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화
"떠났다고 합니다."
줄카는 아라얀의 보고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래.]
조악한 망루 위에 선 그의 눈은 지하 미궁을 가득 채운 어둠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어둠 너머에 깔린 신비의 장막은 그런 그의 눈마저 가렸다. 아무리 집중해도 소용없었다.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작해야 흔적 정도가 아닌가. 남겨진 것 따위에 시야가 막히기는 처음이었다.
[고대인이라.]
딱히 지적 호기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으나, 흥미롭기는 했다. 이런 유적을 남겼을 정도면 분명 강대한 문명을 일군 자들이었을 터. 그렇지만, 그런 이들마저도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별의 재앙.
고대인의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정확하게 해석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표현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용 자체가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뭘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예?"
머릿속에 머물러야 할 생각이 간혹 지금처럼 밖으로 흐른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곤혹스러움, 멋쩍음 같은 감정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녀석은 삶을 감옥이라고 했지.]
아라얀은 이제 더 묻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의 주군은 이미 자신만의 상념, 혹은 기억 속에 빠져 있었다. 녀석이 누구인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쿠엘단 전하겠지.'
아라얀은 몇 번 안 되지만 쿠엘단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신비롭고, 그만큼 불길한 존재. 아라얀이 보고 느낀 쿠엘단은 그랬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항상 이질적인 괴리감을 느꼈다. 솔직히, 그가 죽었다는 것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전하는 죽은 게 아니라고 하셨지만.'
육신을 버렸다느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으나 아라얀은 말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여러 가지 신비를 알고, 그 자신이 신비의 일종이었으나 그런 쪽으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충성할 주군의 존재와 맞서 싸울 적의 존재, 단 두 가지뿐이었으므로,
[독한 놈 같으니.]
즐거움, 그리고 약간의 쓸쓸함.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감정. 그러나 그 변화는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 잔잔하게 이는 물결처럼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몸이 굳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상념이 깨졌다. 아라얀은 어느새 망루를 내려가고 있는 줄카의 뒤를 따랐다.
"자콥 트라소프는 이번 기회에 모두 끝낼 생각인 듯 합니다."
[꽤 길었으니까. 다 무너진 집을 갖기는 싫은가 보지.]
"다 무너진 집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글쎄. 어딘가 취향이 독특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오랜 세월 줄카를 섬긴 아라얀이었으나, 정말 간혹 난감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다. 보통 사람이 목을 통해 낸 말이라면 우스갯소리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줄카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어딘가에는 무너진 집을 선호하는 특이 취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때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 힌다.
"점괘 때문입니까?"
줄카는 북쪽 땅으로 오기 전, 그가 개인적으로 아는 점쟁이(그의 표현에 의하면)를 만나 점괘를 받았다.
아라얀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줄카가 이 캄캄한 미궁에서 시간을 보낸 것과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넓고, 기이한 신비는 셀 수 없이 많다. 거의 모든 인간을 내려다보는 초월자조차도 얕볼 수 없게 하는 인간은 분명 존재한다. 줄카가 만났던 눈먼 점쟁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세상을 보는 눈이 먼 대신, 그 이면을 볼 수 있게 된 신비로운 자. 그는 줄카에게 말했었다. 그가 기다리는 운명은 북쪽 땅에서 이어질 것이라고.
물론 그렇다고 점쟁이의 한 마디만을 믿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단서도 없었고, 쿠엘단의 흔적을 훑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지금이겠지.]
"그자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전하께서 그렇게 눈여겨보실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군터 크렘보르는 초월자다. 신비의 맥이 끊기다시피 한 이 땅에서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존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면, 아라얀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초월자, 초인. 분명 드물고, 드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라얀은 이제껏 적지 않은 초월자들을 봐왔다. 확실히 지금 시대에 그런 존재는 전설로 칭해질 만큼 희귀해졌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금 시대의 이야기일 뿐. 전쟁이 계속되던 이전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자의 어디가 그렇게 특별합니까?"
[맥이 끊긴 시대에 뜬금없이 튀어나왔으니 특별하고, 이 땅에 있으니 특별하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첫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둘째는 무슨 뜻인가. 아라 얀은 몇 개 안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며 다시 물었다.
