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36화 (836/1,064)

836화

처음 보고가 들어온 후로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알게 된 것이라고는 하베르트 가문이 두 세대 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지금은 오젠의 방위군에서 간신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하베르트 가문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전형이었다.

아직 완전히 몰락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그 세가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두 세대 정도만 더 지나도 하베르트라는 이름은 기억하는 이조차 없게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예. 배후가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게 영세한 가문이 감히 크렘보르 가문을 건드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억류된 상인들이 어느 정도 비위를 건드렸다고 한들, 그들은 화를 참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사정을 알아보니 억류된 상인들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약간의 성의 표시를 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바이더 하베르트라는 자가 그 성의 표시를 뇌물이라며……."

경계는 국경이라고 봐도 좋았다. 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속해있지만, 통치하는 주 정부도 다르고 문화나 법도 조금씩은 다른 터라 주 밖을 오가는 상인들은 조심성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 경계를 지나며 경계를 지키는 군의 장교들에게 약간의 성의 표시를 하는 것은 이제 관습처럼 굳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았다? 처음부터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상인들이 크렘보르의 이름을 입에 올렸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 역시, 처음부터 시비를 걸고자 마음먹었다는 뜻이고,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뿐이로군."

크렘보르의 눈과 귀는 판니른 전역에 깔려 있다. 하지만 판니른 밖으로 나가면 그 영향력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테리브란에는 협력자들 덕에 이런 저런 정보를 빠르게 얻는 편이었으나, 오젠 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판니른과 인접해 있다고는 해도 크렘보르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 하베르트 가문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내기도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직접 접촉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크렘보르 가문이 일개 상인들의 문제에 직접 끼어드는 것이 우습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더 이상 상인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장군께 고해야 합니다."

회의 내내 한마디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살라 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상석에는 보리스가 앉았으나, 그의 존재감은 보리스 이상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앞으로의 일은 장군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정이었고 통보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

"병사를 보내겠다."

"누구를 보내시겠습니까?"

군터의 눈길이 아래에 앉은 수하들을 쭉 훑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수하들, 특히 군관들은 자신을 보내달라는 듯 눈과 어깨에 힘을 줬다. 특히 아드리안은 아예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군터는 아드리안의 시선마저 외면했다. 그리고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전혀 다른 곳에 눈길을 주었다.

"롬바드."

"예."

가면 속에서 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고, 몇몇은 의아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네가 가라."

"예."

"장군. 아니, 성주님. 어째서……."

어떤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인선이었다. 그들은 롬바드라는, 다소 수상쩍은 면이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성주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분명 능력이 있는 것은 틀림없을 테지만…….

"일을 맡기에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내 결정이 의심스러운가?"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닫는 이를 보며, 보리스는 내심 조소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키웠다.

'롬바드라는 자.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부친도 그렇고, 살라스도 저자를 신뢰한다. 어째서 일까? 능력이 출중해서? 그럴 테지만, 그걸 어찌 알았단 말인가. 단순히 무술 실력이 뛰어나서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뛰어난 무인이 뛰어난 군인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모르겠군. 모르겠어.'

뭐,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부친은 마음을 굳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은 아마도 저 롬바드라는 자가 될 터. 그가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가 어떻게 이번 일을 풀어나가는지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흘 후,

보리스의 생각대로, 롬바드는 그의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 방식은 보리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바이더 하베르트?"

"그렇소. 그쪽은?"

바이더 하베르트는 판니른, 정확히는 크렘보르에서 온 병력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기병 이백가량.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이 병력을 이끄는자. 가면 달린 투구를 쓴 자였는데, 얼굴을 마주했음에도 여전히 투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억류하고 있는 상인들은?"

"인근 성의 감옥에 수감 중이오. 그들의 혐의에 대해서는 한참 전에 고지했었는데. 억지를 부리러 온 거요? 병사들까지 데리고?"

"억지?"

