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66화 (866/1,064)

866화

현재 전선은 양(兩)주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어느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샤라트 트라소프 측은 아폰렉스와 콜레인에 군을 집결시켰고, 자콥 트라 소프 측은 리바스트라와 아록에 역시 군을 모았다. 현재 자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저 4개 주의 접경이었다.

"이쪽은 배제하는 건가?"

군터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쪽을 짚었다. 아록의 남단. 서남쪽으로 벵모스와 닿아 있으면서, 동시에 남쪽으로는 황도와 이어지는 대도(大道).

"그쪽은 생각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물론, 저쪽에서도 말이지요."

"황도기 때문에?"

"예."

"수호자가 황도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어디까지나 황궁과 그 인근 일부일 겁니다."

뭉뚱그려 황도라고 하지만, 사실 황도라는 것은 황궁이 있는 황제의 도시 리비암과 그를 포함한 거대한 권역을 의미했다. 그러니 황도 리비암은 도시이면서, 하나의 커다란 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황도는 후계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중립을 지키고 있지요."

수호자 키리스트가 쥐고 있는 것이 황궁과 수도일 뿐이라지만, 황도에서 그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는 없다. 아니, 애초에 뜻이 다른 이도 얼마 없을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나? 비어있는 황좌의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험을 걸기보다는 중립이라는 명분과 키리스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변명 하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기는 할 것이다. 향후 제국의 수십 년을 가를 변곡점에서 한번 모험을 해보고 싶은 이들이.

"키리스트가 저쪽을 은밀히 후원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해도, 드러내놓고 편을 들지는 못할 겁니다."

"희망사항이로군."

"근거 있는 추측이지요."

키리스트가 본래 바라눔 트라소프를 지원했고, 지금은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은 은밀한 비밀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어문드는 황도에 파리를 튼 수호자가 드러내놓고 끼어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지금껏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요."

군터는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는 시어문드의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뭐, 이쪽 황자도 같은 생각인 듯했고,

***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먼저 부딪쳐 줄 생각도 없다."

각지에서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다 끌어모은 자가 할 말인가 싶었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진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리해지는 건 이쪽이니, 그는 굳이 전면전을 벌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군대를 소집한 것은 얼굴도 모르는 조카가 제 형제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그 기세를 몰아 들이치려는 모양새를 보였기 때문.

"끌기만 해도 유리한 싸움인데, 굳이 위험부담을 져가며 회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

"걸어 잠그고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병력이 모자라니까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비교적 젊어 보이는 무장이 말을 받았다. 몰븐 테오프릭. 꽤나 역사 깊은 명문 무가의 당대 가주이자,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적포를 하사받은 이였다.

"적은 전선을 넓히려고 할 겁니다. 듣자 하니 용병까지 대거 고용했다더군요. 대부분은 머릿수만 채우는 용도겠지만, 그 머릿수가 한 번에 국경을 넘어오면 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놈들이 넘어오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굳이 힘들게 갈 필요는 없지."

"무슨 말씀이신지?"

"어차피 아록과 리바스트라는 전장이 된 지 오래다. 그동안은 양주를 성벽 삼아 버티기로 일관했으나, 이번에도 놈들이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온다면 이쪽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황자의 시선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나 좌중은 모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의 눈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으음."

"허나 전하. 맞불을 놓는 식으로 간다면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혼전입니다. 굳이 우세를 버리고 모험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군을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지."

의문에 찬 시선들을 무시하며, 황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신주(神柱)다."

신주.

별로 익숙하지는 않은 단어를 들은 순간. 군터는 그의 기억 속, 그 단어를 처음 들었던 순간을 회상했다.

그에게 신주라는 것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줄카였다. 그가 헤이모라에 당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눴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주로 줄카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용을 죽였다는 전설을 지닌 제국의 군주는 제법 수다스러웠다. 본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친우의 무덤이 그를 그리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 그 당시는 정말 정신없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지. 미지의 땅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그 땅에 사는 것들이 신이라 부르는 족속들. 그래. 만만치 않았지. 그 땅의 인간들만 무릎꿇리는 것이라면 손쉬운 일이었을 테지만, 황제는 그 이상을 바랐거든. 그 녀석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정복하기를 원했다.]

