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6화
"군터 크렘보르? 그가 직접 왔단 말이냐? 달랑 오백을 거느리고?"
"그, 그렇다고 합니다."
벤티노스의 왕은 신하의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아 눈만 끔뻑거렸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제국이 얼마나 거대한 나라인지 잘 알았다. 인접한 강대국인 만큼 그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은 탓이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국의 한 주라고 해도 이쪽의 어지간한 국가를 대여섯은 합쳐야 비슷한 덩치가 된다. 그런데 그런 곳의 최고 권력자가 달랑 병사 오백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온 것이다. 사전에 아무런 합의도 하지 않은 채로!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데다, 소수라고는 하지만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은 만큼 얼마든지 이쪽에서 문제 삼을 수 있다. 게다가 호위도 단출하기 그지없으니, 신변에 어떤 위협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막말로 이게 흉악한 도적놈들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정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전하. 어찌할까요?"
"청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귀한 손님은 손님이니 주인으로서 마땅히 맞이해야겠지."
궁 밖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상대의 신분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 역시 한 나라의 왕이었다. 현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는 왕이었다. 왕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대전의 문을 열고 나가지 않는 것은 그 자부심의 발로였다.
쿵!
문이 열리는 육중한 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늘 듣던 익숙한 소리였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한 사내가 들어왔다. 무장은 하지 않은 채였으나 갑옷은 입고 있었다.
처음 그를 보고 든 생각은 크다는 것이었다. 키나 덩치도 컸지만, 그보다는 문이 열리고 그가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휑한 대전이 가득 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존재감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존재감.
왕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하마터면 체면도 잊고 왕좌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마치 두려운 무언가가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을 때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이듯, 그렇게 반응할 뻔했다.
"…어서 오시오. 크렘보르 장군. 벤티노스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그리 길지도 않은 한 마디를 입 밖에 꺼내기 위해, 그는 상당한 용기를 발휘해야 했다. 하지만 애써 짜낸 그 용기마저도, 갑옷을 입은 사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불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고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 미안한 마음이오."
기본적인 통성명도 없었다. 그 담담한 말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런 무례한 말을 들으면서도 반감은 일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자가 있는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마치 사납고 거대한 맹수 한 마리와 맨몸으로 맞닥뜨린 것 같았다. 그때, 그는 주변에 자리한 호위병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흠칫 놀라 빠르게 눈을 좌우로 돌리니, 사람이 아니라 석상이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대가 혼자이며 맨몸이라는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저 두려운 자가 달려들어 자신의 목을 꺾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이 한심한 놈들이 저자를 막을 수 있을까?
***
"딸아이가 상행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오. 아는지 모르겠지만."
"무, 물론 알고 있소. 그대의 여식이 이곳에 당도하기를 나 역시 기다리고 있지."
군터는 벤티노스의 왕이 잔뜩 겁을 먹었음을 알았다. 왕좌의 등받이에 몸을 바싹 기댄 것이 상당히 꼴사나웠다.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저 모양이라니. 하긴, 말이 왕이지 제국으로 치면 성주나 시장 정도 되는 자아니겠는가. 처음 들어설 때는 일부러 기세를 풀어냈는데,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보니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장군께서는 여식이 걱정되어 이곳까지……?"
당연히, 벤티노스의 왕은 눈앞의 사내가 자식을 그렇게까지 아끼는 인간적인 권력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군터 크렘보르가 이곳까지 직접 온 것은 분명 어떤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것이 압박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셈이지. 폐가 되지 않는다면 며칠 이곳에 머물며 딸아이를 기다리고 싶소만, 괜찮겠소?"
"괜찮지 않을 게 무엇이겠소? 벤티노스는 손님을 박대하지 않소."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과 목소리만 봐도 내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벤티노스 왕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하는 군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고작 오백과 함께 타국의 성문을 넘고, 홀로 대전 안에 들어와 있었으나 그의 태도는 솔롬의 집무실에 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 장군, 주연을 준비하겠소."
"그럴 필요는 없소. 초대받지도 않은 몸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는데 주연을 바랄 수는 없지."
담담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거절은 예의상 하는 말 같지 않았다. 벤티노스의 왕은 모멸감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애써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부디 머무는 동안 편히 쉬시길 바라오."
군터가 대전을 나오자 살라스와 아드리안이 따라붙었다.
"이곳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머무는 동안 편히 쉬라더군."
"그것뿐입니까?"
"뭐가 더 필요한가?"
아드리안이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볼을 긁었다.
