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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50화 (850/1,064)

850화

할렌은 도적들의 습격이 시작되고 거의 동시에 놈들의 우두머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도적이든, 정규군이든 칼 든 무리는 다 똑같다. 많은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대개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수 밖에 없다.

"아가씨를 호위하라!"

평소 애써 가라앉히던 목소리도 지금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듣기 싫은,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찢어지는 목소리가 차가운 가면 사이로 터져 나왔다.

"위험합니다!"

위험? 할렌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수하의 외침에 내 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인 의미는 조금 달랐다.

"미친놈!"

홀로 달려오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친 도적놈. 허술하기 짝이 없게 칼을 휘두르는 놈의 목을 정확히 창으로 찔렀다. 달리는 말에서 붕 떠서, 목이 반쯤 찢어져 덜렁거리며 창끝에 매달린 놈을 쓰레기 버리듯 떨어뜨리고 재차 창을 휘둘렀다. 처음 당한 놈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허술한 또 다른 도적놈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낫군.'

비록 그의 눈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으나, 그래도 지금 나타난 도적들은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었다. 적어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제껏 덤벼온 얼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도적놈들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도적 놈들이었다.

"조심해! 보통 놈이 아니다!"

목표로 삼은, 우두머리임이 확실한 놈이 수하들에게 경고했다. 제법 눈치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 봤자 도적놈일 뿐.'

버러지는 버러지다. 할렌은 자신이 이놈들에게 곤란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촤악!

또 하나. 내리치는 칼날을 창대로 비스듬히 빗겨내고 어깨로 가슴을 들이받았다. 오래전에 완숙에 이른 그의 승마술은 고삐를 쥐지 않고도 말을 한 몸처럼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컥!"

가슴을 부딪친 도적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놈은 뒤따라 오던 동료의 말발굽에 그대로 머리가 깨졌다. 퍽! 하는 시원한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버러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법 밟는 맛이 있는 버러지라 그런지 한놈 한놈 해치울 때마다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가슴에 쌓여온 불만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조금씩 풀려 사라졌다.

"막아! 막으라고!"

우두머리 놈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아니, 저것은 다급함이다. 놈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 불안이 놈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할렌은 가면 뒤에서 미소지으며 왼손에 쥔 칼을 올려 쳤다. 칼날은 창을 막느라 자세가 무너져 있던 도적놈의 가슴을 지나, 놈의 목젖과 턱을 시원하게 갈랐다.

***

"무모하기 짝이 없군!"

롬바드가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한 마디만을 남기고 홀로 적에게 달려들었을 때, 카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지휘관이라는 자가 수하들은 다 남겨두고 홀로 적에게 달려들다니? 저게 무슨 무모한 짓거리라는 말인가?

"지독하군요."

레온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귀 기울이지 않는다.

면 듣기 힘들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카인은 레온의 바로 옆에 있었던 터라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말인가?"

"못 느끼셨습니까? 지독한 살기입니다. 마치 도적들에게 원수라도 진 것 같지 않습니까."

"음."

카인은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롬바드가 뛰쳐나간 것은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서, 그의 기세라던지 분위기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레온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잠깐이지만 섬뜩한 뭔가를 느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레온의 기감이 자신보다 월등한 것 같다고 느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일단은 준비하시지요. 곧 들이닥칠 겁니다."

롬바드가 일차적으로 적의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들은 곧장 이쪽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별일 없기를 바라지만, 여차하면 아가씨부터 지켜야 하네."

"물론이지요. 유념하고 있습니다."

상행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물건도 아니었다. 오직 실비아 크렘보르, 단 한 사람이었다. 성주의 친위병들이 그녀의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싼 채 꿈 쩍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이 무리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막말로 다른 모두가 죽더라도 그녀만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실비아 크렘보르의 주변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카인은 레온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몇몇 이들과 함께 조심스레 실비아 크렘보르 쪽으로 이동했다. 친위대 병사 중 몇몇이 그런 움직임을 눈치채고 시선을 보냈으나, 카인은 모른 체하며 호흡을 골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도적들이 가까워진 탓일까. 그를 향한 시선은 곧 사라졌다.

***

실비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녀는 뽑아 든 칼을 고쳐 쥐며 롬바드 쪽을 힐끗 보았다. 먼지구름에 휩싸여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으나, 비명과 고함이 계속 들리는 것을 보면 아직 롬바드가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단하군.'

처음 롬바드가 일갈하며 달려나갈 때만 해도, 그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롬바드가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믿기 힘들지만, 롬바드는 정말 자신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모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휘관이라는 자가 이렇게 자리를 비우다니.'

실비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도적들은 이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아가씨! 제발!"

산드라가 절박하게 외쳤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 달라는 거다. 혹시 눈먼 화살이나, 창칼이 날아들까 염려 하는 것이다.