[놈이 어디서 맥을 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놈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해. 너도 느꼈을 것이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는 아라얀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 지난 시대, 초월자들이 심심찮게 부딪치던 사투의 현장에 그 역시 있었다.
수호자. 땅의 신. 부르는 명칭은 제각각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는 그들이 하나같이 초월적인,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라는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초월적인 존재들이 땅에 묶여있다는 것.
아라얀은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이들이 내놓은 결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놈은 자유롭다. 특별하지. 온전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비틀림이 시작된다면, 거기에 놈이 큰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해. 그러니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황도에 있을 키리스트를 떠올렸는지, 줄카의 입매가 비틀렸다.
***
"크렘보르 장군!"
하잘에서 출발한 군대는 순조롭게 판니른의 경계를 넘어 오젠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의 깃발을 든 전령이 군터의 막사를 찾아왔다. 깍득하게 군례를 취한 전령은 봉인된 서신을 전했다.
"……."
군터는 전령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봉인을 뜯고 서신을 펼쳤다.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온 것이었다. 정확히는 현재 조정을 이끌고 있는 황손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테리브란에 들르기를 바란다.
이런저런 잡스러운 이야기들을 다 빼고, 결론은 그것이었다. 군터는 문득, 한두 번인가 스치듯 얼굴을 본것이 전부인 황손이 자신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저의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런 의문도 잠시뿐.
"따르지 않겠다 전해라."
"예?"
"귀는 멀쩡한 것 같은데. 못 들은 건가?"
"아, 아니…그것이 아니오라."
전령은 서신, 아니 명령서의 내용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명령서가 조정에서, 황손에게서 내려온 것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자를 대리하는 황손의 명령을 대놓고 따르지 못하겠다 거절하는 군터를 보며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야 어떻든, 군터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물러가라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명령서는 옆의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은 후였다.
"예, 옛!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전령은 부디 높으신 분들의 다툼에 자신이 휘말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장군. 무슨 일입니까?"
입을 닫고 있던 살라스가 물었다. 그러자 군터는 슬찍 명령서에 눈길을 주었다.
"직접 봐라."
"음."
살라스가 명령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글쎄. 별로 알고 싶지 않군."
명령서가 살라스에게서 시어문드에게로, 또 잠시 후 시어문드에게서 아드리안에게로 넘어갔다. 아드리 안의 표정 변화가 가장 컸으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시어문드가 입을 열었다.
"황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얼굴은 알고 있지."
"황손이 조정을 이끈다지만, 실상은 제레이스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황손을 부추겼을 수도 있습니다."
군터는 듣기만 했다. 살라스도 마찬가지. 아드리안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추겨? 무엇을? 왜?"
"그들이 보기에, 장군은 지방 세력의 거두지. 실제로도 그렇고, 그들은 장군과 같은 이들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은 각주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주무르기를 원하지. 오젠처럼 말이야. 그러니 장군이 얼마나 거슬리겠는가. 하지만 장군은 황자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어. 지금까지는 그랬지."
"지금까지는 그랬다? 앞으로는 아니라는 소리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별일이 없는 한 황손은 황자의 뒤를 잇게 될 거야. 미리 손을 써두려 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고작해야 잠깐 들렀다 가라는 것뿐이다. 가벼운 명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바깥에서 어떻게 보이느냐다.
전장으로 향하던 군대가 명령서 한 장에 방향을 튼다? 테리브란 조정과 황손의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과한 해석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적지 않을 터.
"나름대로 명분도 있지 않은가. 황손이 직접 먼 길을 떠나는 군졸들을 위무하고, 보급품을 하사한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
"하지만 이쪽은 황자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중 아닌가."
"그래. 그러니 무시해도 문제는 없지. 다만 황손이 불쾌해할지도 몰라. 아니, 불쾌해하겠지. 그렇게 되게 만들 테니까."
"쯧! 전쟁 중에도 그놈의 정치질을 멈추지를 않는구만."
"본래 그런 자들이 아닌가. 어쩌면 그런 것이 귀족의 본성일지도 모르지."
그때까지 잠자코 듣기만 하던 군터가 명령서를 집어 모닥불에 던졌다. 자그마한 불길은 얇은 종이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보잘것없는 놈들이 뭘 꾸미던 관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