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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9화 (839/1,064)

839화

테리브란 조정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모두가 입이 근질근질 하지만 먼저 나설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물꼬를 튼 이는 토리우스 자하브였다. 리바스트라를 주름잡는 자하브 가문의 새로운 가주는 젊은이(상대적으로)답게 정력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베르트가문이 비록 당대에 이르러 세가 많이 기울었다고는 하나, 역사가 깊은 귀족 가문입니다. 그들의 역사와 자긍심은 누군가 힘이 있다 하여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귀족으로서, 귀족의 권위가 처절하게 짓밟힌 이 사태를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테리브란의 조정 회의에 참석한 인물들은 대다수가 귀족이었다. 평민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상석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말석에나 간신히 자리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크렘보르 장군의 처사가 너무 심했소. 듣자 하니 직접 간 것도 아니고, 평민 수하를 보내 모욕을 줬다는 군."

"허어!"

토리우스 자하브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던 중. 서른 중반 즈음되어 보이는 말쑥한 인상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지요. 크렘보르 장군이 하베르트 가문에 심한 모욕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과연 어느 쪽입니까?"

토리우스 자하브가 사내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 일을 그런 식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소."

"왜 그렇습니까? 저는 오히려, 크렘보르 장군이 직접 바이더 하베르트를 찾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라?"

"숱한 피를 손에 묻히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분입니다. 스스로 나서는 일은 드물다고는 하나, 그 성미가 유순할 리 있겠습니까."

"그걸 변호라고 하는 건가?"

"같은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반응은 제각각인 법입니다. 변호? 글쎄요. 저는 단지 자하브 공을 비롯한 여러 대신 분들은 크렘보르 장군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손에 피를 묻히며 살아온 자가 바라보는 세상과, 잉크를 묻히며 살아온 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이 조금 모욕적으로 들리는데."

"그럴 리가요. 으음. 하지만 금방 말씀드렸듯, 사람의 반응이란 제각각이니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 점은 사과드리지요."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젊은이들 간의 설전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심 조소했다. 자하브의 젊은 가주가 의욕만 앞세우다가 우스운 꼴을 당하지 않았나. 말문이 막혔을 뿐 아니라, 얼굴까지 살짝 붉어져서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저런 한심한 꼴을 보고 있으면 한 손 거들려던 사람마저 주춤하게 마련.

'자하브는 어리석었고, 멕시스는 영악했군.'

토리우스 자하브는 평생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젊은이다. 능력은 꽤 출중하다는 평이지만, 경험이 너무 적다. 아니, 적다기보다는 좁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성공하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길만을 걸어온 그는, 이제껏 적수다운 적수와 싸워본 경험이 전무 하다시피할 터. 그것이 바로 지금처럼 우스운 꼴이 된 이유일 것이다.

반면, 멕시스는 어떠한가.

로든 멕시스, 멕시스의 후계자임에도 테리브란에서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로 지내고 있다. 일반적이라면 의기소침해 할만도 한데, 그는 테리브란에 도착한 뒤로 줄곧 영리하게 처신해오고 있었다. 그와 그의 가문에게 호의, 내지는 호기심을 가진 이들과 조용히 어울리면서도 항시 몸가짐에 신경 써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가진 이들과 척을 지지 않았다. 이게 말이야 쉽지, 매 순간 그렇게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특히 타라냐드에서 아쉬울 것 없이, 마치 왕자처럼 행세해왔을 멕시스의 후계자가 말이다.

"……하여, 일방적으로 잘잘못을 가릴 주제가 못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로든 멕시스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적당히 빠져나갔다. 토리우스 자하브의 주장에 반하기는 했으나, 그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멕시스가 크렘보르를 감싸고 돌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하고 있던 것. 호방하게 나선 자하브의 신임 가주만 조금 꼴이 우습게 됐으나,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반대편에 선 이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개중 일부는 명분에 기반한,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을 했으나, 대부분은 얼간이처럼 이미 나온 말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대결이라도 하자는 듯이.

