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화
그 말을 들은 순간, 귀가 있고, 제대로 들리는 모든 이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크렘보르의 영애가 직접 상행을 이끈다고? 귀족이 이런 일에 직접 나서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하물며 여인이?
모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카인이 가장 먼저 침착하게 물었다.
"성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물론."
쉽지 않았다. 부친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그 밑의 다른 이들을 납득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여인인 것을 떠나 단 둘뿐인 성주의 핏줄 중 하나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고 하면 누구라도 절대 반대를 외칠 테니까.
이번 상행은 단지 새로운 상로를 개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방의 소국들과 교류하는 데 의의가 있다. 제국이 아닌, 크렘보르 가문의 이름으로,
'잘 풀렸어.'
보리스의 사람을 빼내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에게 한 방 먹였다고 자축하기에는 말이다.
동방의 소국들.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다. 기껏해야 도시국가 정도밖에 안 되는 약소한 세력일 뿐이니.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기에, 자신들끼리 한데 뭉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하나로 뭉쳐 연합을 결성한 그들은, 제국의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신경 쓸 정도는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제국의 한 주에 불과한 판니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고.
크렘보르는 이미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가문이다.
역사라던지, 가문과 얽힌 인맥들은 몰던을 위시한 다른 명문가들에 미치지 못했으나 영향력 자체는 몰던을 제외한 그 어떤 가문보다도 우위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크렘보르는 더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몸집이 작을 때야 활동이 자유롭지만, 일정 이상 덩치가 커지면 이래저래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도 자그마한 세력들을 짓밟으며 억지로 몸집을 키울 수는 있겠지만, 자칫 공공의 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적당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 눈에 띄는 거대한 포식자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다른 먹잇감들에게 위협이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 한들 당장은 문제가 없다. 아직 크렘보르는 할 일이 많았으니까. 솔롬을 증축하는 것도 그렇고, 손에 넣은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당장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이 고민은 현 가주인 군터보다 후대를 이을 보리스의 몫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실비아가 돌파구를 이야기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꽤나 그럴듯한 돌파구를, 보리스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기에 따라 체면이 상하는 일일 것이다. 실비아는 오라비가 되도록 크게 이를 갈아주었으면 했다.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면, 나만의 기반이 생기는 거야.'
그녀의 오라비는 이미 자신만의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후계자라는 자리를 빼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그가 전장에서 세운 공, 그에 따른 명성은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직접 칼을 빼 들고 서부 전선으로 가 크게 활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그녀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문을 위해 공을 세우고,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는 것이다. 그러면 오만한 오라비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으리라.
***
"발칙한 녀석 같으니."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새어 나오는 것은 헛웃음이었다.
"깜찍한 반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가씨가 선을 조금 많이 넘으셨습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뭐, 어쩌겠느냐? 이미 아버지와 이야기를 다 끝낸 모양인데 말이다."
로우렌이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름 아닌 실비아 아가씨가 상대니까, 그로서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유별난 분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아가씨께서 이런 마음을 품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은 도전이다. 설령 실비아가 오라비에게 거스를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단둘뿐인 직계가 아닌가. 그녀에게도 계승권이 있다. 그러니 그녀가 가문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시도 자체가 보리스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글쎄. 모르겠군."
실비아를 방해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많다. 솔롬 내에서야 감히 가주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솔롬밖이라면, 판니른 밖이라면 어떤가?
"그 아이가 왜 이러는지는 알겠어. 그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하지."
"그렇다면?"
"심하게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버릇은 고쳐줘야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실비아의 반항은 예상치 못한 충격과 불쾌함을 가져다주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그녀가 벌인 일은 보리로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동방 소국들과의 교류라. 이건 꽤 괜찮지 않은가?"
"예. 지금도 그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가문의 이름으로 그들과 접촉한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동방 소국들과의 교역은 제국의 입장에서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그들과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제국 내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제국 전체가 아니라 한 주, 혹은 그 주 내의 도시로 한정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제국의 변경에 위치한 자그마한 도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솔롬의 입지는 최상입니다."
