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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2화 (852/1,064)

852화

"실패했다고?"

로우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실패했다고? 또?

한두 번쯤은 실패할 수도 있다. 실수가 있을 수도 있고,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

하지만 그런 일이 한두 번을 넘어 계속 반복되다 보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처음 세운 계획자체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혹은…….

'들어온 정보만 놓고 보면, 개입의 정황은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의심을 곧바로 지웠다. 성주부의 움직임은 한시도 놓친 적이 없다. 솔롬 밖에서 움직였을 수도 있지만, 로우렌은 그런 가능성마저 배제했다. 성주는 그렇게 조용히 일을 진행할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당장 병사들을 보냈을 것이다.

'라르옌다드의 호의도 거절했지.'

당차고 똑똑하지만, 실비아 크렘보르는 처음 바깥 세상으로 나선 꼬마 아가씨다. 그녀 나름대로는 세상을 안다고 생각했겠지만, 안에서 보는 세상과 밖에 나가 직접 부딪치는 세상은 상당히 다르다. 그건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기 힘든 것. 게다가 그녀는 한 무리를 이끄는 통솔자로서 세상과 마주했다. 그것도 제국 밖의 무질서한 세상과.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드는 의심과 두려움 덕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롯이 홀로 이겨낼 수밖에 없는 시련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으면, 초조함은 점점 덩치를 키워 결국 괴물처럼 거대해지고 만다.

'금방 포기하고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잔챙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큼지막한 놈들도 아닌, 어중간한 놈들에게 의뢰를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로우렌 역시 실비아가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바랐다.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봐온 그녀는 로우렌에게도 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곤란하군.'

실비아가 돌발행동을 했을 때는 놀랐지만,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간단할 줄 알았던 문제가 예상외로 속을 썩인다. 지금이라도 다시 손을 써야 할까? 얼핏 보면 생각하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이번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녀석들로 고르면 되니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단 말이지.'

도적으로서, 소위 이름을 날리는 놈들 같은 경우는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놈들은 큰 덩치만큼이나 머리가 돌아갈 것이 분명하기에, 제국의 귀족 가문과 엮이는 일을 피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끌어들인다고 해도, 놈들이 반드시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찌해야 할까.'

사실, 정말 확실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보리스 휘하의 병력 일부를 쓰면 된다. 보리스에게는 사병이라고 할 만한 측근들이 있었고, 그들이 신분을 숨긴 채 도적 행세를 한 번만 해주면 실비아의 모든 계획은 송두리째 망가지리라.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여기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진행한다 해도 성주의 눈을 피하기가 어려우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리스가 그것을 허락하겠냐는 것.

'이미 허락했으면서 쓸데없이 잔정에 사로잡히신다니까.'

사실 로우렌은 보리스에게 직접 손을 쓸 것을 이미 한 차례 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의 권유를 단번에 거절했다. 그래도 동생이라는 것일까. 직접 손을 쓰는 것과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지만, 보리스의 태도가 완강하여 로우렌도 두 번 권하지는 못했다. 말이 통하는 것도 없이, 괜히 쓴소리만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일이 한 번 틀어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리스는 위선에 사로잡혀 있었다. 꽤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아직 진정한 귀족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도…… 역시 무리겠지.'

보리스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특히 솔롬을 벗어나면 더욱 그렇다.

'일을 제대로 하는 놈이 하나라도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로우렌은 복잡한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괜히 안 되는 것을 붙잡고 억지를 부리다가는 역풍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공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다더냐?"

"업무 보고를 받고 계시는 것으로 압니다."

부지런하기도 하셔라. 로우렌은 슬쩍 창밖을 보았다. 날이 이미 오래전에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로우렌은 보리스를 보며 종종 등 떠밀린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잘난 아비를 둔 대가인가.'

어렸을 때는 아늑한 그늘이었는데, 커서는 답답한 창살이다. 한때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기에, 로우렌은 보리스의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 속은 분명 조바심에 상당히 물들어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

언젠가 적당히 얼굴이 붉어진 보리스가 술 냄새를 풍기며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전장에서 교분을 나눴던 티브리악의 후계자. 전공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는 그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그에게서 이상적인 귀족의 모습을 봤다는 거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껍데기뿐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보리스는 도통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증명해야만 하는 자와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는 다를 수밖에 없거늘.'

로우렌은 끌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상관은 밤을 지새울 기세로 업무를 보고 있다지만, 그 밑의 사람도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마음도 불편하고, 몸도 영 찌뿌둥한 것이 기름칠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공자께 가서 썩 순조롭지 않다고 전해드려라."

"예?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황당해하는 수하를 뒤로하고 나오며, 로우렌은 왜 일이 틀어졌을지를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연합국의 도적놈들이 무능했을 가능성. 이게 가장 가능성이 크긴 하다. 도적놈들에게 유능이고 무능이고 있겠느냐 싶지만, 어디에나 덜 떨어진 놈들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려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실비아 아가씨가 솔롬을 떠나던 날. 그 옆을 지키던 가면 쓴 사내.

