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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9화 (859/1,064)

859화

열심히 주연을 준비했을 운바소르 아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괜한 수고였다. 군터는 연회장에 잠깐 얼굴만 비췄다. 나름대로는 총독의 체면을 위해 배려해준 것이었는데, 운바소르 아실 쪽에서는 그런 배려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습니까."

운바소르 아실은 불만을 넘어 노기까지 감도는 목소리에 조용히 쓴웃음만 지었다. 내색은 안 했으나 그의 마음 역시 지금 열을 내는 수하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총독이든 뭐든, 개의치 않는다는 건가.'

물론 그도 자신이 온전한 총독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의 지위, 권력은 모두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운바소르 아실은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이들이 자신을 가리켜 꼭두각시 총독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들의 조롱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만약 로드니 캄브라이가 명령을 내린다면 자신은 그대로 따라야 하는 처지니까.

"너무 성내지들 말게."

"하오나 각하."

총독의 자리에 오른 이후, 각하라는 호칭은 늘 듣기 좋았다. 그저 호칭일 뿐이지만, 그렇게 불릴 때마다 꿀이 혀에 닿는 것처럼 달콤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리도 달콤하게 들리던 호칭이 오늘만큼은 그저 공허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군터 크렘보르는 로드니 캄브라이가 총독일 당시에도 전혀 굽힘이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굽히기는커녕, 오히려 약간 깔보는 기색마저 있었던 것 같다. 그 로드니 캄브라이를 상대로 말이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만함으로 가득 찬 사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 오만함을 상대하는 로드니 캄브라이가 불쾌해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의 오만함을 수긍하는 듯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필요는 있겠지만, 테리브란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들의 관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로드니 캄브라이는 진정으로 군터 크렘보르를 동등한 협력자로 여기는 듯했다.

'대단하기는 하지.'

범상치 않은 자인 것은 안다. 그와 마주하기만 해도,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 위압감에 절로 고개를 떨구고 싶어진다. 그런 기세를 풍기는 자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군인으로서, 그리고 무인으로서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혀왔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지독한 피 냄새가 아니라, 그 피로 쌓아 올린 업적이다. 반군의 하급장교에서 제국의 귀족이 되기까지. 한편의 영웅담 같지 않은가.

"참게. 세찬 바람 앞에서는 구부릴 줄도 알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그저 부러질 뿐이야."

그리고 만약 그런 영웅담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서 자신은 아마도 비중 없는 단역 정도로 등장하지 않을까? 아무리 나 역시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외친들, 더 큰 이야기 속에서는 그저 흘러가듯 존재하는 자그마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불쾌하고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사실이니까. 인정하지 않고 반발해봐야 손해 보는 건 결국 자신이다. 그 이치를 조금이나마 일찍 깨달았기에 이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몰던에서는 다른 소식 없었나?"

"예. 아직은……."

"빨리 왔으면 좋겠군.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것은 그들인데, 나만 중간에 끼어서 난처하게 됐구만."

본래 비오르 몰던이 하잘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었는데, 한 달 전쯤에 갑작스레 몰던 가주의 부름을 받고 본가로 돌아갔다. 물론 대리인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크렘보르 가주와는 급이 맞지 않는다. 대리인의 대리인 격이 아닌가. 몰던 가주가 오거나, 비오르 몰던이 돌아와야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과한 요구이기는 했습니다만, 몰던이 못 맞춰 줄 조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 말하지 않았나. 그들의 자존심 싸움이라고."

군터 크렘보르는 주 정부와 일부 귀족들에게 병력과 전쟁물자를 요구했다. 특히 힘 있는 가문들에게는 그 요구 수준이 상당했는데, 몰던 가문쯤 되면 그들의 입장에서도 부담을 느낄 정도로 상당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명분은 확실했다. 황자가 직접 내린 명령이고, 군터 크렘보르는 그 명령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요구사항이 과하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직접 무거운 몸들을 이끌고 참전할 것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라도 성의를 보이는 게 마땅하다. 귀족들 대다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담을 몇몇 귀족 가문들은 그렇지 않았다.

몰던 가문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들은 황자의 총신으로 알려진 군터 크렘보르가 판니른의 귀족들에게 전쟁을 빌미로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불만이 있다면 서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지, 왜 나를 걸고넘어지는지……."

