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7화
골고스는 지키기 위한 요새였다.
어떤 요새가 그렇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골고스의 입지를 직접 눈으로 본다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사방이 온통 울퉁불퉁한 암벽이다.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쉽지 않다. 길이라고 있는 것은 좁은 비포장 길에 불과하니, 골고스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군대가 한 번에 오가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군터의 군대는 골고스가 아니라 골고스인근에 주둔했다. 정기적으로 수송대를 통해 교류하기는 하지만, 부대는 독립적으로 운용했다. 골고스의 사령관도 그것을 바랐던지 군터의 명령에 반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했다.
"딴에는 열심히 표정 관리를 했습니다만, 입꼬리가 씰룩거리더군요."
시어문드의 보고에 살라스는 피식 웃었고 아드리안은 심드렁하게 혀를 찼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 가지고, 그래도 사령관이라고 행세는 하고 싶은 모양이군."
"꼭 그렇게 생각할 일만은 아니지."
"음?"
"굴러온 돌을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게다가 그 돌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
"군인은 생각이 많으면 좋을 게 없어."
"세상 모든 군인이 자네 같이 모범적이지는 않지 않겠나."
"뭐……."
시어문드의 화법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의견 충돌을 일으키다가도 어느 순간 말끝을 흐리게 된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그렇게 입을 다물게 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는 거다. 가벼운 충돌에서도 결코 상대에게 반감을 주지 않고, 나아가 적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시어문드의 가장 큰 재주였다.
어쩌면 시어문드의 군재도 그런 면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군의 결속을 단단히 하면 할수록 외적을 상대로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법이니까.
"작은 포트락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작은 포트락. 쥬드 포트락의 아들을 이름이다. 시온 포트락이었던가? 분명 아폰렉스와 리바스트라의 접경지역에 주둔 중이라고 들었다.
"가문의 깃발을 들고 동진 중이라는군요. 군세는 대략 4만 정도 된다고 하는데…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답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따로 인편을 보내 알려온 정보다. 지금쯤이면 같은 보고가 황자의 군중에도 들어갔겠지.
"쥬드 포트락이 죽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쥬드 포트락이 살아있다면, 그러니까 건재하다면 그 아들이 그 정도의 대군을 거느리고 독자행동을 할 수는 없을 더. 그렇다는 건 쥬드 포트락이 죽었거나, 직접 군을 이끌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위쪽에서 움직였으니, 아래쪽도 보조를 맞추겠군요."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제 형제들을 쓸어버리고 아비의 뒤를 이었다. 후계 다툼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피를 뿌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심계와 결단력만큼은 보통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자인만큼 알고 있을 터였다.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뻔한 말."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그의 숙부가 보내온 서신을 대충 구겨서 던져버렸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그런 것을 지적할 만한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누구도 선황이 될 수는 없다.'
얼굴도 모르는 숙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더했다.
'카라누르는 누구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무슨 뜻이겠는가. 얼마가 될지도 모를 피를 보는 대신에 가진 것에 만족하자는 말이다. 황제가 아니라 왕이 되자는 것이고,
'괜찮은 제안이지.'
받아들이고 싶은 제안이다. 그는 황제라는 자리에 크게 욕심이 없었다. 누구도 선황이 될 수 없다는 숙부의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렇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믿음이 없어서? 물론 그런 것도 있다. 시간을 끌면 어느 쪽이 유리한지 명확한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상대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미 늦었소. 숙부. 내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면 또 몰랐겠지만.'
자리를 파한 후,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발코니로 향했다. 해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갔던 일은 잘되었소?"
한 손에는 병. 한 손에는 잔을 든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그늘진 구석에서 자그마한 균열이 일더니 짙은 어둠이 생겨났다.
[그럭저럭.]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에서 진심을 느끼기는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환야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물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지?]
"음?"
[계획대로 되면 너는 카라누르의 주인이 된다. 이 땅의 모든 인간이 바라는 자리에 앉게 되는 거지. 그런데 너는 내키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제대로 보았소."
[왜지?]
"내가 원해서 앉는 자리가 내 자리요. 떠밀려서 앉게 되는 자리는 얼마나 화려하던 결국 감옥이지."
무샤라트 트라소프가 돌아섰다.
