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화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대대적으로 용병을 고용했다.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국에서 고귀한 신분인 황족이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급하다는 거지.'
용병 생활만 얼추 스무 해 가까이 이어온 하킴은 느긋하게 주변을 살폈다. 정찰병들이 보고한 대로 탁 트인 지형이다. 매복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는.
'날씨 한번 좋구만.'
가장 앞서가는 놈이 가장 빠르게 화살을 맞는다. 용병들 사이에 도는 오래된 격언이다. 오래 살아남는 놈치고 그 격언을 허투루 여기는 놈이 없고, 누구 하나 선발대를 맡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쨌거나 용병단이라고 할 만한 큰 무리를 이끄는 놈들은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놈들이니까.
'멍청한 놈들.'
돈에 자신을 파는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남의 싸움에 피를 흘리고 싶은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흔히 칼밥먹는 놈들이 몸을 험하게 굴린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험하게 굴리기는커녕, 오히려 제 목숨을 더 끔찍이 여기곤 한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기어이 피를 봤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자신의 목숨을 끔찍이 여기는 사내였고, 그렇기에 그 긴 세월 동안 사지 멀쩡하게 용병 생활을 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평범한 용병들과 다른 것은 몸을 아끼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이익과 위험의 경중을 따질 줄 안다는 것이다.
기회라는 녀석은 종종 위험이라는 놈의 뒤에 숨어 따라오곤 한다. 지레 겁을 먹고 돌아서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한몫을 챙기기 힘들다. 그리고, 제대로 된 한 몫을 챙기지 못하면 큰 무리를 이끌지 못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피 보는 재주밖에 없는 무식한 놈들이라고 해도 어떤 대장을 따라야 하는지 정도는 아니까 말이다. 승리. 더 많은 돈. 그것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출신지가 어디든, 나이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하킴은 제법 인정받는 대장이었다. 휘하에 거느린 용병들만 사백 정도 된다. 정규군과 비교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용병의 기준으로 따지면 사백은 상당한 수였다. 일거리가 있으면 용병이 되고, 없으면 도적이 되는 질 낮은 무리가 아니라 제대로 등록이 된 용병단은 머릿수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형 용병단도 단원 수가 천이 넘어가는 곳은 굉장히 드물기에, 하킴의 용병단은 소위 말하는 그럴싸한 용병단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대장. 강이 보입니다."
"그래."
하킴은 인정받는 용병이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논할지언정 그의 수완만은 인정했다. 그는 맨손으로 시작해, 특유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렇듯 번듯한 용병단을 꾸렸다.
지금 그에게 말을 건 수하는 그를 따른 지 10년이 훌쩍 넘는, 용병단 내에서 최고참에 속하는 이였다. 그래서인지 말 하나, 행동 하나까지 거슬리는 구석이 없었다.
"제가 미리 일러두었습니다만, 그래도 대장이 한 번 더 확실하게 짚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이천하고도 예순둘. 그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하킴이 이끄는 용병단이었으나,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용병단들이 있었다. 하킴은 그가 이끄는 용병단의 규모가 가장 컸기에 자연스레 선발대의 대장 자리를 맡았으나, 다른 용병대장들은 그를 존중은 할지언정 그의 말에 복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금만 이해가 가지 않거나, 불쾌한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면전에서 욕지거리를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그는 꾹 참았다. 돌대가리들, 혹은 욕심만 가득한 돼지 새끼들과 투닥거린들 남는 것은 깊게 파인 감정골 뿐이다. 놈들을 상대할 때는 아이를 달래듯 해야 한다. 당근을 눈앞에서 흔들면서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지 않을 거요."
"엥? 그게 무슨 소리요?"
"제대로 들었으니 애꿎은 귀를 후벼 팔 필요는 없소. 다시 말하지. 우리는 강을 건너지 않을 거요."
"그럼 어떻게 더 진군한단 말이오? 돌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해도 꽤 멀리 돌아야 할 터인데?"
의문 가득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하킴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지도 않소. 우리는 강을 앞에 두고 진지를 꾸린 채 본대가 오기를 기다릴 거요."
"어째서? 우리는 싸우러 온 거요. 그러라고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적과 싸워야지."
"물론 싸워볼 만한 적이 앞에 있다면 싸워야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 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저길 한번 보시오."
하킴이 손을 뻗어 강 건너를 가리켰다. 용병대장들의 눈길이 따라서 움직였다.
"높이 자란 갈대가 쫙 깔려 있지. 매복하기에 안성맞춤인 지형 아니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매복이 걱정된다면 강을 건너기 전에 불화살을 쏴서 전부 태워버리면 될 일 아닌가."
"맞소. 적이 숨어있다면 타죽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거슬리는 갈대밭이 다 타서 없어질 테니 그걸로 된 것이고."
하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소. 기름과 화살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면 저 거슬리는 갈대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치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음?"
"내 장담하지. 적은 저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요. 우리가 힘들게 강을 건너오면 즉시 들이칠 작정이겠지. 당연히 그럴 거야. 나라도 그럴 거요."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여기서 엉덩이나 붙이고 있겠다?"
