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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49화 (849/1,064)

849화

"저…두목."

"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두목이라 불린 사내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당연히 위험하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당장 우리 형편이 그렇게까지 곤궁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수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었고, 답할 말이 궁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미 자신이 결정을 내린 일을 아직도 붙들고 늘어지는 수하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

속이 답답해졌다. 목 위에 달린 것은 장식이란 말인가? 도대체가 이 머저리 같은 것들은 꼭 생각을 해도 반만 했다.

"오늘은 부족하지 않지. 그럼 내일은?"

"내일이요? 그거야…그때 가서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일거리야 조금만 찾아보면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요."

도적들이 일거리를 구하기 쉽다는 말은 여러 사람에게 썩 좋지 않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합국의 현실이었다. 자그마한 나라가 난립해있는 상황. 그러면서도 그 무질서를 제패할 만한 강국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 이런 미묘한 상황은 칼 든 무법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세상을 인지했을 때부터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세상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계속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

그렇기에, 수하는 두목의 아리송한 말에 눈만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지금 두목이 한 말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벼락이 비처럼 쏟아질 거라는 말과 비슷했다.

"멍청한 새끼! 네놈도 변경 왕국과 제국 간에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건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크렘보르의 하나뿐인 여식이 이 먼 곳까지 직접 왔잖아!"

"그…렇지요?"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녹고 있다. 무슨 동맹을 맺는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질 게 분명해. 이게 무슨 뜻이냐?"

"…무슨 뜻입니까?"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 된 사내가 의자의 팔걸이를 탕탕 두들겼다. 마음 같아서는 수하의 머리통을 두들기고 싶지만, 애써 참는 기색이었다.

"무슨 뜻이긴! 우리 같은 놈들의 장사에 먹구름이 낄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이지! 뭐, 그래도 단번에 뭔가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테지만…이전보다는 상황이 안 좋아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게다가, 그런 변화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고!"

"으음. 그러면……."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놔야 한다는 소리다! 게다가, 이 일이 보통 일이냐?"

"보통 일은 아니죠. 끝까지 가지는 않는다지만, 어쨌거나 크렘보르의 여식을 치는 일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이건 내 추측이다만, 일을 의뢰한 놈도 제국 쪽일 것 같단 말이지."

"예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의뢰한 쪽에서 그 상행단의 상행이 어그러지기를 바라니까."

"그것만으로요? 라르옌다드나, 이번 일에 발을 걸친 곳들이 이득을 보지 않기를 원하는 다른 놈들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듯한 반론이다. 아무리 머저리라고 해도 하루 이틀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 이런 쪽에서는 그래도 머리를 쓸 줄 아는 것이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 놈들은 그럴만한 배짱이 없어. 아무리 시늉만이라도 크렘보르의 여식을 건드리는 일이야. 내가 말했잖냐? 연합국과 제국의 분위기가 풀어지고 있다고. 이거야말로 연합국 놈들이 오래전부터 간절히 바라던 것 아니냐? 그런데 이 좋은 분위기를, 다른 놈이 돈 좀 만지는 게 배 아프다고 해서 깨트린다고?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만한 배짱이 있는 놈이었으면 진즉에 칼부터 열심히 갈고, 전쟁부터 벌였겠지. 안 그러냐?"

"뭐…그건 그렇긴 하군요."

연합국의 무질서한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 그건 연합을 이루고 있는 소국들의 덩치가 다 고만고만 해서도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먼저 칼을 빼들 만한 배짱 있는 자가 없어서였다. 소위 왕이라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이들은 모두 그 배포가 자신들의 자그마한 도시만 했다. 그들은 가진 것을 지키면서 잘난 척을 할 줄은 알았지만,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릴 줄은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욕심을 드러낼 만한 힘도 배짱도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남는 건 제국 쪽뿐이란 말이지.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제국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이냐?"

"살벌한 놈들이죠."

얼마 전, 아니, 얼마 전보다는 조금 더 예전. 제국의 황자 둘이 서로 죽이겠다고 싸울 당시의 일이다.

형제간의 싸움에서 끝내 7황자가 승리한 후, 2황자를 따르던 세력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중 일부는 승리한 7황자에게 항복했고, 일부는 저마다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7황자의 손이 닿지 않는 남쪽으로 도망친 자도 있었고, 아예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도망친 자도 있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즉, 가진 것이 꽤 있었다는 뜻이다.

사전에 합의된 정식 망명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떨어지는 칼날이라도 피해 보겠다고 정신없이 도망친 것이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즉, 장사를 하는 그들과 같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는 뜻이다.

세력이 제법 되는 도적떼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제국의 귀족들을 습격했다.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혹시 누군가에게라도 몸값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귀족들을 사로잡아 가두었다. 뜻밖의 횡재에 환호하며 제국의 7황자와 2황자의 칭송하기도 했다.

그 즐거움은 대략 두 달에서 석 달 정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제국의 추격자들이 국경을 넘어 들이닥치기 전까지 말이다.

