞에서 억지로 길을 열고 있는 저 한 명. 기다란 검을 채찍처럼 휘둘러대고 있는 저 한 명 때문이다.

'빌어먹을, 거리를 벌리면 오히려 더 위험해진다는 것도 모르나!'

하킴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병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주변에 있던 용병대장들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병사들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기세에서 완전히 밀렸어.'

겁에 질린 아군 병사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자, 적은 자유롭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대장!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의 용병단은 어중이떠중이로 머릿수만 채운 삼류용병단이 아니었다. 거창하게 정예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놈들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수하들을 이끌고 싸움에 낀다면, 지금 저 한심한 놈들보다는 훨씬 더 제 몫을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미 기울었다.'

자신과 수하들이 나선다고 해서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까? 하킴은 그 부분에 있어 비관적이었다.

'저놈들이 끝이 아니야. 더 올 거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고작 기병 이백정도 가지고 이쪽을 상대할 생각은 아닐 거다. 그러니 저 이백의 역할은 당연히 시간 벌이다. 저놈들로 이쪽의 눈을 가리고, 뒤이어 본대가 건너오는 거다.

'막지 못해.'

지금이라도 나선다면 저 이백 정도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본대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터.

"물러난다."

"예?"

"곧 적의 본대가 건너올 거다. 그때는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될 거다. 그러니 지금 물러나야 해. 챙길 것은 챙기고, 천천히 퇴각한다. 저놈들도 이제 막 발이 풀렸으니 우리에게 따라붙지는 못할 거다."

"아…예."

수하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표정으로 물러날 때까지. 하킴은 적에게서, 정확히는 적의 선두에서 우악스럽게 길을 열고 있는 적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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