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화
억류되었던 상인들은 모두 풀려났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다.
롬바드를 처벌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미 언질을 들은 탓이다. 롬바드의 무모한 행동은 성주의 허락을, 아니 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도대체가……."
로우렌이 헛웃음을 지은 채 머리를 이마를 두드렸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야 뻔하지 않은가. 몰락했다고는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게다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뒷배까지 두고 있는 귀족을, 평민이 그 많은 병사들 앞에서 겁박하였으니…….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습니다."
"그렇겠지."
"장군께서는 무슨 생각이시랍니까?"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 당연하지만 즐거워서 웃는 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여차하면 군대라도 움직일 생각일까? 설마?
"모르겠다."
"예?"
"모르겠단 말이다. 그분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내려놓은 듯, 힘 빠진 보리스의 목소리에 로우렌은 기어이 실소했다.
"기회만 노리던 승냥이들이 득달같이, 무리 지어서 달려들 겁니다."
"그래. 그렇게 말씀드렸지. 허나 개의치 않으시더군."
"개의치 않아요? 정말 칼부림이라도 벌일 생각이시랍니까?"
"그럴지도."
"……."
성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거나, 그 속내를 짐작이라도 하는 이는 없다. 솔롬의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명이 내려오면 따르고, 그러면서 의중을 짐작할 뿐.
이 도시와 군대의 주인은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행사가 극히 드물었다. 보이는 게 많으면 헤아리기도 쉬울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 이따금 이렇게 돌발 행동을 벌일 때마다 밑에 사람들은 피가 말랐다.
'도대체가…….'
로우렌은 차마 입 밖으로는 낼 수 없어 속으로만 한 탄했다.
'이 많은 사람의 위에 있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만인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면, 자신의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만 명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이 속을 알 수 없으며 때로는 변덕스럽기까지 한 성주는 그런 자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찌 이리 무책임하게 폭주할 수 있었겠나.
'롬바드라는 놈도 미친놈이지만, 성주는 그 이상이야.'
어쩌면 성주는 오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늘 승리와 성공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랐으니,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는 이들이 모두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일까. 이런 사고를 쳐도, 결국 자신을 총애하는 황자가 어떻게든 중재해주리라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나았겠군. 빌어먹을.'
그간 보아온 성주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런 얄팍한 계산 따위에 의존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처세술의 '처'자도 모르는 사람. 그것이 로우렌이 생각하는 성주였다.
"그래서, 아무런 말씀도 못 들으셨습니까?"
"곧 하잘로 가신다더군."
"지금쯤이면 총독도 알았겠군요."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아프겠지."
머리만 아플까. 속도 타들어 가고 있을 터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총독 취임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는데,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이런 사고가 터졌으니 말이다.
***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총독이 곤란할 것은 없소."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라고 한 마디 시원하게 외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운바소르 아실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군터 크렘보르에게 싫은 소리 하나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위세가 자신 이상이라서?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권세나 여타 다른 사정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는 군터 크렘보르를 대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늘 가라앉아있는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무거운 돌덩이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수백, 수천 명을 직접 죽인 군인이기 때문일까? 아니, 아니다. 그는 그런 피 냄새에 위축되는 소심한 사내가 아니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대관절, 일을 저지른 자가 뭐 이리 태연하단 말인가. 이래서야 누가 아쉬워서 온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장군에게는 적이 많지요. 여러 곳에서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테리브란에서도 물론 그럴 테고요. 그렇게 되면 전하도 장군을 무작정 두둔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렇습니까?"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 물은 것인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쯤 되니 머리가 멍해졌다.
"하베르트인지 뭔지 하는 놈은 의도적으로 나를 욕보였지. 그건 도발이었소. 나는 그에 응해주었을 뿐이고."
"바이더 하베르트가 평민 군관에게 멱살 잡히는 것을 수백이 넘는 병사들이 지켜보았습니다."
"말했듯, 놈이 나를 욕보였소. 그것을 갚아주었을 뿐이오."
"그렇다 한들, 과하셨습니다."
