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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1화 (851/1,064)

851화

"송구합니다. 아가씨."

실비아는 고개 숙이는 롬바드를 보며 몇 번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하고 싶었으나, 실제로 그를 책망하지는 못했다. 지휘관이라는 자가 혼자 뛰쳐나가서 추태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추태가 득이 됐기 때문이다.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롬바드는 홀로 뛰쳐나가 도적 수십을 베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어이 놈들의 우두머리까지 참살했다. 그의 활약이 아니었더라면 전투는 더 어려워졌을 터.

"개인의 용맹을 떨치는 것도 좋지만, 다음부터는 지휘관의 본분을 다해줬으면 좋겠군요."

"……."

롬바드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할 말이 없다.

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하기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롬바드가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불경을 저지를 자는 아니라고 보았다. 오늘 일이 있기 전까지 그가 보인 공손한 태도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후우.'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번 전투에서 롬바드가 세운 공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상을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호위이기는 하지만 부친의 신하가 아닌가. 그러니 그녀로서는 롬바드에게 일정 부분 못마땅한 구석이 있더라도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난 여태 롬바드라는 자가 피 대신 철물이 흐르는 냉혈한인 줄 알았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카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온이 피식 웃었다.

"피 대신 철물이 흐른다고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음?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세상은 넓어. 우리가 평생 떠돌아다닌다고 해도 그 반이나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나."

"하하.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요."

그들은 일부러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숨을 골랐다.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피를 닦아내며, 아직도 단내가 풍기는 입을 물로 헹궜다.

"이놈들. 평범한 도적들은 아니었네."

"지금까지 본 녀석들과는 조금 달랐지요."

칼질 솜씨나 기마술 같은 실력적인 부분을 떠나, 놈들은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있었다. 정규군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조금만 겁을 먹으면 곧장 내빼던 이제까지의 도적놈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놈들은 자기들 두목이 목 없는 시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무턱대고 들이받는 대신 이리저리 영악하게 움직이면서 상행단을 공략하려 들었다. 놈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안다는 증거였다.

"라르옌다드의 호의를 거절했던 것이 새삼 아쉽게 느껴지는군요."

떠나기 전, 라르옌다드에서는 호위병력을 붙여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실비아 크렘보르는 그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고, 라르옌다드의 왕은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왜 그쪽의 호의를 거절했는지는 카인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첫째로는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다른 국가들에 라르옌다드와 가깝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을 것이고, 둘째로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만 하는 세상의 이치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혹은, 라르옌다드를 믿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쪽에서 호위를 붙여주었다고 한들, 생색 정도였을 것이야."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요. 고기 방패로라도 쓸 수 있었을 테니까요."

카인은 그의 의동생이 이제 제법 속세에 물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군인으로서 익숙해졌든지. 그 순진했던 청년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고기 방패 같은 말을 입에 담다니.

"이제 어찌 될까요."

"뭐가 말인가?"

"제법 피해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이대로 계속 강행할 것 같습니까?"

카인은 수습에 한창인 일꾼들을 힐끗 살피고, 부상자를 점검하는 병사들을 다시 살폈다. 도적들은 크게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승리한 이쪽도 제법 피를 흘렸다. 눈으로 대강 살핀 것이지만 사상자가 얼추 수십은 되어 보였다. 쓰러진 자들만 그 정도이니, 자잘한 부상자까지 합치면 그 배가 넘겠지.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은 분명했다.

"계속 가겠지."

이 상행단은 실비아 크렘보르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진한 그녀의 사업이다. 이제껏 조용히 지내던 그녀가 처음으로 나선 일인 만큼, 이 정도 고난에 포기하지는 않을 터였다.

'평범한 상행단과는 다르지.'

멀쩡하게 펄럭이는 크렘보르의 문장기를 제외하더라도 그렇다. 이 상행단의 목적은 이문을 남기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상로 개척. 내지는 확보였다. 즉, 운반하고 있는 물건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반 이상이 죽어 나간다고 해도 개의치 않겠지.'

전투가 끝난 직후 보았던 실비아 크렘보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가 이런 전투를 언제 겪어봤을까 싶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건 어떻게 봐도 이 참상 때문은 아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불쾌함의 표출에 가까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인은 옆에 앉은 레온이 어느새인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레온?"

"아, 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아아. 그것이……."

카인은 레온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수습을 지휘하고 있는, 답답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롬바드가 있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기이하지. 저 가면이 얼굴의 일부라도 되는 것 같군."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저는 저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희미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위화감?"

"예. 설명할 말을 찾기가 힘이 드는데, 마치 흰 종이에 찍힌 검은 점 같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사실 아직도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해요. 저 자는 무언가 다릅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겠다는 말까지 덧붙이면 아무래도 신뢰도가 생기기 힘들다.

하지만 카인은 레온의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적지 않고, 특히 신비의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카인은 레온이 괜히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으니 말을 꺼낸 것이겠지.

"알고 있겠지만, 그는 성주의 사람이네. 신경 쓰이는 것은 알겠지만, 주의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좋아."

지금까지는 저 롬바드라는 자가 그저 과묵하고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는 전형적인 군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 전에 보인 폭급한 모습을 통해, 그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괴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지.'

예측할 수 없는 자는 주의해야 한다. 대적하기 힘든 자라면 더더욱 그렇고.

카인은 묵묵히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닦고 또 닦아도 눈에 보이는 얼룩만 조금씩 희미해질 뿐, 코를 찌르는 비린내는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

"일을 마쳤다고 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보리스가 입을 뗐다.

"확실하게 말은 해두었겠지?"

"물론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보리스는 반사적으로 반문하려다 말았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그곳에서는 그 어떤 예기치 않은 사고라도 발생할 수 있다. 특히나 무도한 도적놈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터.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지시를 내린 것은 자신이다. 이제 와서 따지듯 비꼬는 것은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니까.'

동생은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대항하고, 직접 상행단을 꾸려서 그 먼 길을 떠날 생각까지 했겠지. 녀석은 정 위험하다고 생각이 들면, 결국 고집을 꺾을 것이다. 게다가, 녀석에게는 부친이 딸려보낸 호위들도 있지 않은가.

'롬바드라고 했던가?'

특이한 외관, 그리고 그가 벌인 일 때문에 그 이름은 이제 보리스의 머릿속에 똑똑히 틀어박혔다. 부친의 총애를 받는 친위대 장교, 그가 어느 정도 능력 있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이 있으니 부친이 딸의 호위를 맡긴 것일 터. 보리스는 그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랐다.

'우습군.'

동생의 일을 망치려 도적까지 고용한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생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권력에 대한 야심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그의 안에서 계속 부딪치고 있었다.

"조용히 처리했겠지?"

"흔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주부에서도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부친은 아무런 말이 없다. 만약 자신이 손을 쓴 것을 알았다면 호출이라도 떨어졌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로우렌의 말처럼, 들키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측일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구석이 더부룩하고, 가만히 있어도 초조해지는 까닭은.

'양심의 가책인가?'

보리스는 조용히 자조했다.

몰던의 가주는 제 형제들은 물론이고, 직계라고 할 수 있는 혈육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죽여 없앴다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비정한 자라고만 여겼었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정말 대단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얼굴을 봐온 가족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이들을 어찌 그렇게 단칼에 쳐낼 수 있었을까.

'그런 이들을 타고난 귀족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해야만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보리스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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