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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5화 (855/1,064)

855화

"아가씨가 서운해하시겠군요."

모페이브의 담담한 말을 듣고서야, 군터는 무엇을 간과했는지 알아차렸다.

실비아가 끌고 간 상행단이 큰 문제 없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면, 앞으로 못해도 한 달 정도는 걸릴 터.

"잊고 있었군."

"아가씨가 운이 좋지 않으셨던 게지요."

태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아가씨가 직접 상행단을 이끌고 국외로 나갈 생각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내린, 실비아 나름대로는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부친의 눈에 든다는 것이다.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게 실비아가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그녀가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친이 자리를 비웠다면? 실비아가 느낄 상실감과 허탈함은 상당할 것이다. 하물며 부친을 대리하는 이가 오라비라면 더더욱.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군터가 자리를 비우고 싶어서 비우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소집되어 가는 것이니, 모페이브의 말처럼 실비아가 운이 좋지 않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아이를 봐줄 수 있겠나."

"곁에 있어 드리는 것 정도야 뭐가 어렵겠습니까마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페이브는 오랫동안 군터의 곁을 지켰으나 그의 공식적인 직함은 크렘보르 가의 집사였다. 물론 귀족가문의 집사라는 지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모페이브는 평소 조용히 지내는 것을 선호해왔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거나, 영향력을 발휘할 일이 있더라도 최대한 자중하면서 지내온 탓에 그에게 권력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때문에 그를 아는 이들은 그를 존중했지만, 존중은 어디까지나 존중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하는군."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들이 불쑥 튀어나올 수 있지요. 늘, 모든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예외라고 생각해왔던 모양이야."

"그 또한 모두가 그렇지요."

군터는 모페이브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은 자신 역시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듯했다. 물론 모페이브는 그런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가문을 이어받는 것은 보리스다.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지.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당연히 아가씨도 알고 계실 겁니다. 다만 당신 역시 목소리를 내고 싶은 것이지요. 보리스 공자가 장군의 뒤를 잇더라도 말입니다."

"보리스 녀석이 동생을 억압하리라 보는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가씨는 여느 영애들과 다르다는 거지요."

모페이브가 빈 잔에 다시 차를 따라주는 동안,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자식들 간의 문제는 현재 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누구 하나 편들어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실비아가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귀족 영애가 쓸데없이 엇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비아는 본래 그런 성미를 갖고 태어났으니, 군터는 딸아이가 원치 않게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파발이 온 것이 이틀 전이었지."

"예."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 막 따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단번에 비워버렸다.

"자네가 조용히 지내는 까닭을 알 것 같군."

"천성이 그런 것 같습니다."

"현명해."

무언가 결정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늘 그랬듯, 모페이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군터는 웃는 듯 마는 듯한 모페이브를 보곤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

"군대를 이끌고 먼저 가 있어라."

"그럼 하잘에서 뵙는 겁니까?"

군터는 살라스에게 소집한 병력을 이끌고 하잘로 가 있으라 명했다. 판니른 각지에서 긁어모은 병력이 하잘에 집결하면 군터가 그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큰 틀에서 보면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장군답지 않으십니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데. 나도 모르는 것을 너는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그저 평소와 다르시기에."

"타박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안다. 내가 평소와 다다는 것은, 하지만 자식들의 문제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구나."

"부모의 감정이라는 것이군요."

"글쎄."

군터는 문득 예전에 황자, 자콥 트라소프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에게 괴물이 되지 말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최대한 인간적인 감정들에 연연하라고 했고,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애정만큼 원초적이고 강렬한 감정이 있을까? 남녀의 감정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맞는 것 같군."

"이럴 때마다 장군께서도 아직 사람이시라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이라."

얼핏 들으면 불경한 말인 것 같지만 말하는 살라스나 듣는 군터나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어느 정도는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은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너는 어떠냐."