가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바이더 하베르트는 그제야 상대의 목소리가 심히 거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르고 갈라지는, 어딘지 섬뜩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우스운 말을 하는군."

"우습다?"

"억지는 그쪽이 부리고 있지. 장군께서는 이미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그쪽은 장군의 호의를 끝까지 거절했지."

"오만하기 짝이 없군. 그보다 당신은 왜 이름을 밝히지 않지? 당신, 귀족이기는 한 건가?"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늦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문장기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귀족이라면, 크렘보르 가문의 문장기와 함께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기를 세웠을 터. 그런데 보이는 것은 크렘보르의 문장기 뿐이니, 상대는 귀족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쾌한 가운데도 예를 지키던 바이더 하베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주인 운운하기 전에, 네놈의 이름과 신분부터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왜. 나도 억류하기라도 할 텐가."

"못할 것도 없지."

"장군의 말씀대로군."

"뭐라?"

"이해가 안 되는데, 대체 뭘 믿고 그리 건방지게 구는 거지?"

가면의 눈구멍을 통해 보이는 두 눈동자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비록 가문의 힘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는 하나, 바이더 하베르트 역시 무관이었다. 살기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짓을!"

대경한 그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으나, 그의 손이 칼의 손잡이를 잡자마자 억센 손길이 그의 목을 조였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이룰 능력도 없는 얼간이. 이름이 조금 더 길다고 해서, 네놈이 장군과 동등하다고 착각하고 있느냐."

차가운 쇠붙이가 조금 더 목을 조이자, 바이더 하베르트는 어떻게든 손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목을 조이는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놈들!"

"그대로 있어라. 죽고 싶지 않다면."

솔롬에서 온 병력은 이백. 반면 바이더 하베르트와 함께 온 병력은 그 배는 되었다. 하지만 가면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목을 잡힌 지휘관의 안위가 걱정돼서? 아니, 그들은 그저 압도되었을 뿐이었다. 가면 달린 투구를 쓴 사내. 그 한 명에게.

"너희들은 모른다."

듣기 싫은 섬뜩한 목소리에 실린 진한 혐오.

"아무것도 모르지."

전쟁도, 전투도 모른다. 승리의 환희도, 패배의 절망도, 당연히 모를 테지. 치열함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까? 손질도 제대로 안 된 무기나, 형편없는 군기만 봐도 답은 나온다.

자격 없는 자가 분에 넘치는 행세를 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놈들을 손봐주고 싶었다. 이런 몸뚱이가 되기 전부터 말이다.

그랬는데, 마침 기회가 왔다. 장군께서는 이놈이 순순하게 굴지 않을 경우, 다소 거칠게 다뤄도 된다고 하셨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원하시는 듯했다. 하긴, 그분께서도 어이가 없으셨겠지.

'이런 벌레 같은 놈이 엉겨 붙는 것이.'

배후에 누가 있든 상관없다. 어떤 뱀이 사주했든, 이 벌레 같은 놈이 군터 크렘보르를 욕보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

보고를 들었을 때, 보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롬바드가 바이더 하베르트를 겁박하여……."

겁박? 설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주절대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안색이 저렇게 창백할 리가 없지. 사안의 중대성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후우."

보리스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부친을 찾아갔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롬바드가 바이더 하베르트를 겁박했다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롬바드 그자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사전에 언질을 듣고 그리 한 것이겠지.

답을 들었으나, 그래서 더 머리가 아파왔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겁박이라니요? 아무리 영락했다고는 해도, 상대는 귀족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혼자 움직였을 리도 없으니, 필시 만만찮은 뒷배가 있을 것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예?"

보리스가 당황하여 부친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담담하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좁혔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놈들은 나를 능멸했고, 나는 그 발칙함에 응했을 뿐이다."

"하, 하지만……."

"생각이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다. 하찮은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설칠 때는, 단호하게 대응할 줄도 알아야 해."

보리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부친은 이 사안을 아주 단순하게 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상대가 귀족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저, 보잘것없는 놈이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