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화
테리브란으로 향했던 니클라스가 솔롬으로 돌아왔다.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먼 길을 움직이는 것은 더더욱.
"예상했던 대로, 어지간히도 시끄럽더군요. 명분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게 되었습니다. 대전회의는 자존심과 힘겨루기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멕시스는?"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신분이 신분인지라, 감시가 심한듯하더군요."
로든 멕시스라고 했던가. 멕시스의 후계자이자 타라냐드의 후계자인 그는 현재 테리브란에 머물고 있다. 전선에 나가 있는 부친을 대신하여 대전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는데, 말이 그렇지 실상은 볼모였다. 때문에 그는 멕시스의 후계자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신변에 제약이 많았다. 물론 그 누구라도 그에게 강압적으로 굴 수는 없지만, 로든 멕시스는 눈치껏 자신을 낮추면서 볼모로서의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교감은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쪽도 적잖이 당황했고, 애써 감추려 하기는 했지만… 꽤 화가 난 것 같더군요."
왜 안 그렇겠는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을 벌이고, 그 뒤처리는 떠넘기다 한 셈이니 멕시스로서는 화가 안 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장군께서 일러주신 대로 전했습니다. 묵과할 수 없는 모욕이었고, 참을 이유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설명을 바라면 설명을 해주면 된다. 상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수습은 자신들이 맡을 테니, 가만히만 있어 달라더군요."
일을 벌이는 쪽 따로, 수습하는 쪽 따로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우습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중앙 귀족 세력과 대립하는, 소위 지방 귀족이라고 하는 이들의 대표였다. 다른 이들이받들기도 했으나, 스스로 자처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는 의무가 있다. 함께하는 이들을 실망케 하지 않을 의무가.
"도시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쟁이 끝난 줄 아는 자들도 있더군요."
바라눔 트라소프가 죽었으니 전쟁이 더 이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대부분 무지한 백성들의 순진한 생각이지만, 그들이 보는 세상은 본래 그렇게 간단명료하다.
"대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지간한 상인들조차도."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테리브란의 시민들, 데이븐랏지의 백성들만 그럴까. 그럴 리가. 오젠이든 판니른이든 다 똑같다. 내일만, 그것도 가끔만 생각하는 이들은 좀처럼 시야를 넓게 두는 법을 모른다. 그 어떤 심각한 문제라고 해도, 자신들의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무지의 소치일까, 적응의 결과일까. 당장 판니른과 오젠의 사이가 경직되면서 상행이 줄어들고, 물류의 흐름이 막히기 시작했음에도 그러한 변화를 눈치채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그 변화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아는 이들은 더더욱 드물고, 그들은 실로 어리석고, 나약하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극소수지만 귀를 열고, 눈을 부릅뜨며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피 냄새를 맡은 승냥이처럼, 돈과 권력의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자들이.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
토어릭이었다면, 이쯤에서 그의 의견을 물었을 것이다. 상인들이 바라는 것은 분명하니,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앞에서 먹이를 흔들며, 복종과 성의를 유도하는 것이 전형적인 힘 있는 귀족의 수완이니까.
하지만 니클라스는 토어릭과 다르고, 다른 생각 많은 이들과도 다르다. 꽤 오랫동안 관리 생활을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군인이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그는 계산과 거리가 멀다.
"장군. 그럼 소관은 이만."
"그래. 고생했다. 며칠 푹 쉬도록."
군터는 니클라스의 눈 밑이 거뭇하고, 피부가 푸석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솔롬에서 테리브란까지 부지런히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 수준까지 단련한 무인인 니클라스가 피로를 숨기지 못하는 것은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곧, 군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너도 나이를 먹은 게로군.'
새삼스럽지만, 니클라스도 적은 나이가 아니다. 아직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는 아니나, 직접 말을 타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다닐 정도인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살라스나 할렌보다도 나이가 많았으니까.
"……."
니클라스가 물러가고, 군터는 집무실 구석에 방치 되다시피 놓여 있던 자그마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이 자그마한 유리에 비쳐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군터는 은밀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이게 나인가?'
자주 보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얼굴도 못 알아볼까. 그가 느낀 위화감은 그보다 조금 더 깊숙한 곳에서 기인했다.
나이를 먹었으면 피부가 힘을 잃고, 주름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 보이는 얼굴은 흉터는 있을지언정 주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흰 수염이나 흰 머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와 보통 인간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곧 알게 될 거야.'