'롬바드였지.'

무식함으로 성주의 총애를 얻은 자라고만 생각했었다. 성주가 단순히 동향이라고 싸고돌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갑자기 나타나 활약하는 그자를 보며 수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먼 길을 떠나는 실비아 아가씨의 호위를, 다른 누구도 아닌 그자에게 맡기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그런데, 그 수상한 자의 얼굴이 지금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

군터는 공손히 고개 숙이는 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움츠러든 기색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장군."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이르시길, 준비하라 하십니다."

"준비?"

"무샤라트가 그의 형제들을 거의 다 제거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만이 남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

"전하께서는 일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장군께서도 응당 합류하셔야지요."

바라눔 트라소프는 후계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죽었다. 때문에 강대했던 세력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여럿으로 갈렸다. 하나뿐인 자리를 위해 형제끼리 피를 보는 것이 꼭 황좌를 두고 다투는 황자들과 같았다.

"생각보다 오래가지는 않았군."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끝을 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자콥 트라소프는 바라눔 트라소프의 죽음 직후 쳐들어가기보다 그 틈을 이용해 숨을 돌리기를 택했다.

당시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황자의 선택이 옳았다. 만약 그때 기세를 몰아 들이쳤다면 바라눔 트라소프의 자식들이 외적에 맞서 똘똘 뭉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랬다면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터.

"전하께서는 장군의 활약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

은근한 압박.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다.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는 이 전쟁을 남의 싸움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자콥 트라소프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그 값은 치러야 한다.

"공식적인 소집령은 언제쯤 떨어지겠나."

"한 달을 예상하고 계십니다만, 어쩌면 거기서 보름정도 더 밀릴지도 모릅니다. 우리 쪽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저쪽의 상황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저쪽이라 하면 무샤라트 트라소프 쪽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하나 남았다는 그의 형제가 이를 악물고 버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준비하도록 하지."

"그리 전하겠습니다."

황자의 사자는 만족한 기색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고, 잠시 밖으로 나가 있었던 살라스와 토어릭 등이 들어왔다.

"준비하라더군."

"역시 그렇습니까."

직접 내용을 듣지는 못했으나, 그들 역시 짐작하던 바가 있었다. 황자의 사신이 다른 사람은 다 물리고 은밀하게 전할 이야기가 무엇이겠는가. 언제고 소집령이 떨어질 것은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그들의 예상보다는 조금 일렀을 뿐.

"사실상… 마지막이겠군요."

시어문드가 중얼거렸다.

"마지막?"

"세 황자 중 바라눔 트라소프와 우리의 세가 가장 컸습니다. 명분 역시 남쪽의 아말로페 트라소프는 세도 작을뿐더러 명분과 민심까지 잃은 상태이니, 이 전쟁의 승자가 곧 제국의 주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시어문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전쟁이든 전투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 앞으로의 전투 몇 번이 거대한 제국의 주인을 가린다고 하니 새삼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오는 듯했다.

"한 달이다. 그 안에 준비를 마쳐라."

"예."

"물러가라. 그리고 보리스를 불러오도록."

잠시 후, 조금 피곤한 기색의 보리스가 조용히 들어왔다. 군터는 보리스의 눈 밑에 진 옅은 그늘을 힐끗 보고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아라."

"예."

"테리브란에서 사자가 왔었다. 들었느냐?"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토어릭이 입을 다문 모양이었다. 괜히 가볍게 입을 놀렸다가 꾸중이라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리석은 녀석.'

토어릭이 보리스에게 줄을 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소심하게 굴다니. 이렇게 보면 영리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생각이 많은 만큼 걱정도 많아지니까 말이다.

"조만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

"무슨 일로……."

"황자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는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

"그 말씀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네가 나를 대신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흔들리는 눈과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이 마주쳤다.

애써 담담한 척하지만, 군터는 보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고, 시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시험…입니까."

"솔롬만을 말함이 아니다. 판니른의 방위까지 책임져야 한다. 다시 묻는다만, 할 수 있겠느냐?"

"맡겨주십시오."

걱정과 흥분, 명성에 목마른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토어릭을 두고 가겠다."

"아버지. 토어릭은……."

"뭘 두려워하지?"

군터는 보리스의 다급한 목소리를 끊었다.

"어렸을 때보다도 더 겁이 많아졌구나."

"……."

"생각이 많은 것은 좋지만 겁쟁이가 될 필요는 없다."

"저는 단지, 괜한 오해를 하실까 걱정이 됐을 뿐입니다."

"오해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내게 아들은 너 하나다. 내 뒤도 네가 잇게 되겠지. 어차피 네 것이 될 것을 조금 일찍 이어받는다 해도 나는 상관없다."

"예."

"다만, 나는 언제고 때가 되었을 때. 네가 준비되어 있기를 바란다."

보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만은 군터도 보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해주었으니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온전히 보리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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