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화
헤이딘 트라소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전령의 입을 빌린 군터 크렘보르의 답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인내심 강한 그가 끝내 혀를 차게 할 정도로,
'군터 크렘보르.'
한번은 궁금해서 직접 물은 적이 있다. 왜 그를 그렇게 총애하느냐고, 흔치 않은 무장인 것은 알겠으나, 그렇다고 그렇게 특별대우를 해줄 필요까지 있는 것 이냐고.
그러자 부친은 그자는 쓰임새가 있다고 하셨다. 그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에 헤이딘은 부친이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생각해 더 묻지 않았다. 그의 눈치는 인내심만큼이나 뛰어났다. 그는 부친의 심사를 거스르는 일은 아무리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오만한 자는 저하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거라고요."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외숙, 아사도라 컬몬은 애써 입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유쾌한 기분이라는 것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헤이딘은 외숙의 짓궂음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예.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조카를 골리는 것은 그쯤 하시지요."
"허흠. 그러지요."
종종 지금처럼 짓궂고, 때로는 음흉하기도 하지만 외숙은 헤이딘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일은, 제 의욕이 과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욕심이 아니고요?"
"꼭 그렇게 조카의 자존심을 꺾어 놓으셔야겠습니까?"
"이게 다 저하를 위해서입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 저 말.
이번에 한 실수도 어쩌면 저 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삶이, 운명이 타인의 뜻대로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라고? 나를 위한다는 것이 뭔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저들이 알까?
물론 헤이딘은 순진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친우, 연인, 설령 혈육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외가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헤이딘은 그 기대를 배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 역시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자신의 뜻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전부터 그랬지만, 근래에 특히 더 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문제아니까요."
문제아? 헤이딘은 내심 조소했다. 외숙은 애써 별거 아니라는 듯 낮춰 말하지만, 헤이딘은 군터 크렘보르가 오만한 귀족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골칫거리인지 잘 알았다. 이제는 그저 그의 이름이 한 번씩 튀어나올 때마다 조정의 귀족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인상을 찌푸리거나 혀를 찬다.
'흥미로운 자란 말이지.'
호감은 없다. 이유야 어쨌든, 이번에 자신의 체면을 구겼으니 유감이 있으면 있지 호감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가 고루한 조정에 이따금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존재로 인해 몇몇 엉덩이 무거운 이들이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이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쓰임새라는 것이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부친의 뜻은 짐작하고 있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 많은데 얼마 되지도 않는 것을 두고 으르렁대는 한 심한 작자들을 보며 얼마나 한숨을 내쉬셨겠는가. 부친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은 다르다. 아니, 시야라고 해야 하리라. 눈앞에 놓인 것에만 급급한 자들과,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이의 생각이 어찌 같겠는가. 이 한심한 작자들에는 안타깝게도 외가 식구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눈여겨보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겠는가.'
헤이딘은 오직 자신만이 부친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자신은 단순한 황손이 아니다. 자콥 트라소프와 그가 일군 왕국의 후계자인 것이다.
"이 소식이 퍼지면 시끌시끌해질 겁니다."
조용히 이루어진 일이지만, 헤이딘은 이 비밀 아닌 비밀이 지켜지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외숙도, 외가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많은 이들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까."
"하하.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후계자인 황손과 크렘보르의 사이가 벌어지면 흡족해할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깎인 자신의 체면을 두고 대놓고 웃지 않으리라는 것이 헤이딘의 생각이었다. 멕시스를 필두로 한 반대쪽 역시 조심스러울 테고, 그러니 아무 문제 없다. 이번 일은 황손의 치기 어린 돌발행동으로 기억될 테고, 그마저도 금방 잊히리라.
***
한편, 군터는 황손의 내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꾸준히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잘 준비된 군대인 만큼 행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간혹 주 관리들이 대군을 보고 지레 겁먹어 까칠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군터가 나서서 직접 그들과 대면하면 그런 문제도 순조롭게 풀리곤 했다.
