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군터는 할렌과 독대했다.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네가 실비아의 곁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
할렌은 입을 다물었다. 따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굳이 '끈'을 들추지 않아도 분위기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보리스 녀석에 대해서는 이제 거의 다 내려놓았다. 이제 실비아가, 녀석이 내게 남은 마지막 짐이다."
자신을 짐이라 표현하는 것을 알면 서운해할까. 하지만 이것이 그의 본심이다. 그에게 있어 자식들은 짐이다. 내려놓고 싶다고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내려놓기도 싫은 짐.
"예전이었다면 살라스를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째서."
"지금의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많은 것이 변했다. 죽음을 겪고, 새로운 몸을 얻기까지 했으니 실상 거의 모든 게 달라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이 변했다고 해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장군의 명이라면."
예전부터 늘, 그 어떤 이해가 되지 않고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명령이라도 할렌은 결국 군터의 뜻에 따라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군터가 실비아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았다. 그의 영혼은 군터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그 역시 군터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터가 말한 짐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군터에게는 당면한 전쟁보다도 자식들의 문제를 더 크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쉽기는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부탁하마."
군터가 할렌의 어깨를 한번 짚고 몸을 돌렸다. 할렌은 그런 군터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문득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차갑고 딱딱한 가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아니, 그런 감촉마저도 사실 직접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양손에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답답하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가면이 답답하게 느껴져 당장 벗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었다. 백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벤티노스의 근위병들이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도 눈들이 여럿 있었고,
'짐이라.'
곱씹어보니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할렌이 네 곁을 지킬 거다. 니클라스에게도 말을 해뒀고."
"곁을 지키는 건가요? 아니면 감시?"
군터의 눈길이 실비아에게 머물렀다. 실비아는 잠시 눈을 마주치는가 싶더니 곧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가 저를 견제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그래."
"아버지가 진작 중재해주셨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누구도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살 수는 없다. 언젠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오지."
실비아가 입술을 씹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철없는 아이의 억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데도 계속 억지를 부리는 것은, 어렸을 때 못 부린 투정이 쌓이고 쌓인 탓일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네요."
"모페이브에게도 언질은 해두었다. 녀석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을 거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보리스가 나를 대리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주 노릇만이다."
"그 말씀은, 가문의 일은 제가 하기 나름이라는 건가요?"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이 곧 알려질 테니 당분간은 보리스 녀석도 자중하겠지. 얼마간뿐이겠지만,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얻느냐는 전적으로 네게 달려있다."
길게 말을 하는 것도, 누군가를 이해시키는 것도 군터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은 서툴고, 내용도 두서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실비아는 그 조리 없는 말을 다 이해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실비아가 다시 입을 뗐다.
"저는 이런 게 다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음?"
"크렘보르도, 솔롬도, 모두 아버지가 이루신 것들이죠. 관리들도 모두 아버지에게 충성하고요. 아버지의 업적에 우리가 보탠 것은 하나도 없으니, 단지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얻어내려 든다면 반발하는 이들이 많겠죠."
"네 말대로 내가 이룬, 내 것이다. 내 것을 내 뜻대로 물려준다는데 군소리가 나올 이유가 없지."
"아뇨. 저들은 아버지를 믿고, 따르고, 의지해요. 크렘보르가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에게 충성하죠. 오라버니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무리를 하는 거고, 알고 계시잖아요?"
"……."
군터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실비아가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혹은 나이가 더 드셔서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시기 전까지는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그렇지 않았죠."
실비아의 생각에, 그건 전적으로 부친의 탓이었다.
권력자로서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니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생겨나고, 심지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오라비에게 들러붙어 바람까지 불어넣었으리라.
"나를 원망하느냐?"
"아뇨. 원망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하신 것뿐이니까요. 원망한다면 조금 더 일찍 깨닫지 못한 저 자신을 원망해야겠죠."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불쾌한 압박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너희는 같은 피를 잇고, 같은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지."
군터의 담담한 목소리가 실비아의 상념을 끊었다.
"벨리사가 떠났지. 이제 나도 떠나고 나면 세상에 남는 건 오직 너희 둘뿐이다. 그러니 나는…너희가 서로를 의지하며 잘 지낼 줄만 알았다."
그게 무슨 불길한 말이냐며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느릿하게 말을 잇는 부친의 모습이 전에 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그래. 내 잘못일 수도 있겠군."
"아버지."
"너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 나도 너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름대로 시도는 해봤지만 잘되지는 않더군."
실비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색했다. 이제껏 그녀는 부친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렸을 적에 투정은 몇 번 부려본 적이 있다. 하지만 늘어지는 목소리와 눈물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속에 있는 것을 풀어놓는, 이런 진솔한 대화는 나눈 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바람이었지. 말했듯 잘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해보려고 한다."
"그게 이건가요?"
"네가 가주 자리에 생각이 없다는 걸 안다."
당연한 말이다. 여인이 가주가 된다?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아예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닐 테지만, 가문의 남자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닌 이상 일어나기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다 떠나서, 실비아는 권력욕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원치 않게 억압받지 않는 것뿐이었다.
말하자면…그래. 자유.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전부였다.
"내가 준 기회가 부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충분해요."
그것은 확신이 아닌, 스스로 하는 다짐이었다.
***
"하!"
자리를 비운 부친이 동생을 만나러 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보리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공자님. 이건……."
"안다. 알아."
보리스의 언성이 높아졌다.
"녀석에게 힘을 실어주시려는 거겠지. 큰일을 앞에 두고도 남겨질 자식을 신경 써주는 아비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냐."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입을 다물고 윗사람의 눈치를 살필 것이다. 그러나 로우렌은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름다운 것은 모르겠고, 아무튼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뭐?"
"아가씨에게 힘을 실어주신다. 이건 바꿔 말하면 공자님의 힘을 빼놓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일종의 경고인 셈이지요."
경고, 경고라.
"……."
로우렌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보리스도 알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일까. 여전히 다른 감정보다는 노기가 강하게 일었다.
'왜지?'
보리스는 왜 자신이 화가 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단순히 부친이 자신이 아닌 동생의 편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정말이지 감쪽같이 속았군요. 역시 아직 솔롬에는 성주님의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모양입니다."
그래. 바로 저거다.
'비밀로 하실 것까지는 없었지 않습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섭섭함?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었다.
'제가 정말로 그 녀석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 살라스가 아닌 자신에게 빈 자리를 맡겼다면 그건 단순히 자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공자님.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합니다. 공자님은 아직도, 여전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나도 안다!"
기어이 고함을 지른 보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로우렌과 그라모트를 등지고 선 그가 순간 거칠어진 호흡을 가라앉혔다.
"공자님. 공자님답지 않습니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라모트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식혀주었다. 확실히 말수가 많지 않은 이들의 말에는 힘이 있는 것일까.
"장군께서 공자님이 모르도록 하셨다면,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나를 탓하는 거냐?"
"자식이 서로 다투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
탓하는 말이 맞았다. 그러고 보면 그라모트는 실비아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탐탁지 않은 기색을 보이곤 했다.
"너도 내가 녀석을 어디 쓸만한 가문에 팔아먹거나, 새장 속에 가둬두기라도 할 것 같더냐?"
"공자님의 본심은 그게 아니셨겠지만, 밖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런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로우렌이 그만하라는 듯 팔꿈치로 그라모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보리스가 몸을 돌려 그라모트와 눈을 마주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