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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47화 (847/1,064)

847화

판니의 동쪽에 산재한 도시 국가들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드물다. 알아야 하는 관리들이나 알뿐, 그렇지 않은 이들은 기껏해야 인접한 몇몇 도시의 이름이나 떠듬거리며 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라르옌다드의 왕을 뵙습니다."

왕.

제국에는 없는 호칭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안다. 고작해야 도시 하나를 다스리는 지배자에게 어울리는 호칭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면, 도시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 불리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나. 권위는 호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크렘보르의 여식이 이 라르옌다드까지 직접 찾아 오다니."

라르옌다드는 제국에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곳. 그런데도 성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타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였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소리가 입에서 나오기는 하는데, 저게 말인가 싶은 수수께끼.

기본적으로 제국민은, 국경과 인접한 변경에 거주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언어라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실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라르옌다드의 왕이 하는 말은 그녀가 대동한 통역관이 곧장 전해주고 있었다.

타국의 왕이라. 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런 속내가 읽힌다면 상대는 필시 불쾌해하겠지만, 그녀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타국의 땅에 서 있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됐다.

"청한 손님도 아닌데, 이리 반갑게 맞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그 무슨 말인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거늘."

라르옌다드의 왕은 나이 지긋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크렘보르의 여식이 자신에게 깍듯이 예를 표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리야르도 타마람.

벌써 5대째 라르옌다드를 다스리고 있는 왕가의 주인이다. 비록 왕가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초라한, 일개도시의 주인 자리일 뿐이지만 그래도 5대를 이어온다는 것은 대단한 일. 본인도 그 사실에 자부심을 품고 있는지, 목소리에 실린 힘이 상당했다.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것은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상행을 위한 길을 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 알고 있지.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면, 길을 빌려주는 것이야 뭐가 어렵겠는가."

비록 종착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교역로가 자신의 영토를 통과한다는 것은 길을 가진 주인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쨌거나 수입이 발생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길을 빌려주는 것으로 판니른의 권력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다.

미리 서신과 사람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조건을 맞줬던 만큼, 딱딱한 이야기는 금방 지나갔다.

"지루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지. 귀한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으니, 마음껏 즐기시게나. 제국의 방식과는 조금 다를 테지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왕이 직접 제국의 방식과는 다를 거라고 얘기했던만큼, 실비아도 조금은 기대했었으나 곧 그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타국의 연회라지만 술과 음식, 그리고 음악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제국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실비아 공. 라르옌다드의 연회는 어떠한가?"

"무척이나 화려하군요. 이런 수준의 연회는 제국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하하. 그런가?"

라르옌다드의 왕은 알기 쉬운 성격이었다.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쪽은 내 아들 하얄이네. 장남이지. 장차 내 뒤를 이어 라르옌다드를 통치할 걸세."

"왕자님이셨군요."

스물 중반 정도 되었을까. 부친을 닮았는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인 사내는 부친의 옆에서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을 본 순간. 아니, 그 전에 왕이 자신의 아들을 소개한 순간부터 실비아는 피로를 느꼈다.

"주인 된 몸으로서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싶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 보니 쉽게 피로해지는군. 하여 내 아들에게 뒤를 맡기고 난 이만 물러가려 하네.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그 무슨 말씀을, 배려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하. 그래. 그래. 사실 나 같은 늙은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보다는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이 더 즐겁겠지."

실비아는 라르옌다드의 왕이 자신에게 호감을 심어 주려 했던 노력이,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한 얄팍한 계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라더니.'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다. 유력한 권력가의 여식에게 이곳저곳에서 혼담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중에는 제법 진지하게 들이대는 곳도 있기 마련이니.

물론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알량한 역사라도 역사는 역사라는 건가.'

번듯한 역사는 그 자체로 자부심이지만, 아무래도 그 자부심이 과도한 자신감을 심어준 모양이다. 주제를 모른다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젊은 왕자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오자 몇몇 이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직접 움직이기까지 했다.

철컥!

무거운 쇠가 맞물리는 딱딱한 소리. 동시에 퍼져나오는 존재감. 보이지 않았으나, 실비아는 누군가 자신의 뒤에 와 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도.

"롬바드 공. 연회 자리에서까지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연회장에는 무장한 이가 몇 없었다.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인 만큼, 괜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만한 요소는 서로 최대한 배제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의 호위는 필요한 법.

그중 하나가 롬바드였다. 그는 무장을 풀지 않았고, 얼굴을 가린 가면 역시 그대로였다. 불필요한 오해를 덜기 위해 그에 대한 양해는 미리 구했지만, 그가 풍기는 기괴한 분위기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라르옌다드의 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듣기 상당히 껄끄러운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충직한 무사로군. 하지만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조금 더 배워야겠어. 그게 아랫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아니겠는가."

"……."

서로의 말을 직접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실비아는 내심 혀를 찼다. 부친이 붙인 고지식한 호위가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눈과 귀만 있다면 왕자의 불쾌한 기색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롬바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면에 난 눈구멍 속, 가라앉은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실비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위쪽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처음으로 라르옌다드의 왕자를 향했다.

그 무심한 시선을 받은 순간, 라르옌다드의 왕자, 하얄 타마람은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그저 잠깐 바라보았을 뿐.

'이게 무슨…….'

그는 평소 스스로 심약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신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성취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시선 한번 받았다고 위축되다니?

'말도 안 된다.'

혼란, 부정. 분노.

순간적으로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그는 이성을 유지했다. 이 자리는 라르옌다드로서도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비록 무인이라 칭할 만큼 수행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보겠군. 실비아 공의 뒤에 선 호위. 보통 무인이 아닌 것 같소."

