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화
"눈들이 늘었습니다."
"그래?"
불평하는 투는 아니었으나, 유쾌하지 않은 심사가 느껴졌다. 그와 할렌의 영혼은 가느다란 끈으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할렌의 마음을 느끼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짜증 나나?"
알면서도 묻는다. 이런 허식 또한 인간다움이다. 그렇기에 간단한 대화에서도 습관처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군터는 이런 노력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들어서, 그리고 점점 경험하면서 이해하고 있었다.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누가 반기겠습니까."
하베르트와의 문제를, 과격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무지막지하게 해결해버린 할렌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는 그의 이름은 이미 솔롬의 정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전에도 성주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이가 있었지만, 성주와 동향 출신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할렌이라는, 롬바드라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모두가 이번 일로 똑똑히 알게 되었다. 이제 모두가 그를 예의주시하게 되었고, 할렌은 그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제가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하군요."
"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저절로 들리더군요."
성주 직속 친위대라고 해서 바깥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인간관계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것 정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렌은 자신을 두고 온갖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실은 그것이 감히 성주를 대상으로는 입을 놀릴 수 없어, 그 대용으로 자신을 씹어댈 뿐이라는 것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우습고, 짜증 날 뿐입니다."
"우습고 짜증? 어째서지?"
"스스로 지식인인 척하는 놈들은, 솔롬에서 장군의 아래에 있으면서도 테리브란에 있는 놈들을 대변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는 게지. 방식의 차이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장군은 테리브란에 있는, 엉덩이만 무거운 놈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황자도 장군을 존중해야 할 터인데,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사소한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아대다니."
군터는 어느새 살짝 일그러진 할렌의 얼굴을 보았다. 새로운 얼굴은 이제 익숙해졌다. 가면을 썼든, 벗었든, 반면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변해버린 할렌의 성정이었다. 할렌은 이전에도 충분히 감정적인 사내였으나, 새로운 몸을 얻은 뒤로는 확연히 달라졌다. 뭐랄까, 감정적인 것은 그대로지만 그 변화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까.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친숙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내게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 모페이브에게만 은밀히 물었고, 모페이 브가 고심 끝에 낸 답은 그것이었다. 영혼이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 할렌의 영혼이 그에게 종속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
다만 그것도 그저 추측일 뿐.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 영향이 앞으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는 모페이 브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로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눈에 밟히더군요."
할렌은 담담히 고백했다. 스스로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자아가 안정되지 않은 탓에 머리가 쓸데없이 복잡해졌다고 여기며 무시했던 것들, 속으로만 삭였던 것들을 토해냈다.
새롭게 눈을 뜬 그가 보기에 이 도시는, 아니 이 세상은 너무도 불합리했다.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넘쳐났다.
어째서 공 있는 자보다 공 없는 자의 목소리가 더 크단 말인가. 가문? 권력? 재물? 보잘것없는 것을 쥐고 대단한 뭐라도 된 양 설쳐대는 놈들이 너무나 많다.
착각에 빠져 행세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분수도 모르는 놈들이 그래서는 안 될 자의 앞에서까지 오만 하게 군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충성심?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당연히 할렌에게 있어 군터는 충성해야 하는 대상이었으나, 그보다 존경과 경외가 앞섰다. 세상 모르던 시절부터 그를 보며 따라왔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와 함께했다.
'누구도 이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 황자조차도.'
심지어 제국민들이 신으로 섬기기까지 한다는 군주, 줄카조차 군터를 존중한다. 그런데 별 잡스러운 것들이 뭐라도 된 양…….
바이더 하베르트인가 하는 놈의 멱살을 쥐고, 놈을 내팽개쳤던 것은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그간 쌓여온 분노가 놈의 반질거리는 면상을 보고 폭발한 결과였다.
실수라면 실수였지만, 할렌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본보기를 보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장군. 어째서 참으십니까?"
할렌의 진지한 물음에 군터가 피식 웃었다. 물음이 우스워서가 아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꺼움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그가 할렌을 이해하듯, 할렌 역시 그를 이해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새롭게 눈을 뜬 뒤로는 그랬다.
