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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8화 (838/1,064)

838화

"사람이라는 동물이 말이야. 참 한결같지 않은가."

"예?"

"그렇잖은가. 그것들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해지면, 꼭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단 말이지. 개중 일부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하고."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백성을 다스리는 요령을 말할 때 꼭 나오는 말이 있어. 배를 굶게 하지는 말되, 절대 배부르게 하지는 말라는 것이지."

"알 것 같군요."

본다인에서 발생한 자그마한 민란은, 본래라면 신경도 쓰지 않고 넘어갈 문제였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그곳은 현재 북부에서 가장 평화롭다고 봐도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테리브란의 유력자 중 그 사건 자체에 신경 쓰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이들 중에서는 민란의 원인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본다인의 백성들은 저 서쪽 땅에서 얼마나 많은 비명과 피가 흐르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약간의 불편함에도 쉽게 지치고, 화를 낸다.

"너그러운 것과 무른 것은 구분해야 하는데, 그 정도 분간도 못 하는 건가."

"자신을 아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아니. 아니지."

"예?"

"자신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네. 다만 알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지. 아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나."

"듣고 보니 그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온갖 이유를 대면서 애써 외면하지. 신분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어. 누구나 연약하고, 비겁한 부분이 있는 것이야."

다이시리 제레이스의 시선이 움직였다. 탁상 중앙에는 크렘보르와 하베르트 간의 분쟁(그것을 분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에 대한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지금은 군인의 시대야. 모든 것을 창칼로 싸워 쟁취해야 하지. 하지만 그들을 존중하는 것과, 행패를 용인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데 말이야."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내 앞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아도 되네."

"……."

정곡을 찔렸음인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실소하며 한 장짜리 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전선에 나가 있는 황자도 이미 한참 전에 소식을 접했을 터. 그런데도 아직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설마 이 사건이 너무도 하찮아서 살필 필요도 없다는 것은 아닐 테니, 생각이 많다는 뜻 아니겠는가.

황자가 군부 인사들에 대해 적잖이 배려해주고 있다는 거야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군터 크렘보르역시, 대단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한 주의 방위군단장까지 올랐다. 그뿐인가? 크렘보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하사받지 않았나.

세운 공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는 자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단지 그것만이 아님을 오래전부터 직감해왔다.

'그자는 특별하다.'

뭐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한 전투에서 백 명도 넘게 베어 넘긴다는 무공? 불가능해 보이는 승리를 일궈내는 군재? 물론 대단한 능력이지만, 정말 그게 전부 일까?

'이번 일까지 묻고 넘어간다면.'

아직 조정에서 제대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여론이 잠잠하기 때문이 아니다. 전선에 가 있는 황자의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가주님."

"음?"

"어찌하실 요량인지요."

이 말을 입 밖에 내기까지 많이도 망설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의 용기와 결단력을 높이 샀다.

"글쎄. 어찌해야 할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테리브란 정계의 거두다. 그렇기에 그의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이제껏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크게 망설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그의 눈에는 대부분 명확하게 답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음 급한 자들이 벌써 움직이고 있겠군."

"그럴 것입니다."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뭉쳤다지만, 커다란 대의 아래 놓인 이들의 생각은 제각각이다. 그들 중에는 한데 뭉친 귀족들의 머리가 되고 싶은 자들도 있다. 그들은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황자의 외척이라는 신분 하나로 지금의 자리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다 이시리 제레이스가 그의 무능을 증명하는 순간을.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들의 음흉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

황자의 외척이라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외척이라서가 아니다. 외척이기에, 황자의 속내를 누구보다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힘 있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지 덕에 황자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로 오만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착각이다.

'어차피 이 나라는 트라소프의 것이다.'

황제가 사라졌으나, 그의 피는 남아있다. 세상은 트라소프가 아닌 이들이 군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즉, 귀족이든 뭐든 결국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면 트라소프의 이름 아래 기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황자와 귀족들의 관계는, 굳이 따지자면 상호 의존적이라고 봐야 한다. 처음 기댈 곳을 찾을 때야 황자 쪽이 아쉬운 처지였던 것이 맞으나, 그로부터 시간이 적잖이 지나지 않았나.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는 얼간이들이야 아직도 똑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더 기다리겠다."

