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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65화 (865/1,064)

865화

"각하, 났습니다."

"……."

"각하?"

"알았다. 물러가라."

"예."

아라누만 멘티케는 보고를 들은 척 만 척하며 상념에 잠겼다.

군터 크렘보르가 한 말은 아직도 그를 붙들고 있었다.

'가려운 곳을 아주 제대로 긁어놓는군.'

불청객은 떠났다. 그들이 바라던 물자를 급히 확보하느라 꽤 출혈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머릿속을 흔들어놓을 작정이었다면 아주 제대로 성공했어.'

이쪽을 현혹하기 위한 이간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군터 크렘보르가 한 말 중 틀린 것은 없었다.

그러니 이간질을 학 작정으로 던진 말이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아."

다른 자가 같은 말을 했었다면 헛소리를 한다며 역정을 냈을 것이다.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겼거나.

그러나 군터 크렘보르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이드라 멕시스와 같은 지방 귀족들과 연수하며 중앙 귀족들이 경계할 만한 세력을 일구기까지 했다.

물론 전면에 나선 것은 자이드라 멕시스이고, 실제로도 그가 지방 귀족들을 이끌고 있기는 하지만 존재감만은 군터 크렘보르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실제로 중앙에서 갖고 있는 그에 대한 경계심은 자이드라 멕시스 못지않았고,

'총독씩이나 되면서 그저 조금 중요한 말 하나일뿐.'

자존심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은 멘티케라는 이름을 달고 말단 관인이 될 때부터 보이지도 않는 곳에 버려두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도발 한 마디 따위에 발끈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치기는 오래전에 내려놓았다 생각했거늘.'

출세하겠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막연하게 위만 바라보았던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은 현실을 겪고 알게 되면서 목표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아니. 아니지.'

아라누만 멘티케는 보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목표가 뚜렷해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그래. 겁이 많아진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앞뒤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과거와는 달리 이리저리 재면서 겁쟁이처럼 굴게 됐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현실적인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누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아라누만 멘티케는 자신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줄 아는 사내였다. 그는 욕심은 많았으나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정무적인 재능과 눈치, 처세술 쪽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남들보다 조금 더 자신 있는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온 것도 상당한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군터 크렘보르처럼 혼자서 백 명의 목을 딸 정도의, 특출난 재주가 있어서 아니라.

'운. 운이라.'

운이라는 것은 상당히 신기한 녀석이다. 누구나 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또 자신에게 찾아오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아라누만 멘티케는 운이라는 것이 때, 그러니까 시기라고 생각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적절한 시기에 찾아오는 것. 그것이 운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그는 이 운이라는 녀석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어쩌면, 아주 어쩌면 한동안 뜸했던 그 녀석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중앙 조정은 소란스럽지.'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어느 한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으며, 본격적인 정쟁은 전쟁 탓에 벌이지도 못하고 있다. 직접 전선에 나가 있는 황자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군주는 일선에서 피를 보고 있는데, 후방에 남은 귀족이란 자들이 제 잇속을 챙기려고 으르렁대기만 한다면 그 어떤 군주도 곱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런 와중에,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정확히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겠는가.

아라누만 멘티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밤을 지새웠다.

***

"확실한 것 같습니다."

"확실하면 확실한 것이지, 확실한 것 같은 것은 뭐란 말이냐."

"예? 아, 그것이……."

"됐다."

자콥 트라소프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막사에 홀로 남은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갔는가."

만인의 칭송을 받는 영웅도 결국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고 찾아오는 죽음을 물리칠 수 없다. 만약 물리치거나, 피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인간이란 생명은 끝이 정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삶. 그리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으니,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

한 번쯤은 직접 만나서 묻고 싶었다. 왜 자신이 아니라 바라눔을 택했는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자신에게서는 또 무엇을 보았는지.

많이도 궁금했지만, 다 부질없게 됐다. 죽은 자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쥬드 포트락이 죽었다? 확실한 것이냐?"

"십중팔구입니다. 근 한 달간 그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만책일 수도 있지."

주름진 눈이 냉정하게 지도를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듣는 일단 의심한다. 사람을 믿지 않고 상황을 믿는다. 그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전장에서든, 조정에서든 그 철칙을 잊은 적이 없다. 그러한 냉정함과 확고함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두 가지를 가정하도록 하지."