헤이모라에서 줄카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말인데, 이제는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하나둘씩, 네가 이름을 불렀던 이들이 네 곁을 떠나가겠지. 넌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 외면할 수도 없지. 보게 될 거고, 받아들이게 될 거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너라는 인간은 조금씩 무너지고, 무뎌지게 될 거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줄카나, 그의 다른 동료들은 그렇게 무너지고 무뎌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들이 그랬다고 해서, 자신도 꼭 그리되리라는 법은 없다.
"장군. 토어릭 공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라 해라."
조금은 인내심을 발휘할 줄 알았는데, 너무 무리한 기대였을까. 토어릭은 굳은 것 같기도 하고, 상기된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한 채 집무실로 들어섰다.
***
"돈은 중요하지.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천민 무지렁이나 지체 높으신 귀족 나리나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아무것도."
동료, 브라그의 우쭐거리는 말에 카인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이들은 많으니,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다.
"맞는 말이네. 결국, 모든 것은 돈이지. 나라를 칠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 한들, 그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는가? 바꿔말하면, 인망과 실력을 겸비했다고 해도 재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지."
"내 말이 그 말이네. 저 꼿꼿한 군부 인사들 좀 보게나. 평소에는 그렇게도 잘난 척하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다가도 월초만 되면 아쉬운 소리를 하러 제 발로 찾아오잖나."
같은 처지라서 그런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들이 아주 술술 흘러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솔롬의 관료들을 골고루 씹어가며 점점 얼굴을 붉혔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보고 있자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한편으로 카인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가 재무관으로 일하면서 느낀 점은, 돈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과 그 중요한 것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든지 치열하고 치사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시의 예산은 한정적이다. 그 한정된 예산을 여러 부처에서 나눠 먹어야 했는데, 그 나누기를 집행하는 곳이 바로 재무부였다. 바로 거기서 재무관들의 고충이 시작됐다.
"이러니저러니,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우는소리를 해대지. 그런데 그 얼간이들은, 그렇게 울어대는 게 자기들뿐이라고 생각하나 봐."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다 알고 있겠지. 알면서도 자기 사정만 중요한 거야."
저마다 더 많은 예산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그저 재무부에 역정을 토해낼 뿐이니, 사이에 끼인 재무부만 죽어 나갔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여럿인데, 상술했듯 예산은 한정적이었으니까.
"한번은 웃으려고 하는데, 입꼬리가 안 움직이더라고, 큰일 났다 싶었지."
"다들 한 번씩은 하는 경험 아닌가."
"그래. 누구나 하는 경험이지.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몰랐으니까 말이네."
재무관으로 일하다 보면 늘어나는 것은 거짓말과 연기뿐이다. 상대의 요구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는 법 따위는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욕을 덜 먹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짓말과 연기가 필수였다.
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는 귀족이라는 허울이 있었기에 항의자들이 정도 이상으로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곤욕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다른 평민 동료들의 고충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카인이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비슷하게 고생했으나, 그가 겪은 고생은 지금 떠들어대고 있는 동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고역이로군.'
자신이 저들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위로가 아닌 기만이다. 저들도 알고 있기에, 말 한마디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리라.
다만, 홀로 동떨어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고역은 고역이었다. 전에도, 그전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자리를 피웠던 탓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자네들, 그 소문은 들었나?"
브라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소문 말인가?"
"난 알 것 같군. 오젠과의 교역 축소 말인가?"
"아아. 그거라면 들었지. 그런데 그게 왜?"
"쯧쯧. 명색이 재무관이라는 친구가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오젠을 통해 들여오는 품목이 한둘인가? 렌은 아직도 엉망이니, 내륙의 물건을 들여올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오젠을 경유하는 상단들을 통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렇지."
"그런데 이번 일로 오젠이 주 경계의 방비를 강화하고, 주법(州法)을 개정한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말이 주법이지, 관세법일 것이 뻔해. 자연히 파니른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겠지."
"그렇다면 큰일이로군."
"큰일? 글쎄. 아무리 오젠의 귀족들이 열이 올랐다지만, 모든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는 못할 걸세. 백성들의 필수품목을 가지고 장난질은 못 치겠지. 그러니 자연히 대상은 귀족들의 사치품이 아닐까 싶은데."
"으음. 그렇겠군. 자네 말이 일리가 있어."
"그래서 판니른의 눈치 빠른 귀족들은 벌써 다급해졌을 걸세. 내일 먹을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내일 마실 차 한잔은 있어야 하는 것이 귀족들 아닌가."
브라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수요는 확실한데, 물건을 들여오기가 힘든 상황이지. 그래서일까? 몇몇 상단들이 새로운 상로를 개척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