"우리가 느닷없이 들이닥쳤잖습니까. 분명 당황했을 텐데요. 사실…불쾌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드리안은 어리석은 이가 아니다. 때때로 과격하게 굴지만 그게 멍청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 군터가 친위대 일부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는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들 어쩌겠나."
살라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이들을 보게. 왕국이니 왕이니 하지만, 솔직히 우스울 뿐이야."
복도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묻어 주어 다행이었다. 규모로나 화려함으로나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어쨌거나 왕궁이니만큼 곳곳에 눈과 귀가 있을 터. 잠깐 머물다 갈 뿐이라지만 괜히 악감정을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살라스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왕궁으로 오기까지 어땠는지 생각해보게. 우리는 고작 오백이었으나 누구도 감히 앞을 막아서지 못했지."
정확히 말하면 막아서긴 했다. 그러나 무장해제를 시키지도, 성문 밖에 대기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곳, 벤티노스의 병사들이 형편없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장 상태나, 군기의 엄정함을 떠나서 그들은 어설펐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용병 놈들을 대충 몇 년 동안 묶어놓은 것처럼. 그들은 솔롬의 병사들을 보고 감탄하거나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 제대로 노려보지도 못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외세가 아닌가. 날카롭게 눈을 치떠도 모자랄 판에 그러고 있으니, 우습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나보다도 더 과격해 진단 말이지.'
아드리안이 끌끌 웃었다. 예전부터 살라스를 알던 이들은 변해버린 그가, 계속 변해가는 그가 종종 낯설게 느껴진다고들 말하곤 했으나 아드리안은 지금의 살라스가 더 좋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일단 시원시원하지 않은가.
"아가씨는 언제쯤 오실까요?"
"이르면 이틀. 늦어도 닷새 안으로 보고 있네."
"아가씨가 장군께서 여기 오신 것을 알면 크게 놀라겠습니다."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아드리안도 딱히 무슨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저렇게 무뚝뚝해 보이는 분이 딸을 보기 위해 직접 행차하셨다니, 그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부모의 마음인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는 아드리안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가 안았던 여인 중에 그의 아이를 밴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 그를 찾아온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푸흐흐, 내가 무슨 생각을.'
꽤 긴 복도를 지나 궁의 입구를 나섰다. 병사들은 들어가기 전 대기시켰던 그대로였다. 예상했던 대로, 벤티노스의 근위대는 병사들을 어정쩡하게 둘러싼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드리안이 조용히 입꼬리를 말았다.
살라스의 말대로다. 그저 우스울 뿐이다.
***
군터 크렘보르가 오백의 병사를 이끌고 들이닥친 그 날 이후, 벤티노스의 궁정에는 살얼음판이 깔린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벤티노스의 왕은 그 후로 단 한 번 군터 크렘보르와 자리를 가졌으나, 그때도 주연은 없었다. 왕이 다시 한번 권했으나 제국의 장군이 그 호의를 거절한 탓이다. 덕분에 왕은 다시 체면을 구겼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벤티노스 궁정의 분위기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던 와중, 벤티노스의 동문을 통해 새로운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사흘 전 당도했던 손님과 똑같이 제국과 크렘보르 가문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 여긴 어떻게……."
실비아는 부친이 벤티노스에 와있다는 사실을 진작 보고 받았다.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지만, 소식을 전한 이는 분명 부친의 친위대였다. 거기에 그가 들고 온 서신은 분명 부친의 친필로 적힌 것이었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벤티노스의 성문을 넘기 전까지, 부친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아……."
실비아가 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푸석푸석한 느낌이 손끝에 느껴졌다.
"아비는 이제 전장에 가야 한다."
"전장이요? 혹 서쪽의 적과."
"그래. 끝을 내려는 모양이다."
"……."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게 됐지. 여기까지 온 건 너를 위해서다."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하나요?"
군터는 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네 오라비에게 해준 만큼 네게도 해줄 뿐이다.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비아도 알았다. 부친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와준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판니른의 방위군단장이 사병을 거느리고 사사로이 국경을 넘었다는 것은 문제 삼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부친은 자신을 위해 그런 무리를 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군터 크렘보르가 그만큼 자신의 딸과 딸이 하는 일에 크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밖에 보여준 것이니.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은 실비아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 나간 말이었다. 말이 입 밖으로 새고 나서야 실비아는 이 말이, 아주 예전에 자신이 울먹이며 했던 말임을 뒤늦게 떠올렸다.
"모르겠구나."
10년. 아니, 그보다 더 전. 그때 들었던 답과 똑같았다. 목소리도, 표정도.
"아버지는…전혀 변하지 않았네요."
자신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체, 실비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