"설마…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아무리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이라도 생각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아하다는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불안감만이 얼굴 가득 떠올랐다.

"모르지.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크렘보르 하나만 엮였으니 일이 터지더라도 그때보다는 덜하겠지. 하지만 내 듣자 하니 크렘보르의 가주가 아주 무지막지한 자라고 하더군. 무지막지한 제국 놈들 사이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 정도라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당시, 제국의 추격자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는 집요하게 도망친 귀족들을 쫓았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장애물들은 모조리 휩쓸었다.

이미 피 맛을 본 늑대가 또 다른 피 냄새를 쫓아 날뛰니, 인근의 국가들도 숨죽이며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형제의 피를 보고 흥분해있을 7황자를 공연히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통보 형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7황자가 미리 양해를 구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제국의 황자가 그들의 체면은 살려준 셈이었으니까 말이다.

'체면은 얼어 죽을. 그냥 겁먹었던 게지.'

연합국의 국경에 대한 인식은 여느 국가들과 달리 독특했다. 그들이 인지하는 국경이라는 것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도시와 마을 몇 개에 한정되어 있었다. 막 말로 제집 앞마당에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조금 멀리 적이 보인다고 해도 일단은 지켜보기만 한다는 뜻이다. 이는 제국이 국경을 넘어온다고 해도 당장 긴장하는 것은 인접한 몇 개 국뿐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그럼 두목. 더더욱 거절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거절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예?"

"우리를 찾아왔던 그놈을 떠올려봐라. 우리는 수백이지만, 놈들은 고작해야 스물 남짓이었지. 그런데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막말로 우리가 놈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대로 놈들을 묻어버린 채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냐?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거야. 여러 의미로."

"그……."

"우리가 감히 자기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 확신했던 거지. 아니면 건드리더라도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나. 뭐가 됐든 상관없지. 중요한 건, 그런 놈들과 좋든 싫든 얽혀버렸다는 거야. 그 자리에서 못하겠다고 했어 봐라. 당장은 순순히 물러났겠지. 하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일전에 4살짜리 귀족 꼬마 하나 잡겠다고 기병 수백이 한 달넘게 눈에 불을 켜고 다녔던 이야기 들어봤지?"

"두목. 그럼 우리…똥 밟은 거 아닙니까?"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가 똥을 밟았냐? 똥이 하늘에서 머리 위로 떨어진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 지금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수하는 이제 초조함을 드러내며 다시 물었다.

"똥을 밟았든, 뒤집어썼든, 이제 어쩌죠?"

"이미 물살에 휩쓸렸다면 별수 있냐? 기왕에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한번 헤엄쳐보는 거지. 보수가 상당하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몫 챙기고 당분간 사라져야지."

"사라져요?"

"마침 잘 됐어. 세상이 뒤숭숭하지 않으냐. 이럴 때는 그저 납작 엎드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제일이다."

그들의 대화가 끄트머리에 이르렀을 즈음, 망을 보고 있던 또 다른 수하가 달려왔다.

"두목! 옵니다!"

"좋아. 시작하자."

상행단의 이동 경로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르옌다드의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크렘보르의 상행단이 라르옌다드를 나선 후, 며칠간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들이 지날 예상 지역에 미리 가 매복했다.

"주의해야 한다. 듣자 하니 이미 얼치기 놈들이 여럿 덤벼들었다가 목 없는 귀신이 됐다고 하니까."

"에헤이. 두목도, 장사 하루 이틀 합니까? 걱정 마십쇼."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그리 크게 자라지 않은 수풀들이 바람이 할퀴고 갈 때마다 새된 비명을 질렀다.

"딱 좋구나."

시간도 적절하고, 날도 좋다. 낮 동안 부지런히 이동한 상행단은 적절히 힘이 빠져있을 테고, 바람 소리가 약간의 소음 정도는 가려줄 것이다.

"알겠지? 절대 무리하지 마라. 적당히 치고 빠지는 거다. 놈들을 터는 게 목적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알겠어. 대체 몇 번을 말해요?"

평소 같았으면 시건방진 부하 녀석에게 매운 주먹맛을 보여줬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칼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옵니다. 저기."

낯선 깃발이 보였다. 그 아래 뭉쳐서 이동하고 있는 한 무리도, 숨이 거칠어졌다. 설마 긴장을 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제국의 귀족을 건드리는 일 아닌가.

에라이 씨발.

이를 악물고 허리를 폈다. 칼을 뽑아 들고 가볍게 휘둘렀다. 신호를 받은 수하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거칠었던 호흡은 점점 진정되어갔다. 풍부한 경험이 굳은 몸을 녹여주었다.

"쳐라!"

명령을 내리고, 그는 일부러 조금 늦게 움직였다.

적의 시선이 수하들에게 쏠릴 테니, 자신은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

"……."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하게 말을 몰던 순간. 그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한 명. 단 한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데다, 특이하게 가면을 쓰고 있어 눈에 확 띄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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