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어찌 되었느냐?"
"일개 재무관 따위가 어찌 감히 아가씨의 명을 거부하겠습니까?"
"더 자세히."
산드라는 실비아 크렘보르의 근접 호위로서, 솔롬의 그 누구 못지않게 실비아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실비아가 왜 한낱 재무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자는……."
산드라는 그 젊은 재무관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대면해서 그 말을 들을 때도 그리 생각했지만, 직접 입으로 말을 전하고 있으니 새삼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재무관 주제에. 귀족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귀족이라고 해봐야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몰락해버린 별 볼 일 없는 가문 아닌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예. 아가씨.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똑똑하군. 눈치도 빠르고."
"저… 아가씨."
"왜 그자에게 신경을 쓰느냐, 이거겠지?"
"예에."
"간단해. 쓸만한 자 같고, 오라버니가 거둔 자이기 때문이지."
"예?"
"계속 당하기만 했지. 그러니 나도 한 번 정도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니?"
"아가씨. 괜찮을까요? 자칫……."
"걱정하지 마. 갚아준다고는 해도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해. 이런 일에 심사가 뒤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속이 좁다고 스스로 외치는 꼴이지.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산드라는 가장 가까이에서 실비아를 호위해왔다.
그런 만큼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그녀가 오라비인 보리스와 사이가 틀어졌던 일이나, 그때의 감정이 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졌다는 것 역시도.
"저는…그저 아가씨가 걱정될 뿐입니다."
"화야 좀 내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뭘 할 수 있겠니? 아버지의 눈치나 좀 살피다 말겠지."
실비아는 아마 지금도 머릿속이 복잡할 오라비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는 거침없이 시원시원한 성격을 숨기지 않았던 그인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아마 군터의 아들로서, 크렘보르의 후계 자로서 떠받들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던가. 가진 게 많은 이들은 겁과 생각이 많아진다던데, 보리스가 딱 그 경우였다.
"아버지를 뵈야겠어."
"지금 말씀입니까?"
"매를 맞을 거면, 빨리 맞는 게 낫지 않겠니."
"그게 무슨."
"아버지는 다 알고 계셔. 적어도 이 솔롬에서 그분의 눈과 귀를 피하는 건 불가능하지. 아마 지금쯤은 이미 들으셨을 거야."
산드라가 못 미더운 것은 아니다. 그녀는 호위만 담당하는 무관답지 않게 제법 눈치가 있고, 일 처리도 훌륭한 편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카인은 아직도 부친의 사람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을 테고, 그런 자와 접촉한 이상 이목을 끄는 것은 필연이다.
"가자."
실비아는 말한 대로, 곧장 움직였다. 성주의 집무실까지 그녀의 앞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집무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조차 그녀를 보더니 조용히 길을 내주었다. 마치 사전에 언질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버지."
"무슨 일이냐."
"알고 계시잖아요."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막 보고를 들은 참이었다. 실비아의 호위가 카인이라는 녀석과 접촉했다고.
"왜 그랬지?"
"그자가 필요해요."
"어째서?"
"오젠과의 교역로가 축소된 지금, 새로운 상로를 개척해보려 하거든요."
"네가 말이냐?"
"예. 제가요."
"그런 것은 상인들이나 할 일이다."
"상인들만 하라는 법은 없죠. 돈은 누구나 다 쓰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아닌가요?"
당돌하지 않은가. 하긴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부터 아들 녀석보다는 붙임성이 있고, 제 할 말도 비교적 똑바로 하던 녀석이었다.
"좋아."
사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다. 실비아가 조용히 아랫것들을 부리고 있다는 건 이미 보름도 더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런데 이런 이유였을 줄이야.
"돈이 필요한 것이냐?"
"아니요."
"그렇다면 왜?"
"제가 아니라 우리 가문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가문은 네 손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 저도 가문을 위해서 일하고 싶은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나요? 뭔가 잘못됐나요?"
"아니. 잘못되지 않았다."
여느 귀족 가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칼같이 잘못되었다는 답이 나왔을 것이다. 귀족 여인에게 주어진 책무는 사내에게 주어진 것과는 사뭇 다르니까. 그들은 정숙해야 하며, 가문이 필요로 할 때만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 '때'란 대부분, 혼담이 오갈 때이고, 그러나 군터는 일찍이 실비아에게 혼인의 자유를 약속한 바 있었다. 그것은 비단 혼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귀족 여인의 틀에 박힌 삶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실비아가 지금 하는 말은 제법 건설적이지 않은가?