"참지 않으면?"
"장군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머저리들도 장군께 마땅한 존중을 보일 것입니다."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어째서……."
할렌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까지 살짝 높아졌다. 애써 억눌렀던 마르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본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새장이다. 아니, 목장인가. 뭐, 아무래도 좋아."
예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할렌이 말하는 불합리를 조금씩 인식하게 된 것이.
이 세상은 자연스럽지 않다. 어떤 이들은 자연스러운 것을 무질서니, 야만이니 하며 비하한다. 사라져야 할 것으로 말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위에 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다. 힘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질서 그 자체다.
그런데, 이 세상은 뭔가 비틀렸다. 거짓된 질서가 모든 것을 옭아맨다. 국가? 법? 신분?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포장한다.
이 불합리가 어째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했을 때, 군터는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었다.
황제.
자그마한 도시 국가를 세계 제일의 대제국으로 키워낸 초인.
카라누르를 이룬 모든 것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거짓된 질서조차 그의 손안에서 만들어진 것일 터.
분명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였다. 그러니 그가 만든 피조물이 그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후에 만난 줄카는 황제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가 황제를 따랐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군터는 줄카를 통해 황제를 짐작했고, 그간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고민 아닌 고민을 털어낼 수 있었다.
황제. 카라누르 제국의 황제. 하지만 그는 이제 없다. 그리고, 그보다 한참 못한 자식들이 단지 그 피와 이름을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솔롬의 성주, 판니른의 방위군단장. 누군가는 갖고 싶어 안달이 날 이름들이지만, 군터는 이런 것들에 욕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울타리 안에 놓인 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탁 트인 초원에 널리고 널린 잡초가 낫다.
할렌은 지금, 테리브란에 있는 머저리들이 거슬린다고 했다. 하지만 군터는 할렌과 달랐다. 그는 테리브란의 머저리들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슬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보리스. 녀석이 준비를 마치기를."
다만 참고 있을 뿐이다. 알기 때문이다. 그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녀석들은 작고 약해서, 울타리 밖보다는 안이 더 어울린다. 애석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태어나고, 자라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니.
"그때까지다."
책임감? 아니면 부성애? 아니면 스스로를 기만하며, 억지로 없는 감정을 붙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습니까. 보리스 공자가 준비되면, 그 후에는."
"글쎄. 그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아직은 모르겠군."
"이해했습니다."
할렌의 목소리가 다시 나직해졌다. 그는 차가운 가면을 한 손에 쥐고,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보리스 공자는 장군의 아들이지만, 장군과 닮지 않았습니다. 장군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합니다. 이번 일로 확실히 알겠더군요."
"그런가."
"그런 보리스 공자가, 장군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룰수 있을지요."
"글쎄.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다."
***
보리스 크렘보르를 따르는 숱한 이들 중, 로우렌의 위치는 상당히 독특했다.
물론 그는 보리스의 심복 중 심복이었고, 공식적인지위 역시 낮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 외에, 로우렌의 위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보리스와의 개인적인 친분이었다. 그야말로 젖살이 아직 빠지지도 않았을 때부터 함께 어울려온 사이로서, 그라모트와 로우렌 형제가 보리스와 쌓은 관계는 다른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만 떨쳐버리시지요."
"아직도 그 소리더냐?"
"다른 이의 눈은 속여도, 제 눈은 못 속이십니다."
"남의 속을 캐는 악취미는 언제쯤 버릴 테냐."
"캐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데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이 두 눈을 파버리기라도 할까요?"
보리스가 피식 웃더니 뒤로 몸을 기댔다.
"장군은 장군이고, 공자님은 공자님입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그리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생각이 다른 것뿐입니다."
"……."
"줄곧 말씀드렸지요. 공자님이 아무리 노력하셔도 공자님은 공자님입니다. 장군이 될 수는 없지요."
자식은 부모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식은 부모를 닮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깨닫는다. 닮을 수는 있어도,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이제는 그만 그늘에서 벗어나시지요. 그편이 공자님을 위해서도, 장군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어떻게 그리 단언하지?"
"그건 제가 경험자이기 때문이지요.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