"그런가? 나는 그리 생각지 않소. 어쨌거나 죽지 않았고, 크게 몸이 상하지도 않았으니까."
운바소르 아실은 어느새 자신의 입이 벌어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크게 충격받았다.
지금 이 말이 진심인가?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고? 만약 그런 것이라면, 도대체 이자는 귀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귀족이 된 자라서 귀족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는 걸까?
"…장군.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남의 생각 따위는 중요치 않소."
운바소르 아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사내는 터무니없이 오만하다. 어딘가 비틀려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상 그 어느 귀족도 이자만큼 오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군터 크렘보르는 누구보다도 귀족스러웠다.
"장군의 적, 아니 이 사태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장군에게 책임을 묻고자 할 겁니다."
"내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그자들이 아니오."
"타협할 생각은 없다. 그리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내가 총독을 만나러 온 것은 그런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조언을 건네기 위함이지."
"조언이요?"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한 발자국 물러나 있으시오."
"……."
좋게 들으면 총독으로 막 취임한 자신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 하지요."
"좋소. 그럼, 할 말은 다 전했으니 이만 일어나리다."
"벌써 말입니까? 오랜만에 오셨는데, 조금 더 머물다 가시지요."
"그럴 필요 있겠소."
"그러시다면……."
총독이라는 지위는 방위군단장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서로 맡은 분야가 다르기는 하지만, 굳이 우열을 논하자면 총독이 더 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군터 크렘보르 앞에서 좀처럼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위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그는 곧 자신의 전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는 대등한 동맹이라지만, 로드니 캄브라이 역시 저 사내앞에서는 늘 조심스러웠다. 때로는 저자세로까지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본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태도였지만, 그건 바꿔말하면 그 로드니 캄브라이로서도 군터 크렘보르는 아쉬워해야 하는 상대였다는 뜻이다.
운바소르 아실은 나름대로 야심이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내였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 덕에 총독이 되었는지 잘 알았다.
'그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남들이 각하라고 불러주니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이곤 한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보지만, 그 즐거움에 속아 실수해서는 곤란하다. 총독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다음에 또 뵙지요."
운바소르 아실은 튀어나가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마지막까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는 낯으로 상대를 배웅했다.
***
군터의 동맹, 혹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판나른에만 있지 않았다. 테리브란에도 있었고, 그 위쪽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든 멕시스와 티브리악이 그랬다.
하베르트와의 마찰은 곧 테리브란과 그 너머에까지 퍼졌고, 그들은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우려를 표했다.
"아직 조정에서까지 논의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멕시스 가문에서 온 전령은 테리브란 정계, 특히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 막 소식이 닿았는데 이렇게 크게 소란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화제가 되도록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는 추측도.
"물론 그렇겠지."
군터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베르트의 배후에 있는 놈들에게 놈들이 기다리던 먹잇감을 던져주었다. 그렇다면 입질이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가주께서는 답을 듣고 싶다 하셨습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여전히 서부 전선 쪽에 가 있었으나, 테리브란에 남겨둔 아들을 통해 꾸준히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번 소란 역시 곧바로 그의 귀에 들어갔고, 지금도 그는 군터에게 답을 요구했다.
"답을 듣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예?"
"그리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당황하는 전령을 돌려보내고, 군터는 눈을 감았다.
자이드라 멕시스에게 한 답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답을 듣고 싶었다. 자콥 트라소프의 답을.
그의 생각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원인은 하베르트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제공했다. 놈들이 도발했고, 그는 그저 응했을 뿐이었다. 어떤 놈들은 그 방식이 너무 과격했다고 떠들어대지만,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똑같이 뺨을 맞았어도 누군가는 욕으로 답하고 누군가는 주먹으로, 혹은 검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뺨을 때린 놈이 제멋대로 손을 놀렸듯, 그에 대한 대응은 당한 쪽의 자유인 것이다. 하물며 뺨을 때린 놈이, 별 시답잖은 버러지 같은 놈이라면…….
불쾌해진 기분이 마음을 건드리자, 날카롭고 스산한 기운이 적막한 실내를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문밖에 대기하던 병사 두 명의 어깨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 가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