"예."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같은 말을 해줄 다른 이들이 있는데, 굳이 먼저 입을 열 필요는 없지 않겠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에게 양보해주는 것도 높은 곳에 자리한 자가 베풀 수 있는 너그러움일 것이다.

***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서신이 왔다. 마지막으로 교류했던 것이 언제인지 떠올리기 위해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제레이스 가문과 사이가 소원해진 뒤로 연락이 끊겼었으니까.

기억 속의 사이주 제레이스는 호방한 인사였고, 허식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 기질은 여전한지, 서신의 내용은 간결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제외하면 더욱 그랬다.

"제레이스는 일단 뒤로 빠져있을 모양입니다."

군터가 건넨 서신을 읽은 후, 토어릭이 말했다.

"다행이군요."

"다행? 어차피 등을 떠밀리게 되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앞장서서 나설 생각은 없다는 뜻 아닙니까. 시간을 번 셈이지요."

"글쎄. 그게 무슨 의미 모르겠군."

"장군, 장군께서 조정의 목소리만 큰 작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심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자들에 의해 정국이 움직인다는 것만은 인정하셔야 합니다."

"틀렸다."

"예?"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황자다. 테리브란에 있는 그놈들은, 그저 황자의 얼굴을 보고 떠들어댈 수 있는 놈들일 뿐이지."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만이 황자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니."

군터는 단호하게 토어릭의 말을 부정했다.

"황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다. 그리고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지."

그래. 그는 황제가 되고자 한다. 황제가 되어서 뭘 하고자 하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리비암에 있다는 빛나는 옥좌뿐이다. 전쟁을 치르는 것도, 얼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하는 것도 모두 그것을 위해서일 터.

"귀족들의 원성을 사더라도 장군을 택하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거다. 이런 말씀입니까?"

토어릭은 군터를 존경했다. 가까이서 섬겨왔기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존경심에 눈이 멀지는 않았다.

"나만이 아니지."

"장군께서 말씀하시는 그들 역시 귀족입니다."

"얼간이들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런 놈들은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자이드라 멕시스를 필두로 한, 새로이 자콥 트라소프의 진영에 들어온 귀족들은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대표로 한 기존 귀족들과 지금껏 불편한 동행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 불안한 균형이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계기를 마련한 것뿐이다. 누군가는 할 일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그게 어째서 장군이어야 한단 말입니까.'

복잡한 정치적 계산 같은 것은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앞서가는 자가 더 모진 바람을 맞기 마련이라는 것만은 안다. 이제 귀족이 되었고, 한 주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까지 올랐음에도 어찌 이리도 무모하단 말인가.

'뭐, 그게 장군답긴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만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물들었었나 보군.'

그의 주인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이 변했기에, 당연히 주인 역시 변했으리라 혼자 결론짓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싸우실 생각입니까."

"아니,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을 뿐이다."

"알겠습니다.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머리가 굳었던 모양입니다."

토어릭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군터도 피식 웃었다.

***

"어쩔 셈인가?"

"전하께서 뜻하신 바에 따르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나 듣자고 부른 것이 아니네."

한 방면의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자를 불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필요한 법. 구실이야 소강상태를 맞이 하고 있는 전황에 대한 논의지만, 본론이 무엇인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명분은 양쪽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으로는 달가워하고 있겠군."

"달가울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다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에 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작게 코웃음 쳤다.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정말이지 뻔뻔한 작자가 아닌가.

"이번 일. 그대가 획책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신이 꾀를 내는 것을 즐기는 편이기는 하나, 위험을 자초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좋아."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자꾸 심술을 부리고 싶은 것은, 이 늙은 여우가 영 괘씸해서일까.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해보게."

"힘을 실어주시겠습니까?"

"지켜보기는 하겠네. 끝이 어떻게 날지는 자네들에게 달렸지."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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