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화
"군대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두려움에 빠질 수 있어……."
어색한 표정을 한 관리가 변명을 늘어놓자 군터는 그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손을 들어 끊었다. 좁은 어깨가 움츠러들어 더 초라해 보이는 관리의 뒤편으로 오젠의 주도 시라쿠바의 성벽이 보였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성벽 위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뭔가 늘어서 있다는 정도만 알뿐이겠으나, 군터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은 물론 굳은 표정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군터는 관리의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갔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 그래도 창백한 관리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러지."
군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그를 지나쳤다. 잠시 멍하니 있던 관리는 살라스와 시어문드 등까지 그를 지나치자 그제야 허둥지둥하며 따라붙었다. 그러면서 그는 팔을 쭉 펴고 열심히 흔들었다. 성벽 위에 있는 이들이 빨리 알아차리기를 바라며.
쿠구구궁!
다행히 성문은 늦지 않게 열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열렸지만, 시어문드는 비릿하게 웃으며 비꼬았다.
"경비가 삼엄하군요. 누가 보면 적군이라도 들이닥친 줄 알겠습니다."
"그것이……."
"뭐, 이해합니다. 시라쿠바의 관민들이 제대로 된 군대를 보기나 했겠습니까."
"으음."
모욕적인 조롱에도 관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선을 돌렸음에도 여전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정연, 한 군기가 그를 압박했다. 그리고, 말없이 앞서가고 있는 군터 크렘보르의 존재감이 변명을 허락지 않았다.
"어, 어서 오시오. 크렘보르 장군. 이 사람은 오젠을 다스리고 있는 아라누만 멘티케라 하오."
다행스럽게도 무례는 한 번으로 그쳤다. 오젠 총독아라누만 멘티케는 관저에서 기다리는 대신 수하 관리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시어문드의 불평 섞인 조롱이 더 이어질 수 없었던 이유다.
"……."
군터는 푸짐한 몸집의 아라누만 멘티케를 일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는 필요 없겠군."
"하하. 듣던 대로 말수가 적으신 분이로군."
호오. 시어문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군터를 처음 본 자리에서 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이는, 적어도 그가 본 이들 중에는 처음이었다. 직접적이지는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례를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평생 칼이라고는 어렸을 때나 몇 번 휘둘러 본 게 다인 것 같은 자가.
'확실히 총독쯤 되면 돼지라고 해도 멧돼지 정도는 되는 모양이군.'
하긴, 능력 없이 탐욕스럽기만 한 자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총독이 되었다면 뭔가 재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다. 그게 배짱이든, 실무 능력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요청한 것은 다 준비됐소?"
"거의 다 됐소."
"아직이란 소린가."
"군대의 보급물자를 마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소. 더군다나 갑작스럽고 빠르게 준비해야 할 때는 더더욱."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할 말은 한다. 겁에 질린게 분명히 보이는데도 한 마디도 밀리지 않으려고 한다.
군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추잡한 돼지 같은 놈이 맞먹으려 드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에 일부 눌려 그리 크지 않은 눈에서 오기가 아닌 절박함을 보았을 때,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절박함. 생소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이런 자리에서 느끼기에는 낯선 감정이다. 무엇이 절박하단 말인가. 목이 날아갈 염려도 없고, 온갖 진미가 눈이 닿는 곳마다 널려 있는 이런 자리에서 왜 절박함 같은 감정이 보인단 말인가.
군터는 아라누만 멘티케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전부 들은 이야기였다. 그마저도 많지는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일로 부딪치기 전까지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이름뿐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테리브란 조정에 뒷배를 뒀고, 한 주의 총독이면서도 그들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한심한 작자. 그러면서도 탐욕스럽기는 또 엄청나게 탐욕스러워서, 재물을 긁어모으는 재주는 여느 악독한 장사치 못지않다던가. 하여간 들려오는 소문 중 긍정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모두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닌 소문일 뿐이라는 것을 고려하기는 해야겠지만.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 해둡시다. 날 재촉한다고 해도, 설령 내 목을 친다고 해도 안 되는 게 갑자기 되지는 않으니까."
아라누만 멘티케의 시선이 군터의 허리춤을 향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는데, 차마 군터에게까지 칼을 내놓으라 하지는 못했던 터라 이 자리에 무기를 지닌 이는 군터뿐이었다. 겁 많은 총독은 군터가 갑자기 그 칼로 자기의 목을 베기라도 할까 우려하는 듯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칼을 왜 든단 말인가. 한손을 뻗기만 하면 아라누만 멘티케의 두꺼운 목은 단번에 꺾을 수 있을 텐데.
하여간, 가까운 칼 때문인지 아라누만 멘티케의 태도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의 경직된 어깨가 조금 이나마 풀어진 것은 음식과 술이 적당히 입에 들어간 후였다.
"사실 장군을 한번 직접 만나고 싶었소. 들리는 이야기야 무성하다지만, 장군도 알다시피 세간의 소문이라는 것은 좀처럼 믿을 것이 못 되니까. 그래도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흠모하는 마음도 있었소."