형편없고, 유치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었다. 그럴싸한 무언가를 주장하는 듯, 입으로는 명분을 따져대지만 결국 그 명분이라는 것은 포장에 불과하다. 포장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 이들의 눈길을 잠시 붙들 수는 있으나, 그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다. 비단에 싸인 오물과 거적에 싸인 보물이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보고만 있으실 참입니까."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수하가 몸을 숙이고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지 않습니까."

"떠들어대는 자리에서 떠들어대는데,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이 자리에서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대는 것은 무의미하다. 포장보다 내용물이 중요하다 했던가. 하지만 사실 명분이고 뭐고, 모두 다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포장도, 내용물도 아니다.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한동안은 이렇게 갈 거다. 빠르게 결정이 날 일이 아니지. 체면 문제도 있거니와, 어느 쪽도 그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다툼이라는 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애매모호 했던 여러 가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적과 아군. 그리고 힘의 우열.

다뤄야 할 상대가 있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짓는다. 도와줄 이를 찾고, 기댈 수 있는 이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가 나뉘게 된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라면 그런 구조가 더 분명해질 테고, 로든 멕시스는 지금쯤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을 터다. 저 시끄러운 자들이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

'어려서 그런가. 아직은 미숙하군.'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조금 더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해서 달라질게 무엇인가. 얻는 거라곤 기껏해야 알량한 자기만족, 고양감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글쎄. 그게 그리 대단한 것인가?

'말을 움직여야 할 자가 스스로 말이 되다니. 우스운 일이지.'

판에 올라가는 대신 판 위에 올라가 있는 말들을 움직인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뜻대로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자하브의 젊은 가주는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반면, 로든 멕시스는 다르다. 부친에게서 언질을 받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두 젊은이가 불을 지폈다. 노회한 너구리들이 뒤로 빠져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과 다르게, 아주 정력적으로,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문득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불을 지핀 당사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군.'

점점 시끄러워지는 대전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저 멀리 동쪽에 있을 단순한 무부가 떠올라 잠깐이지만 이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레온은 드물게 흥분해 있었다. 그래 봐야 목소리가 조금 커진 정도지만, 이마저도 레온에게 있어서는 드문 일이었다.

"대단하지. 아니, 대단하다기보다…무지막지해."

"무지막지해요?"

레온이 되묻자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자신을 노리는 적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거침없지 않으냐."

"그래서 대단하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행동거지는 단순히 대범함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아라. 테리브란의 대귀족이고 뭐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아무리 세력 싸움을 염두에 뒀다 해도 너무나 과격하다. 위험부담이 커도 너무 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는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제 말은 그러니까, 같은 귀족인데 어떻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여쭙는 겁니다."

"글쎄."

카인은 모르겠다는 듯 얼버무렸다. 하지만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처음 성주를 봤을 때부터 그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주 강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자들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이질감. 그 두려우면서도 꺼림칙한 감각이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어찌 착각일 수 있겠는가.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요즘 종종 생각이 다른 곳에 가 계시는 듯한데, 새로운 일이 꽤 고된 모양입니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뭐, 확실히 이전보다는 일이 늘긴 했지. 자랑은 아니다만, 이래 봬도 꽤 인정받고 있다."

"호오. 그렇습니까?"

하지 않아도 될, 다른 사람의 앞에서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가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이런 유치한 자기 자랑이라니? 하지만 이 듬직한 의동생 앞에 서만은 입에 달아둔 자물쇠가 지금처럼 종종 풀리곤 했다.

"재무관이라는 일이, 결국은 돈을 만지는 일 아니더냐."

"그렇지요."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이 관의 업무라는 것도 결국은 다 돈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냐? 돈이 있어야 업무를 진행할 수 있지. 관리들의 녹봉도 그렇고, 공무를 수행하려 해도 다 돈이 들어간다. 군대야 말할 것도 없고."

"맞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다루는 무구 하나하나가 다 돈이지요."

"그래. 그러니 이 재무관이라는 자리가……."

카인이 자랑 아닌 듯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레온은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인은 어느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의 눈빛에, 소리 없이 안개가 끼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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