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살라스는 아주 잠깐, 저 개기름만 많아 보이는 뚱뚱한 사내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나 고민했다. 군터가 자신은 보지 못한 무언가를 저 사내에게서 본 것일까, 그래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잠시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깔끔하게 생각을 접었다. 알아야 할 것이라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고,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살라스의 본질은 군인이었다. 군인은 군무 외에는 생각이 많을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살라스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 사이, 군터가 포도주가 반쯤 차 있는 잔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장군이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아서 말이오."
"부인하지는 않지."
아라누만 멘티케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모를 자였다. 이제 그는 군터 크렘보르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이자는 이제껏 그가 봐온 누구와도 달랐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상식이 부정당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요?"
"그런 건 없소."
그렇다면 여기까지 들이닥쳐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이유가 뭐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꾹꾹 눌러 참았다.
군대의 보급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도 핑계가 아닌가. 보급이야 이동 중에 현지조달을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굳이 잘 가던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시라쿠바에 올 필요는 없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당연하고, 그 목적은 자신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날 가지고 노는 것인가?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상대의 태연한 안색이나,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말장난을 치는 자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뭐요?"
"흠흠!"
짐짓 도발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아라누만 멘티케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음과 동시에 아차 했지만, 이미 저쪽의 표정은 일그러진 뒤였다. 그나마 시어문드라고 했던가? 비교적 차분한 인상의 무관만이 헛기침으로 조용히 경고를 보냈다. 나머지는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술기운이 돌았나? 그럴 리가. 이 정도 마셨다고 이 성이 흐려지지는 않는다. 취했다면 술이 아니라 분위기에 취했겠지. 이 정도 도발적인 언사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것 같은 저 사내의 분위기에.
다행스럽게도 그 섣부른 판단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수하들의 반응이야 어떻든,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경고하기 위해서지."
"…경고?"
아라누만 멘티케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불편해도 그럭저럭 누울만하던 침대에 누워있다가, 한순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한복판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대와 나 사이에 일이 있었지."
"그렇소. 하지만 그건……."
"그대 말처럼, 서로의 입장대로 움직인 것뿐이지. 탓할 생각은 없소."
"……."
"하지만, 따질 것은 따져야겠지."
"장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만, 따지고 싶은 사람은 나요."
방금 내뱉은 한마디는, 단언컨대 근 십 년 동안 아라누만 멘티케가 낸 가장 큰 용기였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기어이 하고만 것은 이대로 주도권을 내줄 수는 없다는 마음의 발로 내지는 발악이었다.
"테리브란에 있는 자들을 너무 믿지 마시오. 제 앞 가림도 벅찬 자들이 언제까지 그대의 뒤를 봐줄 것 같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언제나, 어디서나 믿을 것은 자신의 힘뿐이지. 그걸 모르는 자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아라누만 멘티케가 입을 다물었다. 노리고 한 말일까? 아마 그렇겠지. 어쨌거나 지금 한 마디는 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 지금껏 악착같이 달려오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 달고 있던 쇳덩이. 그건 자신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줄이, 저 위에서 한순간 싹둑 잘려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지금 그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그건 결국 빌린 권세로 얻은 것이었다.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달리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진정한 권력자들의 눈에 들고,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출세할 수가 없다. 그런 세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한 주의 총독쯤 되었으니, 이제 그들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근거 없는 안일함은 아니었다. 총독이란 현실적으로 관인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자리다. 대다수 관인은 꿈에서도 이 자리에 앉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총독 자리에 자신을 앉힌 것이 테리브란 조정에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뜻대로 사람을 앉힐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뜻대로 바꿀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물론 알고 있소. 허나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총독쯤 됐으면서도 배짱이 없군."
순간 울컥한 아라누만 멘티케가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대는 모르겠지. 정치판이라는 것은 전장처럼 간단명료하지 않소."
"그럴지도. 뭐, 그쪽이야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겠지."
역시나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인 군터가 잔을 비웠다.
"하지만 한번 잘 생각해보시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땐 엄한 놈을 뭉개는 대신 내가 그대의 목을 비틀어버릴지도 모르오. 아니, 아마 그러겠지."
"결국은 협박이오?"
"누구도 당신을 구해줄 수 없소. 구해줄 수 있다 한들 그러지 않겠지.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이 내게 죽기를 바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도 책임을 져야 할 거요."
"져야 한다면, 지면 그뿐."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라누만 멘티케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두렵지 않소. 내게 일어나는 일은, 내가 한 일에 따라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소. 하지만 그대는?"
"……."
"총독씩이나 됐으면서도 일개 말에 불과하지. 주인이 언제든 쓸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그나마 조금 중 한 말이라고 자위하면서 꼬리나 흔들고 있지만, 참 초라해 보이는군."
군터와 그 일행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나서도 아라누만 멘티케는 한참이나 못이 박힌 듯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군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진정으로 출세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면, 한번 잘 고민해보시오. 그나마 혼자 뭔가라도 해볼 수 있을때.'
***
시어문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놀랐습니다."
"뭐가 말이냐."
"제법 오랫동안 따랐습니다만, 장군께 그런 언변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대로 보았다. 내 생각이 아니다."
"예? 그렇다면,"
"자이드라 멕시스."
"아……."
자이드라 멕시스는 서부 전선에 가 있다. 하지만 몸은 전선에 있어도 그의 눈은 항시 테리브란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군터가 일을 벌였을 때도 그는 즉시 연통을 보내왔다. 이번 일에 대한 우려를 짤막하게 드러낸 후, 테리브란에 있는 그의 사람들을 움직여 사태를 무마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 지은 후, 다시 연통을 보냈다. 거기에는 오젠 총독 아라 누만 멘티케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중앙 귀족들의 하수인에 불과하지만, 그 수완만큼은 인정할만한 자. 하지만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는 불안한 입지 탓에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
불편한 이웃은 가능하다면 정리하는 편이 좋지만, 문제는 그렇게 정리한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거다. 아라누만 멘티케를 처리한다고 해도 데리브란에 있는 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반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 아플 테고, 써먹을 수 있다면 좋고, 아니어도 괜찮은 말 하나.
그것이 현 오젠 총독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가능하면 그를 한번 잘 구슬려 보라고 했다. 그에 군터는 왜 자신이냐고 물었다. 말재주도 없고, 이미 한번 직간접적으로 부딪친 자신이 그와 접촉한들 무슨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겠냐면서 말이다.
그러자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렇게 답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내는 법이라고.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가진 것 없이 출세욕 하나만으로 기어 올라온 놈.'
아라누만 멘티케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표현이 더 있을까.
단순한 욕심과 야망은 다르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세간에서 탐욕스럽다고만 알려진 오젠 총독을 누구보다 정확히 보았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건가.'
재주라고는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밖에 없다는 돼지 총독과 비슷한 취급을 당했으나 특별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틀리지 않았다. 분명 자신과 아라누만 멘티케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과.
믿을 거라곤 젊음의 혈기와 타고난 용력 하나뿐이었던 시절, 맨몸뚱이 하나뿐인 주제에 거창한 야심을 품고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치던 그 시절. 그때의 군터와 아라누만 멘티케는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그래. 그랬지.'
자신의 과거임에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흔히 과거를 반추하면 느낀다는 아련함 같은 것도 없다.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처럼 건조하고 담담할 뿐.
"살라스."
"예."
"처음 나와 만났을 때를 기억하느냐?"
"물론이지요."
살라스가 즉답했다.
"어찌 잊겠습니까."
"많이 변했지.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
그리고 변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때도 지금도, 장군은 장군이십니다."
살라스는 답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군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