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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60화 (860/1,064)

860화

어째서 이렇게 막무가내일 수 있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힘이 있으니까. 그리고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얼핏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힘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지만,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전공을 쌓아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지.'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귀족이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이가 공을 세워 한 번에 출세하는 것은 거의 모든 이들이 꿈꾸는 일이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꿈에서밖에 그려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제국에서 그런 식으로 귀족이 된 이는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귀족이 된 이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군터 크렘보르는, 그런 매우 드문 이들 가운데서도 거의 없다시피 한 경우였다. 기존의 권력에 순종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자신의 능력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이 자기 재주에 자부심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깨닫기 마련이다. 그들이자부하는 능력이라는 것도 결국 세월이 쌓아 올린 진짜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군터 크렘보르는 그런 당연한, 일종의 법칙이라고 해도 무방한 일을 무시했다. 황자의 총애를 받아서? 그것도 분명 이유 중 하나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가 거느린 강력한 군대. 그리고 절대 남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니 쉽사리 약점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지.'

몰던만 해도 일전에 해들리르의 문제를 처리하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총독이 된, 당시에는 총독 대리였던 운바소르 아실과 크렘보르를 끌어들여 공범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그 일이 공론화되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을 쪽은 아무래도 몰던일 수밖에 없다.

'그래.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남에게 바라는 게 있는 이는 아쉬운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쉬운 게 없다면? 타협도, 거래도 할 필요 없으니 남에게 흠 잡힐 일을 반절은 차단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은…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예? 그러면 가주께는 어찌 보고하시려고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가에서도 지금쯤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을 터."

최대한 내주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최선은 최선일 뿐.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에 대비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었다. 진짜 최악은, 군터 크렘보르가 황자의 꼭두각시로서 몰던을 비롯한 판니른의 귀족들을 끝까지 쥐어짜려 들 경우였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걱정한다. 일신의 능력 만으로 올라온 자의 한계겠지.'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본인이 해결할 자신이 있지만, 반대로 본인이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믿을 만한 자가 없다는 것이다. 빠르게 일어난 세력이 가지기 쉬운 문제 중 하나다.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인물이라고 하던데, 아비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군.'

비오르 몰던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흥미로워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군터 크렘보르 본인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는 황자는 물론이고 테리브란의 조정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듯했다. 가장 우려했던 쪽과는 멀어진 셈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군터 크렘보르는 여전히, 그 자체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요소기 때문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심정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나, 미리 의견을 조율할 수도 있었잖은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통보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다. 이런 방식은 괜한 긴장감을 조성할뿐더러, 심하면 적대감까지 심어줄 수 있다. 실제로도 이번 일로 몰던 가 내에 크렘보르 가문에 의심과 적대심을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불안요소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행동방식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렇다. 지극히 귀족적인 관점에서 보았기에 종잡을 수 없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조금만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보면 군터 크렘보르가 보인 행동과 사고방식은 굉장히 단순하다. 신경 쓰이거나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을 배척하고,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 이번 일도 사실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믿을 수 있는 협력관계가 된다면, 지금처럼 불안해할 필요가 없을 터인데.'

지금 가문의 여론은 크렘보르를 견제하자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비오르 몰던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조건만 맞춰진다면 크렘보르와 든든한 동맹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그러니까, 서로 가 진정으로 신뢰를 쌓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게 어려워서 문제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지만, 특히 힘 있는 가문들 사이에서 신뢰라는 것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것이고.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직이 혀를 찬 비오르 몰던이 깃펜을 들었다. 그는 텅 빈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주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

몰던 가문은 그들이 말한 것을 지켰다. 마차 행렬이 도착하는 것을 지켜보던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 명문가의 저력인가."

"없는 시간 동안 짜낸 것은 아닐 겁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겠지요."

시어문드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살라 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장군의 요구는 확실히 조금 과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명분이 확실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지. 그런데…그건 그렇고, 유치한 소문이 돌고 있다던데 자네도 알고 있나?"

"예. 뭐…… 이번 일로 장군께서 많은 이들의 미움을 샀잖습니까. 어떻게든 심술을 부리려는 자들의 농간이겠지요."

군터와 비오르 몰던의 회담이 있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건만, 벌써부터 몰던이 크렘보르에 굴복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사실이나, 그 소문에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몰던도 어리석지 않으니, 그들을 격동시키려는 누군가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 겁니다."

"그래. 알겠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머리와 가슴은 따로 노는 일이 많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버리면 그들도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그건…그렇지요."

"내가 신경 쓰는 건 그 부분일세."

"걱정한다고는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 말에 살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오히려 시어 문드에게 되물었다.

"걱정? 왜 걱정을 해야 하지?"

"그야……."

"판니른의 최고 명문가라고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일개 귀족 가문일 뿐이지 않나. 거기다, 악의적인 소문이지만 아주 틀린 것도 아니고, 그들은 장군에게 굴복했네. 명분이 어쩌고 하지만, 결국 체면 차리기일 뿐이지."

"흐음."

시어문드는 살라스가 조금 과격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이어서 그런가, 살라스에게서는 전장의 한복판에서나 풍길 법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걱정이라면…그래. 보리스 공자는 조금 걱정할 수도 있겠군."

살라스는 문득 솔롬에 있을 보리스를 떠올렸다. 며칠 뒤면 이곳의 상황을 보고받을 테지.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떠나는 자에게는 떠나는 자의 일이, 남는 자에게는 남는 자의 일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니겠는가. 보리스는 후계자로서 인정받고 싶다면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그걸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언젠가부터 눈에 차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보리스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온 살라스로서는 자꾸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보리스가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특히 요즘 들어 더욱.

'됐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보리스의 문제는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후우."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은 금세 평온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이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살라스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익숙해졌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일까?

"많기도 하군."

꽤 지켜보았는데, 아직도 마차의 행렬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수레 곁에서 몰던의 문장기를 든 병사들이 계속해서 하잘로 들어섰다.

***

"출발한다."

"예."

살라스가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장교들이 목에 걸고 있던 뿔 나팔을 동시에 입으로 가져갔다.

뿌-우우우!

긴 울림이 도시 전체를 흔들었다.

사실 이렇게 요란하게 출발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시어문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크렘보르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제안했다. 이미 하잘에 크렘보르와 관련한 이런저런 소문이 도는 와중이었다. 연기만 피어오르는 소문에 아예 불을 지피는 꼴이었지만, 어차피 소문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이렇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군터는 시어문드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와아아!

그의 예상대로, 병사들은 시민들의 환호를 들으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저 환호하는 시민들이 총독의 돈을 먹었는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시민들의 환호와 떨어지는 꽃가루에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깨를 펴라! 너희는 제국의 역사에 한 줄을 더하러 떠나는 것이다!"

장교들은 그렇게 한껏 고무된 병사들에게 충실히 바람을 불어넣었다.

"……."

가장 먼저 성문을 나선 군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 맑지도 흐리지도 않게 적당히 구름이 깔린 것이, 전장으로 떠나는 이에게 딱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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