"그대도 그렇지 않은가? 이미 한번 운명을 빼앗겨봤으니 잘 알 것 아니오?"
[잘 아는 것처럼 지껄이는군.]
말에 깃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알 만큼은 알지. 뭐, 딱히 더 알고 싶은 생각은 없소. 별로 관심 없거든."
[여기까지 와서 말을 갈아치우지는 못할 거라고 믿는군. 그 자신감의 원천은 그 믿음이겠지.]
"……."
[틀리지 않다.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지. 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그건 알아두도록.]
무샤라트 트라소프가 말없이 잔을 비웠다. 모욕감, 그리고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꺼지라 외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검을 뽑을 것이었다면 형제들을 베기 전에, 그 어두운 제안을 받자마자 뽑았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어째서 였는가? 이유야 대려면 얼마든지 댈 수 있겠으나 그 모두가 변명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더 잘 안다.
"나를 밀어줄 것이라면 당신이 직접 숙부의 목을 따면 되는 거 아니오?"
[말장난을 하는군.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환야가 암살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고, 거느린 수하들도 보통이 아니다. 무슨 술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귀신처럼 어둠 속을 넘나든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암살자가 꿈에서나 바라는 능력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왜? 숙부에게도 저들과 맞먹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역시나 편하게 갈 마음은 없는 것 같군."
[도울 만큼은 도왔다. 아예 입까지 떠먹여주기를 바라나? 황좌에 앉고 싶다면 자격을 보여라.]
어둠이 걷히고,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홀로 남은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조소했다.
'자격을 보이라니. 바라지도 않는 자리에 밀어놓고서 바라는 것도 많군.'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가 잔을 집어던졌다.
소리를 들은 시종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황망한 표정을 한 그들에게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저 중에 그림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섞여 있을 것이다. 하나? 아니면 둘? 그런 생각이 들자 머리가 뜨끈해지면서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
"얼마 되지 않습니다. 많아 봐야 이천 정도라 하니……."
"선발대일까? 어찌 생각하나?"
"척후는 처음 보는 깃발이라고 했습니다. 어지간한 가문의 문장은 달달 외고 있는 문장관들도 고개를 저을 정도니, 이름난 귀족 가문의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문이 아니고서야 독립적으로 그만한 부대를 이끌기는 힘들지요."
"용병일 수도 있겠군."
살라스의 말에 시어문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단단히 마음 먹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대규모로 징병을 한 것은 물론이고, 용병들까지 대대적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긁어모은 막대한 병력을 각지에 흩어놓았다.
"그렇지만 고작 이천이라니. 우리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용병들은 정보가 늦을 수밖에 없지요. 그게 아니면, 우리를 끌어내거나 흔들어보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흐음."
"어쨌거나, 보고는 하셔야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머릿수가 만 단위가 넘어가는 군대가 한곳에 주둔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라, 군터는 그의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살라스에게 일군을 주어 골고 스에서 서쪽으로 하루 거리에 위치한 봉우리에 진을 치게 했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거기서 남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마지막으로 아드리안은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머물게 했다.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적의 움직임에 맞춰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서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 이천 가량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살라스가 군터에게 소식을 전하자, 군터는 곧장 답신을 보냈다.
'적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가, 놈들이 강을 건너면 즉각 섬멸하라.'
살라스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이틀하고 한나절 정도를 이동하면 자그마한 강이 하나 나온다.
갈대가 제법 높게 자라 시야 확보가 쉽지 않은 지형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기에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더 쉬웠다. 부대라 할 수 있을 만한 머릿수가 한 번에 움직이면 갈대숲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장군께 명을 받들겠노라 전해라."
"예."
살라스는 다시 전령을 보내고 즉시 투구를 집어 들었다. 그에 시어문드가 물었다.
"바로 가시렵니까?"
"잘 보려면 가까이서 봐야 하지 않겠나."
"그 때문입니까? 몸이 근질거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맞고."
살라스는 군터가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실전다운 실전을 겪은 지 오래였고, 때문에 솔롬에 있을 때 그는 종종 전장의 공기를 그리워했었다.
"병사들은 얼마나……."
"천이면 충분하다."
용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았나. 뭐, 이름 모를 귀족의 군대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래도 어중이 떠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