통역이 전해준 말을 들은 실비아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제 부친께서 직접 붙여주신 호위입니다. 부친의 총 애를 받는 만큼, 실력은 확실합니다."

"그래. 그런 것 같소. 좋아. 잘 됐군. 이건 어떻소?

보아하니 실비아 공은 여인의 몸으로 험한 여정을 자처할 만큼 기개가 있는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아국이 공을 들여 준비한 연회라고는 하나, 그대의 눈에 차지는 않을 것 같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나, 연회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실비아는 아니라고 답하려 했으나, 그보다 하얄 타마람의 말이 이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비록 아국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그 내실만큼은 여느 대국들 못지않다 자부하고 있소. 군사력 역시 마찬가지. 병력은 많지 않더라도, 그 질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고 생각하오."

그의 시선이 롬바드를 향했다.

"그런 와중에, 공의 뒤에 선 호위를 보고 있자니 문득 호기심이 일더군. 내 생각이야 그렇지만, 실제로도 그러할까? 그 강대한 제국의 무인과 비한다면 어떨까, 하는."

그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실례라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좋은 자리에 적당한 여흥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말인즉, 적당히 어울려보자는 것이다. 조금 더 진의를 파고 들어가자면, 건방진 호위에게 따끔한 벌을 주고 싶다는 것이고.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군요. 저를 호위하고는 있지만, 제 사람이 아닌지라."

"이해했소. 그렇다면 그쪽 무인의 생각은 어떠한가?"

통역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실비아뿐 아니라 롬바드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아가씨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공의 뜻은?"

"중요치 않습니다."

"자신 있나요?"

롬바드, 아니 할렌은 침묵했다.

그에게 있어 그 질문은 모욕이었다. 그는 이 초라한 왕궁까지 오면서 보았던 그 누구에게도 실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자그마한 세상에서 어깨에 힘주고 있는 놈들은, 모두 울타리 밖의 강적을 겪은 적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

그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실비아는 그게 그의 답이라는 것을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공의 뜻이 그렇다면, 한번 수고해주시지요."

***

연회장 한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던 악공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제법 넉넉한 공간이 나왔다. 두 무인이 재주를 겨루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본래라면 통성명으로 시작해 가볍게 몇 합을 나눴을 것이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한편,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특히 왕자의 명을 받고 나온 라르옌다드의 무인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눈에 스산한 예기까지 감돌았다.

"보운 드라하즈요."

"롬바드."

통성명 같지도 않은 통성명 직후,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세찬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채앵!

전력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충분히 힘을 실은 일격이었다. 그 일격이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막혔을 때, 보운 드라하즈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무슨 힘이…….'

몸을 날린 일격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그 자리에 서서, 한 손에 쥔 검으로 막았다. 심지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벽을 후려친 것 같은 반발력에 오히려 공격을 가한 이쪽이 밀려날 뻔했다.

"으음!"

불길한 느낌에 일단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뒤로 몸을 빼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힘이 밀려왔다.

'말도 안 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제자리에서 맞댄 검을 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속절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버티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정도면 어린아이와 성인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크억!"

균형을 잃은 보운 드라하즈가 거의 패대기쳐지듯 밀려났다. 볼썽사납게 땅을 구르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경이었다.

그렇게 형편없이 밀려나면서도, 당혹감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그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곧바로 들이닥칠 공격을 대비하며.

채챙!

예상대로, 상대는 바로 달려들었다. 대단할 것 없는 베기와 찌르기. 그러나 그 안에 실린 힘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는커녕, 간신히 흘려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고도 몸이 굳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괴력이었다.

'술수인가?'

제국의 일부 무인들이 각인이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 상식을 벗어난 힘이 바로 그 각인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

칼끝이 목 앞을 베고 지나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날카로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목을 뒤로 젖히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어땠을까. 생사를 겨루는 자리가 아니라지만, 저 가면 쓴 무인의 진의는 그의 기세만큼이나 종잡을 수가 없다. 칼을 들고 있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기도, 투기도, 그 어떤 기운도.

카앙!

흘려내는 것이 조금 늦었다. 여러 차례 칼을 부딪치며 몸에 충격이 누적된 탓에 감각이 무뎌진 탓이다.

"크윽!"

손목이 시큰거렸다. 연신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가 물러나는 만큼 상대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이번엔 찔러온다. 목표는 심장.

'지독하군.'

시작부터 지금까지, 노리는 곳은 오직 급소뿐이다.

풍기는 기운은 없는데, 휘두르는 검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실전적인 검이다. 무수한 피를 묻히며 쌓아 올린 실력이겠지.

'이것이 제국의 무인인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라르옌다드가, 왕국 연합이 제국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고 해도.

'나 역시 무인이다.'

긴 세월, 꾸준한 노력으로 쌓아 올린 무공.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다. 부딪쳐 부러질지언정 두려워 꺾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품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할 수는 없다.

급박한 순간. 그는 뻗어오는 검 너머를 보았다. 찔러오는 검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고 맞공격에 나섰다.

옷 아래 갖춰 입은 호심갑을 믿은 것이다.

"하압!"

노리는 것은 왼쪽 어깨.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어를 포기하고 검을 뻗은 순간.

심장을 찔러오던 검이 거짓말처럼 방향을 틀었다.

일직선으로 밀고 들어오던 상대의 몸이 빠르고 부드럽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은 검이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보운 드라하즈의 검신을 때렸다. 그리고 동시에, 반 바퀴를 회전한 팔꿈치가 그의 가슴을 찍었다.

"커억!"

숨이 멎는 느낌이었다. 보운 드라하즈의 몸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그의 몸이 땅을 뒹굴고, 그의 손을 떠난 검이 그 직후 쨍그랑 소리를 내며 뒤이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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