"그래. 그렇지. 왜 이제껏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사람들이 간과하고는 합니다만, 시야라는 것도 중요한 능력 중 하나입니다. 힘이 약한 자는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듯, 시야가 좁은 자는 더 넓게 보지 못하지요."
"질책인가?"
"자책입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저를 포함하여, 자그마한 울타리 안에서 소리만 꽥꽥 질러대던 얼간이 들보다 아가씨가 더 나았습니다."
"그렇군."
보리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로우렌이 언급한 얼간이의 범주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
'네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아직 아무것도 이뤄낸 것은 없다. 하지만 남들이 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쉽게 시도하지 못할 것을 거침없이 밀어붙이지 않았나. 그것만 해도 칭찬해 마땅하다.
만약 동생이 여인이 아니라 사내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조금은 긴장했을까? 동생을 동생으로 보지 못하고, 경쟁자로 여기며 적의를 느꼈을까?
글쎄. 모를 일이다.
***
"롬바드라 합니다."
알고 있다. 어찌 모를까. 적어도 근래에는 살라스보다도 더 유명한 이름이었지 않나.
"장군의 명을 받아, 이번 여정 동안 아가씨를 호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말임에도 섬뜩함을 느낀다. 보기만 해도 차갑게 느껴지는 가면 때문일까, 아니면 마르고 갈라지는 불쾌한 목소리 때문일까.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지만, 실비아는 이성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눈앞의 사내는 부친이 직접 붙여준 호위다. 이번 여정에 따라붙은 친위대 삼십을 지휘하는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런 중요하고, 믿을만한 아군에게 초면부터 실례를 범할 수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롬바드 공."
"……."
롬바드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것만으로도 실비아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가씨. 출발하시지요."
호위로 롬바드와 친위대가 따라붙었다고 해도, 실비아의 옆을 지키는 이는 여전히 산드라였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모르는 얼굴들이 갑작스레 주변에 넘쳐나게 됐기 때문인지 그녀는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이었다.
"긴장 풀거라. 너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긴장이 되는 것 같구나."
"송구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솔롬의 성벽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만, 뭐,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느냐."
롬바드가 이끄는 친위대 병력 삼십. 본래부터 그녀를 따르는 호위대가 백. 거기에 동행하는 상단들이 거느린, 혹은 고용한 병력이 삼백 가량. 무장한 병력만 해도 이 정도인 데다, 상인들과 짐꾼까지 더하면 거의 천에 육박하는 대인원이다. 아무리 제국 밖이 위험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무리를 건들 간 큰 도적이 있을까?
"아가씨. 도로의 정리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래. 가자."
출발 시각은 일부러 대낮으로 잡았다. 도시의 백성들이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실비아 크렘보르라는 이름과 얼굴을 각인시키는 것도 그녀가 이번 여정에서 노리는 바 중 하나였기에.
"아가씨."
"살라스 공."
솔롬의 동문으로 빠져나온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라스가 이끄는 기병들이었다.
"바하시프까지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를 끼치는군요."
바하시프는 판니른 최동단에 위치한 요새로, 그들이 판니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릴 요새였다.
"힘든 선택을 하셨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쉽지 않을 거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아가씨께도 확실히 장군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군요."
마른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누군가에게는 지긋지 긋하게만 느껴질 바람이겠지만, 실비아는 무척이나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감히 판니른 안에서 크렘보르를 넘볼 자들은 없을 테지만, 판니른 밖이라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하물며, 제국 밖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항시 조심하십시오. 롬바드가 잘 모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들을 이끄는 것은 아가씨입니다."
"유념하겠습니다."
바하시프까지의 여정은 더할 나위 없이 순탄했다.
살라스가 장담했던 것처럼, 판니른 내에서 감히 크렘보르의 깃발을 보고도 이를 드러내는 이들은 없었다.
멀리서 마적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적은 몇 번 있었으나, 그들은 크렘보르의 문장을 확인하자마자 부리나 케 도망쳤다.
"제가 모실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조심하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살라스와 헤어진 후, 실비아는 바하시프에서 하루 머물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딱히 강행군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국경을 넘기 전에 하루 정도 휴식을 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