"한 가지만 묻겠다."
"네."
"보리스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냐?"
"……."
처음으로 실비아의 입이 꾹 닫혔다. 군터는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실비아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했으나, 애써 피하지 않으려 했다. 그 노력이 눈빛에서 드러났다.
"그렇다고 하면, 나무라실 건가요?"
"아니."
권력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 사내든 여인이든, 그 본능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실비아가 제 오라비의 것에 욕심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게 그녀를 탓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도와줄 수 없다."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 말씀이면 충분해요."
그렇다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인가. 애매하게 넘기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으나, 군터는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진의는 앞으로 지켜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그 상로 개척을 위해 그 녀석이 필요하다는 거냐?"
"재주가 있는 자니까요. 가장 먼저 제 계획을 눈치챈 자이기도 하고요."
"그뿐이더냐?"
"……."
실비아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억눌린 한숨을 토했다.
"이제껏, 저는 별다른 욕심을 부린 적이 없어요. 정말 조용히 지냈죠.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어느 순간부터 저를 억압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네 오라비에 대한 반항이냐?"
"반항이요? 오라버니는 저를 억압할 자격이 없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자유를 약속해주셨던 그 날부터 줄곧 그랬죠. 그건 순전히 오라버니의 오만이었어요."
군터는 눈치가 없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자식들 간에 감정의 골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나, 골의 깊이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직접 말을 들으니, 실비아가 쌓인 것이 제법 많아 보였다. 그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것들부터,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사소한 것들까지 다 쌓여서 만들어진 상처겠지.
'밖으로는 그리 열심이더니, 안으로는 소홀했군.'
군터는 쓸데없이 바빠 보이던 아들 녀석을 떠올렸다. 이렇게 보니, 실비아가 끝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은 녀석의 탓이 컸다. 이후 보리스가 동생의 반항에 대해 알게 되어도, 녀석은 누구도 탓할 수 없으리라.
"이제 너희는 애가 아니다. 너희가 어렸을 때도 내가 직접 너희를 다스린 적은 없었지. 너희가 다툰다고 해도,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
"그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굳어있던 실비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
"아가씨."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실비아가 들어서 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개중에는 카인도 있었다.
"모두 앉아요."
가벼운 손짓 한번. 그리고 상석에 앉은 그녀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본 얼굴도, 처음 보는 얼굴도 있지만 굳이 내 소개는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사람을 부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들이 있다. 윗사람의 기질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보통 세월이 만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크렘보르의 영애는 그런 보통의 경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기질은 타고난 듯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해서, 내가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산드라가 다가와 탁자에 커다란 지도를 깔았다.
"오젠을 통하는 교역로는 막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오젠 총독은 지금도 탐욕스러운 꼭두각시에 불과 하지만, 조만간 그 알량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무리를 할 겁니다."
"그 말씀은……."
"어리석은 자가 일을 그르치는 일은 흔하죠. 어쨌거나 그자의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기회가 될 겁니다."
실비아가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성 그림을 짚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솔롬이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막혔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회해야 할 텐데, 남쪽이나 북쪽으로 시선을 돌려도 마땅한 길은 없죠.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그녀의 손가락이 솔롬을 짚은 상태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동쪽……."
"허나 아가씨. 그러면 국경을 넘게 됩니다."
"그래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실비아가 바로 긍정했다.
"우리는 국경을 넘을 겁니다. 동쪽의 소국들. 그들의 땅을 통해서 본다인으로, 데이븐랏지로 향하는 거죠."
"으음."
이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는 관리들도 있지만, 상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몇 번이고 직접 상행을 간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듣기에도, 실비아의 계획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국경을 넘는다? 한 번쯤 머릿속에 떠올려본 적은 있어도, 시도해본 적은 없는 일이었다. 제국민들에게 있어 제국 밖의 세상은 험한 야만의 땅이었고, 당연히 그곳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필요한 것이 많을 겁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카인이 홀로 입을 열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숨길 수 없게 될 겁니다."
"숨길 생각 없다."
자연스러운 하대. 그러나 누구도 그 변화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 뒤에 이어진 실비아의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에.
"이번 상행, 내가 직접 이끌 것이다. 그러니 숨길 수도, 그럴 필요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