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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8화 (858/1,064)

858화

본래 그라모트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본래 그런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보리스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 그리고 잘난 듯 조언하는 것. 모두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보리스에게 한소리 한 것은 그에 대한 정 때문이었다. 충성심과는 별개로,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한 그 정 때문에 보리스는 그의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아가씨에 대해서 과하게 신경 쓰고 계십니다."

"……."

보리스는 불쾌한 기색이었다. 대번에 화를 내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것은 상대가 그라모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라모트는 평소 말이 많지 않기에 가끔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변하셨습니다."

"변해야 하니까."

"꼭 이런 식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라모트는 보리스가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변하려고 하는지는 알았다.

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뭘 아느냐."

"몰던 가주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티브리악의 공자처럼 되고 싶으십니까?"

보리스는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헤어진 후로도 종종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교분을 나눠서 나쁠 것 없는 사이면서 서로에게 인간적인 끌림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해관계가 일치한 데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둘은 흠 잡힐 일 없는 선에서 속내를 털어놓으며 친분을 다졌다.

그러던 중. 바로 얼마 전,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길었던 전장 생활을 청산하고 바크렌으로 돌아갔다. 부친인 티브리악 가주가 앓아누우면서 후계자인 그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된 탓이다.

한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불안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직접 군을 이끌고 전공을 세우면서 그의 명성은 테리브란 조정에까지 퍼질 정도가 되었다. 스스로 자격을 증명한 그인 만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가 부친의 뒤를 이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헛걸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티브리악 가주가 바크렌으로 간 이후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근래 들어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배다른 형제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큰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한 세대가 지고 다음 세대가 떠오른다. 자연스러운 변화의 흐름이다.

비단 프란시스 티브리악만이 아니다. 비슷한 나이대의 후계자들이 하나둘씩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후계자라는 어정쩡한 호칭을 떼고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면서.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다른 이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았지만, 그늘이 크면 벗어나기 위해서 더 많이 걸어 나가야 하는 법. 꽤나 걸었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머리 위에 드리운 그늘의 무게에, 보리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힘겨움을 느꼈다.

"공자님은 지금까지 충분히, 아니 누구보다 잘해오셨습니다. 굳이 남들처럼 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알겠다. 알겠으니 그쯤 해라."

그라모트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보리스의 가라앉은 눈빛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보리스는 충분히 인내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피웠다가는 설득은커녕 역효과만 날 것이 분명했다.

"고집이 세지셨지. 그렇지 않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로우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평소와 달리 마차 대신 직접 말을 타고 가겠다 하더니, 이럴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눈치 없이 굴었다고 조롱이라도 하려느냐."

"형님이 눈치 없이 군 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그걸 조롱해서 뭐하겠소."

그라모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고집이 세지셨지. 거기에는 너도 단단히 한몫했고."

"부인하지는 않겠소. 그런데, 그래서 나를 탓하시려고?"

"심정적으로는…그래. 그러고 싶구나."

그라모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으나 로우렌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실실 웃었다. 동생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그라모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뭐가 그리 우스우냐."

"형님의 순진함이 우습소."

"뭐라고?"

"언제까지 공자가 어릴 적 보리스 공자님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신 거요?"

"너무 나갔다."

"아니. 딱 적당하게 나간 것 같은데. 형님. 이제 크렘보르는 한 주에서 손꼽히는 가문이오. 공자는 그런 가문의 독자이자 후계자고, 말과 행동에 무게가 깃들 수밖에 없고, 사고방식도 권세가의 후계자답게 바뀔수밖에 없는 거요."

"안다. 하지만 그 변화에 꼭 긍정적인 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

"형님의 관점에서는 그렇겠지."

"가족에게 가혹해질 만큼 권력에 취하는 것이 관점을 따질 문제더냐?"

"물론이지. 왜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그라모트가 혀를 차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로우렌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몰던 가문의 비극은 극단적인 경우요. 하지만 그런 인간 도살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정계에서 떵떵거리고 있잖소. 그 정도의 잔혹함마저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왜겠소?"

"……."

그라모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의 얼굴에 진 그늘을 본 로우렌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공자를 형님의 입맛대로 이끌려고 하지 마시오. 그래서는 공자에게 득 될 것이 없으니."

"그 말은 네게도 해당되는 것 아니더냐?"

"물론이지. 나도 예전 공자가 좋소. 가끔은 과격하지만 순진하고, 사람을 쉽게 믿고 아낄 줄 알던. 하지만 그런 말랑말랑한 태도가 통할 정도로 만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지. 사실은 형님도 알고 있잖소?"

"하아."