"바로 그렇소."
"겁쟁이라고 놀림 받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본대가 당도하면 뭐라고 변명할 거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지. 우리의 전력만으로는 역부족일 것 같아 여기서 본대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고."
"욕만 먹으면 다행이겠군."
할 말이 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용병대장들을 보며, 하킴이 표정을 바꿨다. 유들유들하던 목소리가 단호하게 변한 것도 그때였다.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내가 이 바닥에서 나름대로 오랫동안 굴러먹은 경험으로 여러분께 충고 한마디 드리지."
용병부대가 꾸려지고, 그 대장의 자리에 오른 후로 하킴은 휘하 용병대장들에게 부드러운 모습을 주로 보여왔다. 그들이 요청하면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주었고, 그들이 반발하면 되도록 좋게 설득하거나 뜻을 굽혀주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번 강하게 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순간에만 강하게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제껏 그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굽히지 않았던 때마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돈을 받고 싸우러 온 거요. 그러니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지. 하지만 싸울 필요가 없거나, 싸워서는 안 되는 경우마저 싸우려 들 필요는 없소. 까놓고 말해서, 받은 만큼만 하면 된다는 거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서 날뛰다가 손해만 잔뜩 입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이번이 그런 경우라 이거요?"
"그렇소. 생각해보시오. 선발대의 역할이 무엇인가? 본대보다 앞서가면서 길을 밝히는 것이 주목적이요. 그리고 우리는 이제껏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 길을 밝히다가 벽을 만났다면 일단은 멈추는 것이 당연한 거요. 그 벽이 절벽이라면 더더욱 그래야겠지."
"으음."
"정신 차리시오. 우리가 의욕적으로 나서다가 피를 흘리게 된들 저들이 신경이나 써줄 것 같소? 우리 중 얼마가 죽어 나가는 저들은 개의치 않을 거요. 돈을 주고 고용했으니 우리의 목숨이 자기들 손안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알겠소. 알겠어. 하킴 대장의 말은 이해했소. 하지만 본대가 당도했을 때, 사령관에게 변명할 말은 생각해두는 게 좋을 거요."
"물론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언제 표정을 굳혔냐는 듯, 하킴이 웃으며 답했다.
***
"적이 멈췄습니다. 진지를 꾸리는 것으로 봐서는… 도강을 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흐음."
살라스도 시어문드의 추측에 동의했다. 눈이 밝은 강 건너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적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막사를 세우고 있었고, 도강을 하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저기서 멈춰설 생각인가."
"우리의 생각을 읽은 것일 수도 있지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길게 자란 갈대숲이 오히려 적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셈인가. 살라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조금 더 두고 보시겠습니까?"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굳이 적이 강을 건너올 생각이 없다면 우리도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내 생각은 다르네."
시어문드가 씨익 웃었다.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음?"
"살라스님은 저희 중 장군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오신 분 아닙니까. 아니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살라스님은 이런저런 부분에서 장군을 닮으셨습니다."
"그런가."
살라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강 건너의 적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처음 맞닥뜨린 적이 아닌가. 놈들을 쓸어버린 후에 본대를 맞이한다면 그것만큼 좋을 수 없겠지."
"그렇다면?"
"적장은 신중하거나 겁이 많다. 뭐가 됐든, 생각이 많은 놈이겠지. 그런 놈들은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을 쉬이 예측하지 못해."
시어문드의 눈이 커졌다.
"설마 바로 들이치시려는……."
"왜 아니겠나. 얼마나 느긋하게 왔든 계속해서 이동해온 놈들이다.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줄 필요는 없지."
살라스가 잠시 벗어두었던 투구를 머리에 눌러 썼다.
"준비해둔 뗏목을 강에 띄우도록. 시기는…놈들이 진지 구축을 끝낸 직후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
"끝났습니다!"
"이쪽도 다 끝났습니다!"
진지 구축이라고 해도 별로 대단한 것은 없다. 막사를 세우고, 대충 나무를 긁어모아 목책을 만드는 정도였다. 이천 명이 부지런히 움직이니 늦은 저녁 즈음에는 일을 다 끝낼 수 있었다.
"수고했다."
"이제 쉽니까?"
"그래. 푹 쉬어라. 당분간은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대장의 말에 한 용병이 웃으며 말했다.
"쉬라고 하니까 쉬기는 하는데, 정말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쉬어도 불만이냐?"
"아뇨. 그게 아니라, 어색해서 그렇지요."
"흥."
싸우는 것을, 정확히는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킴이 겁쟁이처럼 군다고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사실 강을 건너지 않는 것에 진지하게 불만을 품은 이는 거의 없었다. 후에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책임은 하킴이 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우린 용병이다. 받은 만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만큼도 못하는 놈팡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받은 만큼만 해도 모범적인 용병이라고 할 수 있다.
"대장. 저…저거 보이십니까?"
"음?"
잠깐 어색한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수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저건……."
어둑한 강물 위로, 무언가 큰 점 같은 것이 여럿 보였다.
"적이다!"
머릿속에 떠올린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그는 다급하게 호각을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