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화
"저들에게서 대가를 받아가셔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약조하지 않았더냐."
"말만으로는 소용없지요. 행동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약조입니다."
보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운바소르 아실과 몰던, 그리고 이번 소집령에 직접적으로 차출되지 않은 귀족 가문들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렘보르는 가주가 직접 나서는 만큼, 형평성을 맞추자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조정은 아버님이 요청한다면 정말 힘든 것이 아닌 이상 들어줄 테니까요."
조정, 그러니까 테리브란 조정으로서도 좋은 일이다. 인력이 됐든 재물이 됐든, 거둘 수 있는 것이 늘어나면 그들은 분명 반길 것이다.
"내키지 않는군."
보리스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부친의 이런 반응은 예상했던 바다.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로우렌이 예상한 것이기는 했지만,
'성주님은 당신이 조정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자체를 내키지 않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서로 좋을 일이지만,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수도 있죠.'
유치한 것이 맞다. 하지만 자신의 아주 작은 체면, 혹은 자존심이 실리보다 더 크다고 여긴다면 이런 반응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네 말대로 된다면 어찌해야겠느냐.'
'별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호소하십시오.'
로우렌의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떠올린 보리스가 목소리를 키웠다.
"필요한 일입니다."
"네게 필요한 일이겠지."
"예. 맞습니다. 아버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님이 아닙니다.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똑같이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 저는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군터는 가만히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직설적으로 부탁을 했던게 언제였던가. 머리가 지금보다 한참은 더 아래에 있던 때임은 확실하다.
머뭇거리며 입을 열던 어린 아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명 기억하고 있건만 그 기억에 색이 없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것처럼, 온통 흑백이었다.
"알겠다. 내 이름을 빌려, 네 뜻대로 하거라."
심드렁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이지만 흔들렸다. 군터는 그 흔들림에 집중했다. 그 흔들림을, 감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보리스 공자가 왔다 갔다고 들었습니다."
보리스가 물러간 후, 군터가 살라스를 호출했다.
"귀찮은 부탁을 하더군."
"그렇습니까?"
"제 밥그릇을 챙기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잘 됐군요. 이제 보리스 공자는 염려치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평소 아비에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던 아들이 대놓고 제 밥그릇을 챙겨달라 부탁했다. 뻔뻔해졌다기보다, 당당해졌다는 쪽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이제 제 앞가림 정도는 하려는 것 같다."
"보리스 크렘보르라고 하면 동년배의 젊은이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장군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그 손꼽힌다는 녀석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지 않으냐."
살라스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어찌 모를까. 경험만큼은 백전노장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살라스다. 그런 그에게 있어 겉보기에만 그럴듯하게 쌓아 올린 명성 따위는 겉만 누렇게 칠한 돌덩이와 다르지 않다. 겉만 번쩍인다고 해서 다 금이 아닌 것처럼, 실력이 동반되지 않는 명성은 그저 부질없는 허명일 뿐이다.
살라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부정부터 하고 봤을 것인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 역시 변한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오만해졌고, 좋게 말하면 자신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기대되는군요."
"피를 보는 일이?"
"중요한 무대에 직접 올라와 있다는 느낌이지요. 향후 제국의, 아니 세계의 역사를 가를 분기점에 서 있는 겁니다."
"그게 의미가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의미가 없다면, 대체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정의 피가 생각보다 진한 모양이군."
"장군께서는 별 감흥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 말대로다. 역사니 뭐니 해도, 결국 남이 벌여놓은 판 위에 떠밀려 올라갈 뿐이니. 거기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제국의 비사. 살라스는 그 극소수 중 하나였다. 리비암에 웅크리고 있는 음흉한 자가 이 모든 것을 계획했음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살라스는 군터가 불쾌해하는 것을 이해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무대를 만든 자들은 따로 있지요.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은 어디까지나 무대를 만드는 것까지입니다. 무대 위에 올라간 자들이 어떻게 움직일지까지는, 관여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말장난처럼 들리는군."
"누가 감히 장군을 판 위의 말처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설령 죽은 황제가 돌아오더라도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부가 늘었다."
"송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살라스는 아첨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하는 말은 때때로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갈지언정 속에 없는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살라스의 나이도 이제 적지 않다. 전장에서의 경험은 어지간한 노장 이상이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협소하다. 그에게 있어 제국이란 북부의 몇 개 주가 전부이며,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살라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위 관리라는 자들도 자기가 태어난 주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고 눈을 감는 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세상을 알겠는가. 황제를 알겠는가.
'세상이라.'
그러고 보면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아는 거라곤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니, 사실 그마저도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우습게 여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가볍게 낮추어 보는 것이다. 이게 바로 오만함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러나 군터는 그런 자신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자신이 어딘가 단단히 비틀렸다는 것을, 하지만 역시,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이런 자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소집령이 내려진 것은 이곳만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겠지."
"황자도 물러서거나, 어중간하게 마무리할 생각은 없는 것 같군요. 끝을 낼 모양이지요."
자콥 트라소프는 이제야 조금 생긴 여력을 모조리 쥐어짜고 있다. 바라눔 트라소프의 아들을 베고, 그의 세력을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으리라.
"이번 전쟁이, 사실상 제국의 주인을 가리는 결전이 될 거라고들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다음은 황도일까요? 황자가 리비암으로 가서 황제가 되고, 남쪽에 하나 남은 형제를 병탄하겠군요."
"모르는 일이다. 오직 하나 확실한 건, 대전이 임박했다는 것뿐이지."
"송구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조금 들떴었나 봅니다."
살라스는 그의 말처럼 조금 들떠 있었으나, 간단한 주의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범하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감정의 요동이란 그저 가벼운 즐거움일 뿐.
"그건 그렇고, 일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알아보았습니다만, 장군의 창과 같은 재질의 금속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일전에 스치듯이 언질을 준 적이 있었다. 그의 창과 같은 재질로 새로운 갑옷을 만들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의 창은 그 자체로 보물이라 할 만한 물건이었다. 군터는 그것이 법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무구 본연의 성능이 가히 견줄 만한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날이 상하는 일이 없으며, 애써 관리하지 않아도 늘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무구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마수의 뼈, 장인들은 요철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요. 그런 재질의 무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국 내에서는 재료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그것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솜씨 좋은 장인뿐아니라 술사의 조력까지 필요한 탓에 제국에서는 요철로 무구를 만드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무기가 아닌 갑옷이라면……."
살라스가 말끝을 흐렸다. 드문 일이다. 살라스는 일단 한 번 일을 맡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어떻게든 하는 사내였으니.
바꿔 말하면 살라스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달리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적어도 이 부근에서는.
"하는 수 없지."
"일단 계속 알아보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군터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실비아는 확연하게 말수가 줄었다. 늘 곁을 지키는 산드라가 종종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척 보기에도 그런 말이 전혀 소용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것은 독기였다. 전투를 거듭하며 피폐해진 병사처럼, 실비아의 눈에는 솔롬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나움이 엿보였다.
"감사합니다."
또 하나. 새롭게 그리는 상로에 속하는 도시 국가와 협정을 맺었다.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실비아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일행의 몰골은 라르옌다드를 나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레해졌다. 그러나 실비아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그녀를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여기는 왕에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도적 떼의 습격을 열 번도 넘게 받았음을 이야기했다. 귀빈이 자신의 왕국에서 도적에게 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왕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일행의 노고를 치하했다.
"짐승은 고기의 냄새에 홀리는 법이지요. 그리도 많은 도적이 덤벼든 것은 제가 놈들의 코를 마비시킬 만큼 달콤한 황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이 지긋한 왕은 젊은 손님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허허 웃으며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