"내 걱정이 된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놈들을 죽여 없애! 내게 창칼을 들이대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번 습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미묘한 위기감이 들었다. 그것을 느꼈을 때, 실비아는 이대로 가만히 마차 안에 틀어박혀서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만 남아라! 나머지는 나가서 싸워라!"

실비아가 자신을 에워싸다시피하고 있는 친위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그들은 난처해하며 머뭇거렸다.

"아가씨. 하지만……."

"내가 직접 칼에 피를 묻힐까? 그럼 너희도 다 따라 오겠구나. 그렇지 않으냐?"

"아가씨!"

산드라는 이제 예의고 뭐고 다 집어치운 듯 꽥 소리를 질렀다. 여차하면 억지로라도 그녀를 마차 안에 밀어 넣기라도 할 기세였다.

"시끄러워! 이 상행을 이끄는 건 나다! 상행을 지켜야 할 책임도 내게 있는 거야! 넌 내 호위지? 그럼 네 할 일을 해!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테니까!"

소란이 제법 컸기에, 경황없는 와중에도 근처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새 야금야금 가까워졌던 카인과 레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가 센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요."

레온이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히려 오라비보다 더 괄괄하군."

카인 역시 웃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유쾌해서 나온 웃음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이곳도 썩 안전하지는 않겠습니다."

"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눈도장이나 찍어봐야지."

안전이 제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디에 있는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더 위험해졌습니다. 아가씨는 스스로 미끼가 될 생각인 듯합니다만."

"그래. 맞아."

상행단의 가장 큰 전력은 성주의 친위대다. 수는 적지만 그들은 모두 일당십은 할 수 있는 용맹한 전사들이었고, 그들의 임무는 오직 실비아 크렘보르는 지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제껏 실비아 크렘보르의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롬바드가 혼자 뛰쳐 나가버린 상황에 실비아 크렘보르가 전에 없이 강하게 그들을 압박하고 나섰다. 이제 그들은 별수 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을 터.

'깃발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나 보군.'

실비아 크렘보르는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기수로 하여금 문장기를 더 높게 들게 했다. 레온의 말처럼, 스스로 미끼가 되려는 거다.

와아아-!

도적들의 얼굴이 서서히 보일 즈음, 마침내 친위대가 움직였다. 별다른 기미도 없이 갑작스레 움직인 그들은 도적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긴 창으로 적진을 가르고, 돌입하자마자 창을 내던지고 칼을 들었다. 그 과정이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나름대로 대열을 맞춰 달려오던 도적들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실비아 크렘보르의 곁에 남은 몇 안 되는 친위대 병사들이 사납게 외쳤다. 그들은 주변의 아군을 미덥잖다는 듯 훑어보고는 마치 그들의 상급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선 자리를 지키는 거다! 무도한 도적놈들이 아가씨께 가까워져서는 안 돼!"

카인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적을 막으라는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칼을 들었다.

***

"꺼져라!"

이 상황에, 꺼지란다고 꺼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카인은 상투적인 위협에 대꾸하는 대신 손에 힘을 주었다.

카앙!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손아귀가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곧바로 뒤에서 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르던 레온이 마무리한 것이다.

'술사는 없는 모양이군.'

카인은 덤벼드는 놈이 없는지 연신 살피는 한편, 기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혹 적 가운데 술사가 있지는 않은지 경계했다. 눈에 보이는 창칼이야 어떻게든 방비할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갑작스러운 일격은 주의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까지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하기야, 술사가 이런 도적질에 동참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전투에 능숙한 전투술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설마 그런 이들이 이런 도적놈들과 붙어 먹겠는가.

"숙이십시오!"

레온의 고함에, 카인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접었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로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카인은 그것이 창대 중간 즈음이 박살난 창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커억!"

전면에서 달려들던 도적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정면에서 덤벼드는 놈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의 실전이라 그런지, 몸이 마음처럼 따라오지를 않았다.

"슬슬 뒤로 빠지시지요."

바로 옆으로 다가온 레온이 물러날 것을 권했다. 그에 카인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전이었다. 죽어도 아가씨 곁에서 죽겠다는 듯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몇몇 친위대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이 피아 구분 없이 뒤섞여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멀쩡히 말 위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이 드물었다.

"충분히 활약했습니다. 이쯤에서 물러나 숨을 고른다고 해도 누가 우리를 욕하겠습니까."

카인은 피가 튀어 붉어진 레온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으아아아!"

"도망쳐!"

저 멀리, 십여 명이나 될까 싶은 도적놈들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 뒤로, 한동안 안 보이던 롬바드가 붉은 창을 휘두르며 그들을 뒤쫓았다. 그런 그의 한쪽 손에는 칼 대신 둥그런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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