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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48화 (848/1,064)

848화

하얄 타마람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다행히 왕족으로서 어릴 적부터 마음을 숨기는 훈련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듭해온 덕에 들끓는 마음을 어떻게든 숨길 수 있었다.

"…훌륭한 솜씨로군요."

실비아는 아무 생각 없이 라르옌다드의 무인 역시 상당했다고 말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보는 눈이 있는 이라면, 아니 눈만 제대로 달린 이라면 지금 막 끝난 비무가 싱거울 만큼 일방적이었음을 알 것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우스울 만큼 쉽게 눌러버렸는데 승자 쪽이 패자 쪽의 실력을 치켜세운다면, 그건 칭찬이 아닌 능욕일 터.

"롬바드 공은 부친께서 총애하는 수하입니다. 그분께서 아끼시는 이치고 능력 없는 이는 없지요."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은 라르옌다드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판니른의 손꼽히는 권력자로서도, 비할 자를 찾기 힘들 만큼 뛰어난 무인으로서도 유명했다.

하얄 타마람은 애써 담담한 척 답하며 쓰린 속을 달랬다.

그가 과하게 반응했던 것은 무례한 무부에게 분풀이를 하려던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라르옌다드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라르옌다드가 소국이지만 그 실력만큼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 했었다.

하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어그러질 줄이야. 저 가면 쓴 무인이 솔롬 성주의 총신이라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부끄럽고 한탄스러울 뿐.

***

카인이 레온에게 물었다.

"어찌 보았나?"

"글쎄요. 확실히…대단하군요."

"그게 다인가?"

레온의 짤막한 감상에 카인이 의아한 듯 다시 물었다.

좀 더 그럴듯한 감상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레온은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 제국에서는 특히 더 보기 힘든 구도자 출신이 아닌가. 그런 만큼, 레온이라면 좀 더 많은 것을 보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자신조차 보이는 게 더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술수도 없었습니다. 각인이라고 했던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역시……."

레온은 각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발휘되는 힘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대결에서, 아무런 기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 말인즉, 롬바드가 라르옌다드의 무인을 몰아붙인 것은 그의 순수한 육체적 힘이라는 뜻.

"그렇지."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군요."

조금 전, 롬바드가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한 손으로 쥔 칼로 건장한 상대를 그야말로 찍어 눌렀다. 다 큰 성인이 자그마한 애를 다루듯,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라르옌다드의 무인은 균형을 잃고 이리저리 비틀거리기 바빴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괴력이었지."

"대단했지요. 아니, 대단하다는 말조차 부족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경지에 이른 무인이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것 자체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무명을 날리는 이들 중에는 한 번 창칼을 휘둘러 사람의 몸을 반으로 쪼개버리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고려하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조금 전 롬바드에게서는 그 어떤 기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인이든 뭐든, 아무런 술수 없이 순수한 육체적인 힘만으로…….

"성주님과 같은, 북방의 초원 출신이라고 했던가."

"초원인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성주 휘하에 초원 출신이 한둘이던가.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롬바드와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카인 이 알기로는 그랬다.

"저 롬바드라는 자는…특별합니다. 그 특별함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주의 총애를 받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들이 조용히 속삭이듯 말을 나누는 사이, 실비아는 상심한 하얄 타마람과 적당히 이야기를 끝낸 뒤 다시 자신의 뒤에 와서 선 롬바드를 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

가벼운 생색 정도는 낼 만한데, 그의 태도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역시나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과묵한 사내다. 거북한 목소리 때문에 말을 아끼는 것일까. 하지만 말수는 그렇다 쳐도, 행동거지까지 죽은 듯 조용하지 않은가.

'아버지와 닮았어.'

실비아는 롬바드를 보며 자연스레 그녀의 부친을 떠올렸다.

'그래서 총애하시는 건가.'

기이한 사내였다. 부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왜 총애를 받는지는 그녀조차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친의 총애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동향출신이라는 데서 찾았지만, 실비아는 부친이 그런 시시한 이유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다 할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이번에 하베르트인지 뭔지 하는 자들과 마찰을 빚기 전까지는 이름을 알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부친은 진작부터 이 롬바드라는 자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자, 자! 드십시다."

흥을 돋우기 위해 두 무인이 실력을 겨뤘건만, 회장의 분위기는 다 식은 음식처럼 침체 되었다. 회장에 있는 대부분이 라르옌다드의 인사들이었기 때문이고, 자리를 만든 하얄 타마람의 속내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왕자가 체면을 세우려다가 오히려 꺾이고 말았으니, 다들 왕자의 눈치만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얄 타마람도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해서 그는 스스로 분위기를 살리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부왕이 자신에게 뒤를 맡기고 자리를 비웠으니, 이 자리를 잘 이끌어나갈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제국의 용사여. 롬바드라고 했던가? 놀라운 실력이었다. 내 잔을 받게."

