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3화
카인은 발이 넓었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관리 중에서 그보다 인맥이 넓은 이는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는 물론 보리스 크렘보르와 연이 있다는 후광도 있었으나, 카인이라는 사람 자체의 매력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를 아는 이들 중,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한번이라도 말을 섞어본 이들 중 그를 싫어하는 이는 드물었다. 준수한 용모, 능력이 있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겸손함. 그리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진정성이 엿보이는 그를 싫어할 이는 마음이 꼬인 이들 말고는 없었다.
이제껏 카인은 사람을 두루 사귀되 그들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인맥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쓸만한 정보는 위에서만 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결국에 모든 것은 이어져 있기 마련이니, 자그마한 실타래라도 어떻게 따라 올라가고, 또 풀어내느냐에 따라 근사한 옷이 될 수도 있고 볼품없는 헝겊이 될 수도 있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아니다.'
며칠 동안 얻은 이런저런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는 없다. 집중적으로 살핀 로우렌의 동태에서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만으로 추측하자면, 그쪽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좀 더 관망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바오룸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어. 그냥 아직 생각도 계획도 없는 것일 뿐.'
그것을 알았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오룸은 그가 유지하고 있는 끈 중 가장 튼튼한 끈이었다.
그런데 그 끈이 헐거워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보리스 크렘보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성주의 측근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 사람이다 싶은 인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를 않았다.
성주의 측근들은 대부분 무관인데, 그들은 물욕은 둘째치고 이런 일에 발을 담글 생각 자체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속내야 어찌 알겠냐만, 이제껏 보고 들어온 것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그랬다.
'브라그 녀석이 헛소문을 들은 것일 수도 있지.'
별 소득 없이 며칠을 보내면서, 카인은 한편으로 크렘보르 가문이 참 특이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이라고 해서 물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명예니 체면이니 하는 것은 대부분 허울일 뿐이며, 그 안을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그들의 탐욕스러움은 상인들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그들은 한 덩이의 금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체면이 깎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수백의 목숨도 개먹이로 던져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것이 카인이 보아 온 귀족이라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크렘보르는 다르다. 신흥 귀족 가문이라 그런 것일까? 변변찮은 평민 병졸부터 시작해서 가문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도 벌써 수십 년 전 일이 아닌가. 뭐 조금 양보해서 성주야 그렇다 쳐도, 그를 따르는 이들까지도 이렇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일이다.
'아랫물은 윗물을 따라 흐른다던가.'
어쩌면, 성주가 그런 인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성주를 따르는 이들도 저절로 그를 닮아간 것일 수도 있겠지.
'이렇게 되면, 브라그 녀석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것이겠군.'
며칠간 고생한 카인은 허무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헛소문에 낚여서 헛소리를 지껄인 브라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브라그가 이런 결론을 납득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지금까지 봐온 바로, 브라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였다. 시야가 좁고, 속은 그보다 더 좁은 주제에 욕심은 꽤나 있는.
내일 브라그에게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귀가하던 중. 카인은 뒤통수에 닿는 은밀한 시선을 느꼈다.
'빌어먹을.'
한동안 잠잠했으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희망적인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리비암에서 판니른까지는 너무 멀고, 솔롬의 방비는 철옹성 같았으니.
하지만 너무 이른 기대였을까. 카인은 감각을 최대한 일깨우면서 발걸음을 조절했다. 티나지 않게, 조금 더 빨리 걸으며 상대의 수와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
그렇게 늦지는 않은 시각. 대로를 걷고 있었기에 적잖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카인은 그들과 섞여들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조급해지기를 바라면서.
툭!
그런데 정작 조급해졌던 것은 추적자들이 아닌 카인 자신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아마 사내로 추측되는 인물과 어깨가 부딪쳤을 때. 카인은 뒤늦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차가운 칼날이 몸 어딘가를 파고들었다.
'음?'
그러나 머릿속에 그린 그림이 현실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카인은 자신이 무언가 단단히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파고든 것은 차가운 칼날이 아니었다. 까칠하고 자그마한 무언가였으며, 파고든 위치도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쪽지?'
어깨를 부딪친 사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고, 카인은 손에 쥔 것을 고쳐 잡으며 감촉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자그마한 쪽지이리라 추측했다. 눈으로 확인하면 그만이련만, 그간 쌓아온 경험이 그런 안일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간 사내처럼, 그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걸음을 이어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손에 꼭 쥔 쪽지를 확인한 것은,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걸어 잠근 뒤였다.
'이건…….'
겉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까칠했기에, 싸구려 양피지가 아닐까 했는데 까칠한 것은 어디까지나 겉면만 그랬다. 속은 부드러운 종이였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신분의 사람이 쓸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대체 누가?'