"쥬드 포트락이 살았을 경우와 죽었을 경우입니까?"

"그래."

"상정해보겠습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군재가 그리 출중한 편은 아니었다. 좋게 봐도 평범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볼 줄 알고, 쓸 줄도 알았다. 그의 휘하에는 그를 대신해 군략을 짜고, 병사를 지휘할 인재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의 명을 받은 수하들은 머리를 쥐어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것이다.

"아들이 하나 있다지?"

"예. 시온 포트락이라고 하는데, 아비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돌았다더군요."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다. 닮은 것뿐이지 본인인 것은 아니니까."

방심은 하지 않는다. 허나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높게 치지도 않는다. 만약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 아비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재주를 지녔다면 그 이름이 진즉에 제국 전역을 울렸을 것이다. 쥬드 포트락은 그랬으니까.

"그나저나…이제 곧이겠군."

"예. 그렇겠지요."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대답은 즉시였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막하에 재주 없는 이는 없었고, 머리가 나쁘거나 눈치가 없는 이 역시 없었다.

"그래. 제법 끌었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낼 때도 되었어."

***

둥! 둥! 둥!

전고가 우렁차게 울었다. 대열을 맞춘 군대가 한 몸이 된 것처럼 한 발자국씩 내딛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기다리고 있는 아군에게 우리가 이 정도라는 것을 알리듯, 병사들의 발걸음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판니른의 군대다!"

깃발을 알아본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 외침은 순식간에 넓게 퍼졌다. 판니른과 크렘보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알아보는군."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지. 군문에 있으면서 장군의 무명을 듣지 못한 이가 있겠는가."

시어문드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는 그도 모르는 사이 조금 더 펴진 채였다.

"그래. 그렇지."

아드리안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넓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한, 과장 조금 보태서 하나의 도시 같은 거대한 군영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잘 와주었다."

군터는 군영에 도착하자마자 황자를 만났다. 군터는 그의 건조한 환영에 군례로 답했다.

"판니른의 군대를 보았다. 군기가 정연한 것이 얼핏보기에도 정예 같더군. 활약을 기대하겠다."

황자의 양옆으로는 여러 얼굴들이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자들도 있었고 생소한 자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모자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이미 대부분 들어 알고 있겠지."

군터가 적당히 자리를 찾아 서자, 황자가 입을 뗐다.

"쥬드 포트락이 죽었다."

"사실입니까? 솔직히…믿기 어렵습니다."

"사실인 것 같다. 저쪽에서 그런 것으로 속이려 들필요는 없지."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쥬드 포트락이라. 군터는 귀에 익은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제국의 영웅이니 뭐니 하는 자다. 간접적으로 맞붙은 적도 있고.

별로 대수롭지는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

"그가…정말로 죽었단 말인가."

그런데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쥬드 포트락이라는 이름이 그들에게는 그렇게도 무거운 이름인 것일까. 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군터로서는 그들의 동요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뛰어난 적이 죽었다면 이쪽으로서는 낭보다.

먼저 감정을 가라앉힌 이들이 입을 열어 비슷한 소리를 해댔다. 진군해야 할 때라느니, 이 소식을 퍼뜨려서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아야 한다느니 하면서.

"확실한 것 같다고는 하나,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사실이라면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일입니다. 자연스럽게 아군의 사기는 치솟고, 적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니 적당히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저런 논의 끝에 힘을 얻은 것은 신중론이었다.

틀린 구석이 없이 그럴듯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이들이 한두 마디씩 보태며 동조했다. 그러자 황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회의가 파한 후, 주둔지를 할당받은 군터는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본영에서 제법 떨어진 고지대였는데, 그의 군대가 머물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진지를 세우고 난 후, 군터는 그의 막사에 수하들을 불러모으고 낮에 있었던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전했다.

"그러면, 당분간은 대기입니까?"

"그래."

짧게 답한 군터가 한 한 마디를 더했다.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황자를 만나고 쥬드 포트락의 죽음을 논하던 자리에서, 군터는 느꼈다. 폭발하기 직전까지 차오른 전장의 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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