실비아는 무뚝뚝한 롬바드가 왕자의 억지로 짜낸 호의마저 거절할까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롬바드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왕자가 건넨 잔을 순순히 받았다.

'아차.'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실이바도, 잔을 건넨 하얄 타마람도 롬바드가 쓰고 있는 가면에 입구멍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얄 타마람은 롬바드가 가면을 쓰고 있는 이유를 몰랐지만, 얼굴을 가린다면 가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리고 싶어 가린 얼굴일 것인데, 잔을 줌으로써 가면을 벗어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바보 같은 실수를.'

하얄 타마람은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몸을 돌렸지만, 좌중의 시선은 대부분 잔을 받아든 롬바드에게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

롬바드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한 손으로 가면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살짝 들어 올린 후 단번에 잔을 비웠다. 핏기 없이 창백한 턱과 입술이 살짝 드러났으나, 아주 잠깐이었고 거리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에 그것을 본 이들은 극소수였다.

***

"크렘보르의 상행단을 건드리라고?"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않나."

"그렇긴 하지.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말이야."

제국은 그들의 국토 밖을 야만의 땅이라 불렀다. 오직 자신들만이 문명이며, 세상의 중심이라는 오만한 사고에서 나온 표현이었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장 연합국만 놓고 봐도 그랬다. 수십, 수백의 도시국가가 난립한 연합국의 특성상,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가 모호했다. 나라를 칭하고 왕을 칭하지만, 그들의 국력은 대부분 미약했다. 그들의 나라, 다시 말해 도시 하나를 통치하는 데도 벅찬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국경을 지키는 데 소홀한 경우가 대부 분이었다. 이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인접한 국가가 적지 않은 탓에, 국경을 지킨답시고 병력을 파견했다가는 자칫 인접한 국가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연합국의 이런 사정 때문에 자연스레 도적들이 횡행하게 되었다.

"바보 취급하지 마라. 이쪽도 알고 있다고. 이 먼 곳에서도 크렘보르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개중에는 단순히 도적이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덩치를 키운 이들도 존재했다. 국가 차원에서 현상금을 붙일 정도로 흉명을 떨치는 이들이.

"그렇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미 너희는 여러 왕가와 척을 지지 않았나."

"그래. 그랬지."

목에 걸린 현상금이 괜히 걸린 게 아니라고 말하듯, 외모부터가 적잖이 험상궂은 사내였다.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는 눈만 봐도, 그가 이제껏 숱한 목숨을 거둬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놈들이 내 목에 금을 걸었다고 해도, 직접 쫓아오지는 않아. 왜? 내가 놈들의 신경을 긁긴 했어도, 그런 와중에 마지막 선은 잘 지켰기 때문이야."

"흐음."

"그런데 이건 아니지. 크렘보르의 여식이 상행단을 지휘하고 있다면서? 그것도 하나뿐인 딸이. 그런데 내가 그걸 건드리면? 그 위대하신 판니른의 방위군단장나리께서 눈에 불을 켜고 추적자들을 보내시지 않겠느냐, 이거지. 내 말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군."

"당연하지. 안 그랬다면 내가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겠나?"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일개 도적 두목에게도 해당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사내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설명을 보충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도 그렇게 무리한 것을 바라지는 않으니까. 네놈들이 해야 할 일은 상행단을 터는 것뿐이야."

"뭐가 다르지?"

"크렘보르의 여식에게 직접 칼을 휘두르지는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들이 뜻을 꺾고 돌아갈 정도로만 하면 돼. 적당히 치고 빠지는 정도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하지만 뒷일이 없을 거라 어찌 장담하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네놈들도 명색이 칼밥먹는 인생이라면 잘 알 텐데? 우리는 보수를 지불하고, 네놈들은 받은 만큼 일하면 돼. 거절하겠다면, 그것도 좋다. 이 정도로 간단하고, 이 정도로 짭짤한 일이라면 누구라도 군침을 흘릴 테지."

사내는 미련 없다는 듯, 당장이라도 몸을 돌릴 기세였다.

"잠깐!"

사내가 기어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그를 멈춰 세웠다.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며 주머니를 던졌다.

"늦어도 보름이다. 그 안에 일을 마무리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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