피곤하지만 사실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중재자로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신을 총독으로서 신뢰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이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든, 총독이라는 지위에 대한 믿음이든 간에 말이다.

기회라면 기회일 수도 있다.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권세를 가진 대귀족들 간에 삐걱거리는 일이 발생하면 여러모로 분위기가 불안해지기 마련. 그런 상황을 잘 중재해서 해결한다면 그만큼 자신의 이름값이 뛸터.

"몰던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저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일 없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명령을 내리니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듯 반응하지만, 사실 저들도 크렘보르와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솔롬의 장졸들은 오랫동안 군터 크렘보르를 따라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숱한 전투를 겪어서 그런지 그 성미가 불같기로 유명했다. 얼마 전의 사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롬바드라고 했던가? 일개 평민 장교가 귀족을 들이받은 사건 말이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는데, 더 황당한 건 군터 크렘보르가 그 평민 장교를 싸고돌며 그를 비난하는 귀족들과 정면에서 맞부딪쳤다는 것이다.

귀족으로 태어난 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하여간, 어마어마한 전례가 바로 얼마 전에 있었으니 이제는 누구라도 저 종잡을 수 없는 자와 얽히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겉으로 얼마나 강하게 외쳐대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

"몰던에서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운바소르 아실이 얘기했던 대로, 그가 하잘에 당도하고 하루가 지나지 않아 몰던에서도 사람이 왔다.

"비오르 몰던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을까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그 짐작이 막상 현실로 이루어지자, 군터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살라스에게 보고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총독관저로 가 운바소르 아실과 비오르 몰던을 대면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오르 몰던의 제법 공손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은 군터는 인사에는 답도 하지 않은 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몰던 가주는 어지간히도 바쁜 모양이군."

두서없는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운바소르 아실은 억지로 미소짓다가 표정이 굳었고, 비오르 몰던은 그로서는 드물게 표정을 드러냈다.

"송구합니다. 가주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촉박한 일정을 감당하지 못하실 것 같아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비오르 몰던은 군터의 '협조 통보'에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었음을 은근히 꼬집었다. 그러나 군터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제 할 말만 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된 거요?"

"아직입니다."

"지금은 전시요. 이렇게 앉아서 떠들고 있는 순간에도 전선에서는 장졸들이 피를 흘리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물리적으로 힘든 것은 힘든 것이지요."

의자에 등을 묻고 있던 군터가 허리를 세웠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위압감이 더욱 덩치를 키웠다. 비오르 몰던과 운바소르 아실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아무리 정계에서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본질은 귀족이었다. 제 손으로 사람의 목을 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그런 이들이 직접 목을 벤 시체로 동산 하나 정도는 너끈히 만들고도 남는 군터의 기세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운바소르 아실은 입도 떼지 못했고, 그나마 비오르 몰던이 애써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 가문은 그간 전하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전후 황폐해진 판니른을 복구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후에도 사병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전쟁물자도 지원했지요. 이번처럼 말입니다."

"과거에 공을 세웠으니 이번에는 봐달라는 말이오?"

"장군.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희 가문은 전하와 테리브란을 위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장군께서는 저희를 압박하고 계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이제 군터의 말에는 형식적인 존중마저도 사라졌다.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투였지만, 비오르 몰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대하는 말이 편하게 느껴졌다. 그게 조금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장군께서 전하의 총신일지언정, 충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추측이군."

"확신입니다."

"……."

"흠을 잡자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나름대로 자신의 이름에 대해 자부심이 있는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 전하에게 충성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런데…어찌 그런 장군께서 갑작스레 전하의 충신이라도 된 양 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동지라고 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협력자라고는 할 수 있는 저희를 이렇게 압박하시면서 말입니다."

군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목소리 대신 적막을 지웠다.

"솔직해서 좋군."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압니다."

"제대로 보았소.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니, 그동안 그대들이 허튼짓을 벌이지 못하게 하려는 거요."

"…저희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요. 이쪽은 내가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게 되었지. 판니른을 대표하여 나서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터인데, 그렇다면 공평해야 하지 않겠소?"

비오르 몰던이 작게 입만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무슨 말을 하든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소.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사흘을 더 주지. 그 안에 성의를 보이길 바라오. 그대의 말처럼 우리가 협력자라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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