군터는 답하지 않고 금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언젠가부터 그랬듯, 맛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향도 그렇고 색도 그렇고 최고급임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나날이 무뎌지고 있다. 모든 것에.
하지만 지금, 되도 않는 말을 열심히 지껄이고 있는 저 돼지 같은 자는 색달랐다. 이런 유형의 인간을 보는 것이 처음일 그런지 제법 흥미로웠다.
"…그렇지 않소? 따지고 보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교류가 없어도 너무 없었지."
"그대와 내가 교류가 있어야 할 사이는 아니지."
"무,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하지만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한 주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아니오. 우리의 관할구역이 접해 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소?"
"글쎄.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군터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을 끊자 우물거리던 아라누만 멘티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솔직히 말하리다. 우리 사이에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오.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서 한 일이니 따질 마음도, 사과할 마음도 없소. 장군도 그렇겠지."
"……."
"하지만 한번 조금 틀어졌다고 해서 관계를 돌이킬수 없는 건 아니오. 사실, 나는 돌이키지 못할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사람이오. 그대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소. 나 역시 장군을 잘 안다고 말하지는 못하오. 나름대로 열심히 알아보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나도는 소문을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지."
감정에 호소하는가? 아니. 그보다는 푸념에 가까웠다.
"나에 대해 도는 소문들을 알고 있소. 왜 모를까.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아주 신나게도 입을 놀려대는데, 못 들을 수가 없지."
한숨 뒤에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아라누만 멘티케가 연거푸 잔을 입에 가져갔다.
"악의적인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사실이오. 악착같이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도, 중앙 조정에 줄을 대고 있는 것도, 그 줄을 잡고 어떻게든 기어오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도 다 사실이지."
아라누만 멘티케는 자신의 치부를, 어쩌면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군터 앞에서 대놓고 드러냈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안색은 멀쩡했으며, 말투 역시 그대로였다.
"일개 병졸로 시작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이르셨다지. 심지어 국적까지 바꾸어가면서? 참으로 대단하오. 혼자서 이루었다고 큰소리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들 중 진정 아무것도 쥔 것 없는 맨손으로 이룬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 그런 면에서 장군과 같은 이들은 충분히 존경할 만하지. 그러나…알고 계시오? 나 역시 그렇소. 장군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가진 것 하나 없는 몸으로서 지금 이 자리까지 이르렀소. 아! 하나 있긴 하군.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수도 있는 긴 이름 하나. 그래. 그거 하나만은 가지고 있었지."
정적의 앞에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건, 누가 봐도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을, 할 수 없는 행동.
그러나 아라누만 멘티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연 것이 아니었다. 처음 군터를 만난 순간부터 그는 한시도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말인즉, 상대의 반응을 계속해서 살폈다는 뜻이다. 자신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숨기거나 속이는 기색은 없는지, 줄곧 매의 눈으로 확인해왔다.
그런 노력 덕에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군터 크렘보르는 일반적인 귀족과 다르다. 비단 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더라도, 그가 이제껏 봐온 그 어떤 인간과도 다르다. 그는 흥미를 보여야 할 것에는 시큰둥했다.
반면 생각지도 못한 것에 그나마 반응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였다.
별나다고 생각했으나, 상대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아낸 이상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화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어내려 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어차피 아라누만 멘티케가 원하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것이었다. 보급물자가 다 준비되면 이 숨 막히는 불청객은 떠날 테니까.
"몰락한 귀족의 신세는 평민보다 못하지. 과거의 명예와 영광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니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짙은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하지만 난 벗어나고자 했지. 비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굴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다른 일족들처럼 살기는 싫었거든. 아, 하지만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소. 내가 바란 건 나 한 사람의 보신과 출세였으니까."
대꾸는 없었다. 그러나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숨통을 조여온 기세가 누그러졌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하게 반응이 있었다. 그에 힘을 얻은 아라누만 멘티케가 보다 적극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 일족, 그러니까 선대를 포함한 일족들이 한심한 몰락귀족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건 그들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소. 귀족이면 뭐하나? 이미 몰락해버렸는데. 힘없는 이름은 의미가 없고, 의미가 없는 것은 그냥 없는 것과 다르지 않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귀족이 아니라고 늘 되뇌었소. 그리고 귀족은 하지 않을 일들을 서슴없이 해댔지. 필요하다면 평민에게 굽실거리기도 했소. 오직 출세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매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지."
매 순간 전장의 한복판을 질주하듯 정신없고, 치열했던 과거다. 그때의 그는 투사였다. 누군가는 귀족의 망신이라고, 속없는 자라고, 아첨꾼이라고 비웃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자에게 옆이나 뒤에서 지껄여대는 말은 스쳐 지나가는 헛소리일 뿐이었기에..
"나는 항상 내가 선 곳에서 최선을 다했소. 말했듯, 필사적이었거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어느덧, 푸짐한 몸매의 총독을 바라보는 군터의 눈길은 처음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살라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