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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3화 (853/1,064)

853화

몇 번의 습격이 더 있었다.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위협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상행이 아니라 전장 한복판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혹독한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행의 몰골은 라르옌다드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이제 막 출발한 것처럼 번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장 조금 보태서 그들이 상행단인지, 패잔병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무사하십니까."

전투가 끝난 후, 실비아는 롬바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차의 창을 살짝 열고 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사상자는……."

"거의 없습니다. 심려마십시오."

처음에는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목소리가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아가씨."

"뭐가 그리 걱정이냐. 싸움은 이미 끝났다."

산드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실비아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과 고함을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해.'

도적들이 상단을 보고 달려드는 것이야 똥에 파리가 꼬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비아는 요보름 사이에 있었던 네 번의 습격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오라버니 쪽에서 손을 쓴 걸까?'

그쪽에서 하려고 한다면 도적들을 고용하는 거야 간단한 일이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자신의 돌발행동이 오라비의 신경을 거스른 것은 분명하다. 극단적으로 나올 생각은 없을지라도, 자신의 일을 망쳐놓으려는 시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뒤에 있는 건 이제 확실해 보여.'

이쪽의 이동 경로가 읽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공교로운, 줄지은 습격은 불가능하다. 자신만의 생각이라면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롬바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어떻게 하지.'

여기저기서 쉼 없이 들리는 신음에 실비아의 마음이 점점 약해졌다. 처음 솔롬을 나설 때는 그 어떤 난 관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모두 돌파할 각오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 각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피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괜찮은가요?"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욕심에 휩쓸린 이들에게 의미 없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기억해주는 것.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붕대를 감은 팔을 힐끗 쳐다보고 돌아선 실비아 크렘보르, 카인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으음!"

"조금 강했나?"

"아닙니다. 딱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친 병사의 어깨에 붕대를 감아주었는데, 조금 힘이 과하게 들어간 듯했다. 그래도 병사는 어깨를 감싼 압박감이 싫지 않은 듯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바쁘시군요."

"모두가 다 바쁘지."

꾀죄죄한 몰골의 레온이 씩 웃으며 다가왔다. 그 역시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를 몇 개씩 달고 있었는데,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안색이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 기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기술이라고 할 것 있나. 약 바르고 붕대나 감는 정도인 것을."

"기술이지요. 약이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붕대가 있어도 시원찮게 감아서 괜한 수고만 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습니까."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자연스레 익힌 걸세. 대단치 않아."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카인은 레온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떠돌이 생활이 떠오를 만큼 고단한 일정이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나오는 배식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마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면 진작 도망쳤을 이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돈도 좋지만, 일단 목이 제대로 붙어있어야 돈이 있어도 쓸 수 있을 것 아닌가.

"사기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야반도주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눈에 불을 켠저자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움직였겠지요."

레온이 눈짓으로 야영지 외곽을 가리켰다. 친위대 병사 몇 명이 말을 타고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열흘간의 일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저것이었다. 본래는 실비아 크렘보르의 주변에만 머물던 친위대 병사들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상행단의 동선이 읽히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서부터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상행단 내부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듯했다.

타당한 의심이었다. 첩자가 있지 않고서는 매번,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도적놈들이 들이닥칠 수 없었을테니.

대놓고 첩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지만, 이미 눈치 빠른 이들 몇몇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 봐야 가뜩이나 떨어진 사기가 아예 바닥을 칠 것이 분명하니 애써 입단속을 하고 있을 뿐.

"엉망진창입니다."

"그래. 엉망진창이지."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제국으로, 솔롬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억지로 여정을 이어 나가는 것은 '아가씨'의 고집, 혹은 욕심 때문일 것이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은.

'저자의 힘이지.'

롬바드.

모든 전투에서 항상 가장 앞에 서서 싸웠다. 가장 많은 적을 죽였고,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들은 대부분 직접 목을 베었다. 처음에는 저돌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매번 활약하는 것을 보니 저절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과감함은 결코 무모함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물론이지요. 저는 저자가 갑옷을 벗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감탄하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카인은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용맹하다지만 매번 선두에서 싸우는데 상처하나 입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면 당연히 상처를 치료해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저 답답한 갑옷부터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레온의 말처럼, 롬바드는 단 한 순간도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겠지."

"그렇겠지요. 형님도 아시다시피 모든 병사, 아니 모든 이들이 저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성주가 어째서 다른 이가 아닌 롬바드를 딸에게 붙여주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용맹한 주인 밑에는 용맹한 수하들이 득실거리는군요."

"비슷한 이들끼리 어울리는 법이지."

"하하. 형님과 저도 그러합니까?"

"글쎄."