줄카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야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신의 발아래에 놓이기를 원했다. 그건 초월적인 존재, 예를 들면 신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군대와 힘을 지녔다 하더라도 신을 물리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뒷감당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없애는 대신 봉인하기로 한 거다.]

신의 봉인. 그것이 신주다.

[겪어봤으니 알고 있겠지.]

신주는 제국의 비사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 존재를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크게 겪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신주라 하심은."

"아마도, 짐작하는 것이 맞을 거다."

나이 지긋한 무장이 언성을 높였다.

"통제 불가한 재앙입니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바라눔이다."

"그 말씀은 렌의 참사가……."

"추측일 뿐이지만, 뻔하지 않은가."

증거는 없다. 애초에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주의 존재, 그리고 그 봉인을 뒤틀어버리는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시기와 장소까지. 이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증거는 없어도 렌에서 벌어진 재앙의 배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추측하고 있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오나 전하. 신주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그 봉인에 대해서도?"

"모른다면 이야기를 꺼냈겠는가."

어떻게 알아냈느냐고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황가에만 전해지는 비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헤이모라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군주에게서 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황자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확실히 크게 이득을 볼 수 있겠군요."

"그럴 것이다."

황자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와중에도,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는 이들이 몇 있었다. 주로 나이 지긋한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리 황좌의 주인을 가리는 싸움이라고 해도 제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재앙을 인위적으로 일으킨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며 한마디씩 했다.

황자는 그들의 고지식함을 탓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고지식함을 제국에 대한 충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황자가 뜻을 드러낸 덕에, 회의는 급물살을 탔다.

주된 전략은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병력이 받아치고, 그 사이 별동대가 국경을 넘어 신주로 향한다.

"크렘보르 장군은 골고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다가, 적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군터도 주둔지를 배정받았다. 골고스는 아록의 북서쪽에 자리한 요새였는데, 적이 아폰렉스에서 넘어 온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곳 중 하나였다.

***

새벽.

군을 움직이기에 좋은 시간대는 아니다. 어둠이 걷히지 않아 어두워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뿐더러, 찬 공기는 몸을 굳게 한다. 바람이라도 분다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일 뿐. 줄카의 군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모두 용아인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일반 병졸들 사이사이에 배치된 용아들이 특유의 열기를 발산하고 있으면, 그 열기는 순식간에 군대 전체를 뒤덮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신비였다.

어둠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을 이끄는 장교들은 대부분 용아였으며, 그들의 눈은 올빼미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들에게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다.

히히힝!

갑작스레 멈춰 선 말이 불만스럽게 울음을 토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직한 울음이다. 맹수도 들이받을 정도로 배짱 좋은 말이었지만 그런 사나운 말조차 항상 제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 빠른 말은 자신의 등에 앉은 주인이 그 어떤 맹수보다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 앞의 어둠 한가운데, 줄카는 그 미묘한 일그러짐을 바로 눈치챘다. 그 균열 속에 한 마디를 툭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온다.

[드러내놓고 개입하지 않는다. 묵약 아니었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균열이 크게 번지더니, 그 속에서 거뭇한 형체가 일렁였다. 그를 본 줄카가 입매를 비틀었다.

[드러내놓고의 기준이 뭐지? 유치한 말장난은 집어 치우도록.]

[그래서 이제부터는 전면전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놀랍군. 언제부터 그렇게 충성스러워졌지?]

어둠 속의 형체가 침묵했다. 동시에 초에 붙은 불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던 어둠이 점차 크기를 줄여갔다.

[우리가 나선다면 다시 판이 어그러진다. 자네도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경고인가?]

[글쎄. 난 그저 말을 전할 뿐.]

일렁임과 균열이 사라지고, 줄카는 뒤늦게 불안에 떠는 말을 다독였다. 올라갔던 입매는 도로 내려온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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