살라스가 팔에 손을 가져가며 답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점점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간다는 생각. 한동안 살라스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매일 눈에 핏발이 서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팔을 다시 잘라낼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종종 느꼈다. 그러나 변했다고 해서 자신이 아닌 것인가? 이 조금은 철학적인 것 같기도 한 질문에, 살라스는 답을 내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보다도 더한 경우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께서는 어떠십니까."

"나날이 지긋지긋하다."

"하하."

흥미 없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있어야 하는 지루함일까. 살라스는 군터의 심정을 짐작은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하잘에서 뵙겠습니다. 장군."

***

실비아가 이끄는 상행단은 제국과 소국 연합의 국경을 가로지르기로 되어 있었다. 소국 연합의 영토를 통해서 오젠을 피해 본다인으로 돌아가는 경로였다.

사전에 어떻게 움직일지 다 계획을 세웠으니, 그 계획을 보고받은 군터가 상행단의 위치를 짐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정기적으로 파발까지 오지 않았나.

군터는 휘하 기병 오백을 이끌고 국경을 나섰다.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문장기도 세우지 않았다. 그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조차 드물었다. 세간에는 공무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고 알려질 터였다. 빠르게 일을 마치고 하잘에 도착하면 그 핑계는 사실이 될 것이고.

군터가 대동한 기병은 모두 그와 몇 번이고 전장을 누볐던 병사들. 그렇기에 그들은 군터 특유의 무식할 정도로 과격한 행군에 익숙했다. 이틀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들은 관문을 지날 때마다 복잡한 절차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문장기는 세우지 않았으나 군터가 가지고 있는 인장이 그가 크렘보르의 가주이자 판나른에서 권력과 유명세로는 손꼽히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인장만으로는 쉬이 믿지 않는 의심 많은 이들조차 군터와 눈을 마주치면 위압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그 군터 크렘보르라는 데 자연스럽게 수긍했다.

"지극정성이십니다."

아드리안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군터에게 이렇게 편하게 말을 붙이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드리안은 그중 하나였고, 지금 같은 농담도 입에 담는다는 점에서 더욱 유별났다.

사실 아드리안은 이 예외적인 일정에 따라올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지 제국 밖을 구경하고 싶다는 이유 만으로 군터와 동행하기를 청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군터는 선선히 허락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인간적인 당연함이지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혹은 핑계로 비인간적인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특히나 장군 정도 되는 이들이라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자들이 수두룩하고 말입니다."

"그런가."

"뭐, 그렇지요. 그나저나…제국 밖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건 없군요. 야만의 땅이니 뭐니 하도 떠들어대서 뭐 그리 대단한가 싶었는데."

"어딘들 다르겠느냐. 다 같은 하늘 아래 세상일 뿐인데."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발치에 있던 자그마한 돌멩이를 괜히 발끝으로 건드리며.

"그것참 안타깝군요. 그 말씀대로라면 어딜 가더라도 새로울 것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새로움을 갈망하나? 모험심에 젖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니더냐."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호기심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군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의 상당 부분을 전장에서 보냈습니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가끔 허망하더군요. 뭔가… 피 튀기는 것보다 더 멋진 광경을 볼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지요."

"늙었군."

"흐흐. 그런 겁니까?"

문득, 군터는 웃고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이 낯설다고 느꼈다. 이마와 눈 밑, 입가에 자리 잡은 굵직한 주름부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흰색 선까지. 분명 어제도 보았고, 그전에도 보았던 것일 텐데 이상하게 그것들이 눈에 밟혔다. 마치 전에는 없었던, 그래서 보지 못했던 것처럼.

"부럽습니다. 장군."

"뭐가 말이냐."

"장군은 그대로십니다. 처음 봤을 때와 거의 달라진 점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고 보니 살라스님도 그래요. 세월이 피해 가기라도 한 것처럼, 두 분은 예전 그대로십니다. 흐흐. 그러고 보니 할렌 녀석이 이런 투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옅어지는 웃음에 씁쓸함이 스며들었다. 투정을 부렸다는 할렌을 떠올리는 듯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었는데 말이지요."

"……."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답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군터는 일렁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드리안의상념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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