레온의 농담에 카인이 피식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고기 몇 점에 건량이 전부였지만, 뜨끈한 국물과 함께 먹으니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하기야, 이 정도로 허기가 진 상태라면 무엇인들 맛이 없겠느냐마는.

"형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후회?"

"고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 이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첩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를 부리는 배후도 있을 터인데, 짐작 가는 배후는 하나뿐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대담하군. 아직 흥분이 다 가라앉지 않았나 보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뭐, 그래도 듣는 이는 없습니다."

그들이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기도 했고, 주변이 이래저래 분주하고 소란스럽기도 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카인과 레온의 활약을 눈여겨본 이들이 친해 지기 위해 접근해오곤 했으나 지금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있을 때는 그들도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카인과 레온, 두 사람에게서는 때때로 쉬이 다가가기 힘든 어려운 분위기가 풍기곤 했다. 지금처럼.

"보리스 공자의 미움이라도 살 것 같은가?"

"별생각 없었습니다만, 이제는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저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왔던 것처럼 떠나면 그만이지만, 형님이 신경 쓰여서 말입니다."

"하하. 나라고 다를 것 같은가?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떠나야 한다면 떠나면 그만이네. 어딜 가더라도 나 하나 몸 뉠 곳 없겠는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전의 그…암살자 놈들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자네가 그때처럼 지켜주겠지. 아닌가?"

레온이 싱긋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카인도 조용히 웃고 말았다.

그릇을 거의 비웠을 즈음. 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별일 없을 걸세. 크렘보르 남매 사이가 썩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인듯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척을 진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간단하지. 보리스 공자가 정말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도적들을 부리는 대신 직접 손을 썼을 테니까.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멀쩡히 숨 쉬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건 남매간의 자존심 싸움인 겁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높은 분들의 사정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 적당히 얼버무린 카인이었지만, 레온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의 의형을 바라보았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짐작 정도는 하고 계시겠지요. 관심 없는 척하시지만, 사실은 누구 못지않게 관심을 두고 계시니까요."

"그래 보이나?"

"형님께서 추구하시는 것도 결국은 출세가 아닙니까. 출세하려면 윗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래. 그랬지. 이래서 사람은 항시 조심해야 한다니까."

기억한다. 언제 그 말을 했는지도 기억했다. 레온과 단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만취 직전까지 가서 푸념하듯 털어놓은 속내였다.

도망자로 살아온 고단한 시간. 절망과 좌절 속에서 몸부림치던 와중 마침내 찾은 쉼터. 몸과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잊지 않았다.

"기회라고 생각하십니까?"

"실비아 아가씨 쪽에 서라는 말인가?"

"아니요. 저는 권하지 않습니다. 단지 형님의 의중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복잡한 계산은 하고 있지 않네. 아가씨께서 직접 나를 지목하셨기에 거절할 수 없었을 뿐이야. 하지만…그래. 조금 더 나를 알리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고는 있지."

"그러시다면, 적당히 칼에 피를 묻히면서 묻어가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다면?"

"일단은 두고 보게. 나도 생각이 있으니."

***

검과 창이 허공을 긋는다. 몸은 이미 뜨끈해진 지 오래이건만, 땀은 잘 흐르지 않는다.

거듭하고 또 거듭해도 더 나아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답답해질 법도 하지만 딱히 향상심을 가지고수련하는 것은 아니라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수련이라기보다는 습관이다. 취미이기도 하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머리가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영문 모를 불쾌함, 무료함, 그 외의 갖가지 감정의 찌꺼기들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쾅!

창대 끝으로 땅을 찍자 연무장 바닥이 작게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졌다. 군터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젖혔다.

"장군, 찾으셨습니까."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군터가 몸을 돌렸다. 니클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당치 않습니다. 명하십시오. 그러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부탁이다. 듣고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다."

"……."

니클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담담하기만 하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딸아이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내가 없더라도, 앞으로 계속."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니 문득 네가 떠오르더군."

"…사실,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아직 은퇴를 논하기에는 이른 나이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젊었을 적 고생을 많이 했었다. 주인의 복수를 위해 제 수명을 깎다시피 하며 칼을 갈았다. 게다가 그가 지금 맡은 일의 특성상 심력을 소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래저래 심신이 축날 수밖에 없었다. 시어문드나 아드리안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흰머리가 적잖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자님 때문입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저 준비해놓고 싶은 것뿐이야."

무엇을 위한 준비 말입니까. 니클라스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그 말을 도로 삼켰다.

"따르겠습니다. 마지막 명이라고 생각해도 될는지요."

"편할 대로 생각하도록."

니클라스가 물러가고, 군터는 연무장 바닥에 꽂혀 우뚝 선 창을 뽑았다. 거무튀튀한 창이 밤의 어둠과 섞여 한층 더 불길한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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