리비암에서 온 추적자들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것도 잠시. 카인은 자신에게 이런 것을 보낸 인물이 누구일지 의아해하며 쪽지에 적힌 자그마한 글씨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
오래지 않아 쪽지를 다 읽고서, 카인은 실소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솔롬의 고위 인사들을 하나 하나 꼼꼼하게 짚어가면서도, 정작 가장 위쪽에 자리한 한 사람만은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말았다. 왜? 그 사람이 이제껏 나서는 일 없이 조용했었기 때문에? 아니면 여인이기 때문에?
'실비아 크렘보르'
성주의 독녀이자, 보리스 크렘보르의 누이.
조금 전 대로에서 있었던 일, 쪽지도 쪽지지만, 그렇게 사람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신분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히 나왔다.
실비아 크렘보르는 솔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유명인사지만, 의외로 거론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인물이다. 보리스 크렘보르가 일찍부터, 아니 처음부터 후계자로 낙점되었기 때문일까.
실비아 크렘보르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정말 별것 없었다. 기껏해야 여느 사내들 못지않게 기가 세며, 사냥이나 말타기 같은 취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여느 귀족 영애들과 달리, 혼인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 정도였다.
여러모로 상당히 특이한 귀족 영애였다.
'크렘보르의 아가씨가 돈벌이에 관심을 두고 있다…라.'
소문대로, 상당히 비범한 아가씨가 아닌가.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돈을 버는 것보다는 쓰는 것에 더 열중하기 마련일 텐데 말이다.
사람을 보내 쪽지를 보낸 이유는, 지난 며칠 동안 여기저기 들쑤시고 돌아다닌 탓이리라. 최대한 조용히 움직인다고 했지만, 크렘보르의 아가씨가 이 일에 관여하고 있다면 그런 어설픈 노력 따위가 대수겠는가.
'입을 막으려는 걸까.'
카인은 그가 실비아 크렘보르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실비아 크렘보르는 솔롬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를 두고 입 놀리기 좋아하는 이들은 온갖 추측을 쏟아냈지만, 카인은 그것을 그녀의 성미 때문이라 짐작했다. 보통의 여인들과 아예 관심사 자체가 다르기에, 수다나 떨면서 보내는 시간을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이리라.
'평범한 여인들이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는 바꿔 말하면, 평범한 여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원할 수도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생각해보면 취미부터가 범상치 않다. 사냥? 어지간히 기가 센 사내들도 즐기기 쉽지 않은 취미다. 게다가 들리는 얘기로는 그 취미가 아주 오래됐다고 하니, 이는 그녀의 타고난 기질 자체가 그러하다는 뜻.
'그러고 보니, 둘의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
보리스 크렘보르를 가까이서 따라다닐 때, 자연스럽게 그가 하는 이야기나 보이는 기색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카인은 아주 가끔,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보리스 크레보르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친은 물론, 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도 말이다.
'어쩌면.'
수중의 재물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당연하나, 솔롬의 가장 고귀한 여인이 이런 일에 나서서까지 할 만한 일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너무 앞서가는 생각인가.'
쪽지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경고라면 간단하게 끝내도 될 일을, 이렇게 번잡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직접 전할 내용이 있다는 뜻이며, 그 내용은 이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 중요한 것일 터다.
카인은 어쩌면, 실비아 크렘보르가 자신을 그녀의 대리인으로 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크렘보르의 영애가 직접 처리하기에는 다소 지저분한 일이고, 그녀는 되도록 자신은 한 발자국 뒤로 빠진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기를 원할 터였다.
또한, 실비아 크렘보르라면 자신이 그녀의 오라비와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을 내미는 데 주저함도 없겠지.
***
"뭔가 짐작하는 얼굴이로군."
처음 보는 여인, 하지만 당당한 태도나 풍기는 기운만 봐도 상당한 수련을 한 무인임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이면서 상당한 수준의 무인. 그런 여인이 따르는 이가 누구일까. 카인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며 대꾸했다.
"그렇소."
"그래?"
"하지만, 직접 말씀해주시겠소? 아가씨께서 어찌 이 사람을……."
"거기까지. 눈치가 빠른 것은 알겠지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은 구분하도록."
알고 있다. 알면서도 내지른 것이다. 쓸모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요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더군. 어디까지 알고 있나?"
"오젠을 대체할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개척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정도요."
"좋아. 이미 다 알고 있으니 길게 말할 필요도 없겠군. 아가씨를 위해 일하겠나?"
"나는 이미 보리스 공자님께 받은 은혜가 있고, 그분을 위해 일하고 있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재무관으로서, 이번 일에 아가씨를 위해 재주를 발휘하라는 뜻이다."
카인은 은밀히 여인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불쾌하다는 듯 찌푸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