"하나같이 대가 약한 자들뿐이군요. 윗대가리가 그 모양이라 그런 건지."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총독은 얼굴을 비출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 그럴 배짱이나 있겠나. 재주라고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밖에 없는 돼지 같은 놈 아닌가. 그런 놈이 장군과 대면한다고? 장군께서 눈길 한 번 주면 오줌이나 지리지 않겠나."
아드리안의 말이 과격하긴 했으나 시어문드도, 살라스도,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오젠의 총독 아라누만 멘티케가 중앙 조정의 개라는 것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관리로서의 포부도, 배짱도 없는 탐욕스러운 돼지. 그것이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그렇지! 장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도를 경유해서 가는 건 어떻습니까? 주제도 모르는 놈의 기도 눌러줄 겸 말입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아드리안의 제안에 살라스가 동의를 표했다. 유치하기는 하지만, 대개 유치한 것이 효과적이다.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 보여주려면 직접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제일인 것처럼.
게다가 과한 것도 아니다. 일정이 하루 이틀 정도 늦어질 테지만, 어쨌거나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 명분도 확실하지 않은가.
"괜찮군요. 어쨌거나 주도라면 보급도 더 쉬울 테고 말이지요."
"내 말이 그거야. 장군. 이래저래 좋지 않습니까?"
군터도 아드리안의 제안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존심 싸움을 하자는 것도, 기분이나 내자는 것도 아니었다. 솔롬에 남은 보리스를 위해서였다.
자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판니른에게 있어 오젠은 말하자면 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롬 역시 판나른에 속해 있으니 예외는 아니다. 보리스에게도 부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오젠 총독이라는 놈을 한번 눌러주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허튼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게 말이다.
"좋다. 그리 하지."
군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
"…뭐라고?"
"군터 크렘보르가 이끄는 군대가……."
"내 귀는 멀쩡하다! 한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게지! 내가 물은 건, 놈이 왜 이곳으로 오고 있냐는 거다!"
오젠 총독 아라누만 멘티케가 버럭 소리치자 아래로 처진 그의 볼살이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의 노성을 맞은 관리는 황급히 고개 숙였다.
"보, 보급을 하기 위해서라고……."
"보급?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군터 크렘보르의 군대가 오젠에 발을 딛기 전부터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오젠에 들어선 후부터는 그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의 땅에서 활보하고 있는 거대한 무력이 신경 쓰이지 않을 통치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아라누만 멘티케는 그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척을 지기도 했고, 그 일을 통해 군터 크렘보르가 얼마나 말도 안 될 정도로 막무가내인 자인지 확실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젠을 통해 서부 전선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 아라누만 멘티케는 악몽까지 꾸었다. 군터 크렘보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의 땅에서 패악질을 부리는 내용이었는데, 악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내 심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예 없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있지도 않은 도적을 소탕하기 위해 징발을 하거나, 엄한 곳을 쓸어버리거나, 온갖 이상한 명분을 들어가며…….
"각하?"
상념에 잠겨 있던 아라누만 멘티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음. 무슨 말을 했지?"
"어찌해야 할지……."
푸짐하게 살이 오른 얼굴에 핏대가 섰다.
"어찌하긴 뭘 어찌해! 어쨌거나 명분을 들이미는 놈들을 상대로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 요구하는 대로 보급품을 마련해줘! 단, 군대는 도시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응할까요?"
"무슨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응하지 않으면? 응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네놈들의 일이지 않으냐!"
황자의 명을 받고 전선으로 향하는 군대다. 보급이 필요하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달라면 줄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군대가 도시로 들어오는 것은 어찌어찌 핑계를 대서 막는다고 쳐도, 지휘관급들이 들어오는 것은 막을 명분이 없다. 길어야 하루겠지만, 그것마저도 끔찍하다.
'설마 다짜고짜 덤벼들지는 않겠지만.'
정말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럴 리는 없을 터.
게다가 방위군단장이라고는 해도 이쪽은 총독이다.
서로 맡은 일이 다르기는 하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쪽이 위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아라누만 멘티케는 스멀스멀 치미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각하! 판니른의 군대가 한나절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현재 시피즈를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크흠!"
옥죄어오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아라누만 멘티케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저 멀리 보이는 무수한 깃발과 검은 점들을 본 순간 헛것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