"물론 몰던 가주 같은 작자는 나라도 껄끄럽소. 인간 같지도 않은 자니까. 하지만 가족을 아끼는 것? 물론 중요하지. 가주는 가족을 이끌고 지키는 존재니까."

이끌고 지킨다라.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 라모트는 로우렌의 말속에 숨은 의미심장함을 눈치챘다.

"방식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반발해서는 안 돼. 안에서 지켜지지 않는 권위가 밖에 서인들 통하겠소? 이건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나 역시 공자에게 충성하니까."

"선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오. 우리 모두 한 줄을 붙들고 가고 있는 거요. 앞에서 잘못 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걸음을 멈춰서는 안 돼. 그랬다가는 어디도 갈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라모트가 입김 서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전히 그늘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이제 처음과 같은 답답함은 엿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네 생각에는 공자님이 아가씨에게 끝내 손을 쓸 것 같으냐?"

로우렌은 순간 흐트러지려던 표정을 애써 관리했다. 끝내 손을 쓸 것 같냐고? 이미 손을 썼다. 물론 보리스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그럴 리가. 설령 공자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요."

"장군 때문에?"

"음. 곧 떠난다지만 남는 자들에게 언질 정도는 주었겠지. 공자도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을 테니, 당분간은 잠잠하지 않겠소?"

"그거 다행이군."

로우렌은 그보다 조금 앞서가고 있는 형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공자가 이미 손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의 형은 어찌 반응할까? 일단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낼것은 분명하다. 설마 공자의 앞에서 호통이라도 칠까?

그러면 공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로우렌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사실…이 모든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소."

그라모트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아가씨가 적당한 가문에 시집을 가는 거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라모트가 김 샌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만 간단하군. 장군께서 아가씨에게 혼사의 자유를 약속하셨다. 공자는 누구든, 아가씨에게 혼사를 강요할 수는 없어."

"꼭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아가씨가 혼사를 원하게끔 만들면 되니까."

"그게 가능하겠느냐?"

"모르지.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소? 이게 최선의 방도일 테니까."

"뭐, 그렇긴 하지."

로우렌의 말이 옳지만, 그라모트는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제껏 적지 않은 가문의 공자들이 만남을 청했으나 그 누구도 실비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예의상 한 번은 만났으나 그 첫 만남이 다음 만남까지 이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떠벌리기 좋아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실비아가 여인을 좋아한다는 망측한 소문마저 돌 정도였다.

***

실비아를 보고 난 후, 군터는 곧장 하잘로 향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살라스는 그가 하잘에 당도하기 이틀 전에 군대를 이끌고 도착해 있었다.

"장군."

살라스가 군례를 취했다. 완전무장한 그에게 군례를 받으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총독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회를 준비한 모양이더군요."

총독. 운바소르 아실은 체면을 위해 안에서 버티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군터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설령 그가 살라스와 함께 도시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병력은?"

"현재까지 집결한 병력은 대략 1만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사흘 안에 모두 당도할 것입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필요 없다."

"각지의 사령관들에게 그리 당부했으니, 알아서들 준비할 겁니다."

7황자는 주 경계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소집하기를 바랐지만, 군터는 쓸데없이 머릿수만 늘릴 생각이 없었다. 제대로 싸우지 못하하는 아군은 그 자체로 짐이다. 군량을 축내는 것은 물론이고, 전투가 벌어지면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아군의 사기만 깎아 먹는다. 그런 짐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장군의 기준을 넘을 수 있는 군대는 많지 않을 겁니다."

군터는 살라스의 엄살 아닌 엄살을 들으며 하잘의 성문을 넘었다. 총독이 미리 준비해둔 것이 분명한 환영 인파가 대로 양쪽에 쭉 늘어서 있었다. 군터는 그들의 환호를 무심하게 흘리며 총독 관저로 향했다.

"장군."

총독. 운바소르 아실은 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에 살이 좀 붙어 있었다. 분위기에서도 여유가 흘렀다. 군터는 그의 인사에 목례로 답하고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완전무장한 군터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운바소르 아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안으로 듭시다. 부족하나마 주연을 준비해뒀으니."

어떻게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였으나, 안타깝게도 군터는 그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부탁한 것은?"

"아아. 그쪽에서도 준비하겠다고 했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거로군."

"아무래도 기간이 촉박하다 보니……."

"시간에 쫓긴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지."

"무, 물론 그렇소. 몰던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니 장군이 출발하기 전까지는 준비가 끝나지 않겠소?"

군터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운바소르 아실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한숨을 내쉰 운바소르 아실이 재빨리 그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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