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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5화 (835/1,064)

835화

군터는 솔롬의 성주이며, 판니른 방위군의 군단장이다. 그런 그에게는 솔롬과, 솔롬에 인접한 마을들에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본래 제국의 법도는 자체적인 수조권을 지니는 영주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일 뿐. 영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영주 행세를 하는 귀족들은 꽤 많았다.

군터도 그중 하나였다. 7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그에게 관할지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주었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다. 조정의 눈치를 보며 은밀한 월권을 행사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그처럼 정식으로 권한을 수여 받은 이들은 드물었다.

아무튼, 군터는 자신의 권리를 십분 활용했다.

사실 관리들도 그렇지만, 특히 병사들의 봉급은 간신히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해준다면 불만을 사지는 않겠지만, 충성을 얻을 수는 없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이상을 줘야 했다.

한때는 군터 역시 말단 병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떻게 해야 아랫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아랫것들과 나누는 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조차 하지 않는 윗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었기에, 군터는 어렵지 않게 아랫것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여느 때와 같이 집무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군터는, 조금 굳은 얼굴로 그를 찾아온 시어문드를 보며 되물었다.

시어문드가 보고를 위해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솔롬의 군무라면 살라스가 전담했고, 판니른 내의 정치적인 문제라면 대개는 토어릭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데이븐랏지로 향하던 상단이 오젠에서 억류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굳이 찾아와 보고하는 이유. 그건 오젠에서 억류되었다는 상단이 크렘보르 가문에 선을 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군터는 휘하에 많은 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솔롬의 관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말함이었다.

솔롬에 상주하는 군대도 그렇고, 판니른의 방위군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봉급은 주 정부에서 나오지만, 인심을 베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솔롬의 수조권을 지닌 군터로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와 그의 가문을 후원하는 후원자들을 두었다. 솔롬과 판니른에 기반을 둔 상인들이 그들이었다. 솔롬의 성주이자 방위군의 군단장으로서 그들의 편의를 봐주며,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식이었다.

그런데, 시어문드는 지금 그런 그의 후원자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고한 것이었다.

"무슨 문제지?"

"아직 확인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오젠의 귀족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았다. 주 경계를 넘는 건 본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각 주를 다스리는 정부가 다른 만큼, 이런저런 문제가 심심찮게 생기곤 했다.

하지만 이제껏 별다른 문제 없이 주 경계를 넘어 상행을 다니던 상단이 갑자기 억류당했다면, 그건 어째서일까.

"확인이 끝나는 대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이때까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군터도, 시어문드도, 이 일에 대해 들은 다른 이들도.

***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된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겼다면 해결하면 된다. 꼬인 실타래를 풀듯이.

말로만 하니 아주 간단한 일 같지만, 실제로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껏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해결했다.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혹은 실력으로, 해들리르의 일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들이 보기에도 꽤 골치가 아팠다. 일단 첫째로 문제가 판니른이 아닌 오젠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판니른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손을 쓰면 그만이나, 그게 아니라면 조금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들은 바에 따르면, 그 하……."

"하베르트."

"그래. 그 하베르트라는 귀족을 모욕했다? 그거 아닌가? 그렇다면 적당히 성의를 표시하면 될 일 아니오?"

아드리안의 말에 토어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 같았으면 이렇게 회의를 열 필요도 없었겠지.

그러나 아드리안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귀족이라고 하는 이들의 생리를, 귀족이 아닌 자가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일단 하베르트는 이름이 아니라 성일세. 하베르트 가문. 오젠에서 열 세대가 넘게 살아온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이라더군."

"그런가? 그래서?"

"문제는, 그런 명망 있는 가문과 마찰이 생겼다는 거네. 그것도 가문의 명예를 운운할 정도로 크게."

"그…상인 놈들이 정말 잘못을 저지른 건가?"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이제는 어찌 됐든 상관없는 일이고."

"음?"

토어릭과 아드리안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상석에 앉아있던 보리스가 그들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하베르트가 그들의 이름을 걸었기 때문이지. 귀족이 가문의 이름을 꺼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글쎄. 아직은 모르겠군. 지금부터 그걸 논의해야 하겠지 않겠나."

아드리안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다문 채 눈만 느릿하게 굴려댔다. 그를 본 보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싸움터에서는 열 사람, 아니 백 사람의 몫도 해내는 용사일지 몰라도 이런 일에는 어린애만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아드리안에게 이런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능력을 기르는 눈치를 기르든, 어떻게든 자리에 맞게 거듭난 그의 동료들과 달리 아드리안은 여전히 순진한 무부에 불과했다. 보리스는 부친이 어째서 이런 자를 부친이 아직도 중용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은…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부터 알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석에 앉아있던 로우렌이 목소리를 내자, 바로 반론이 나왔다.

"그렇게 신중하게 굴 필요가 있겠나? 어차피 일개상단의 문제일 뿐. 하베르트인지 뭔지 하는 자들이 까칠하게 군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시비에 이쪽에서 진지하게 대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걸세."

딴에는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회의까지 여는 것은 너무 과했다. 물론 타주의 귀족 가문이 얽혔다지만, 이 자리에서 듣기 전까지 그들은 오젠에 하베르트라는 귀족 가문이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었다. 뼈대 있는 가문이라지만, 그 가문의 위세가 쟁쟁했다면 어디선가 이름 정도는 들어보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속 편하게 넘길 일은 아닌 듯싶네만."

보리스가 로우렌의 말에 힘을 실어주자 반론을 꺼내놓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자네들도 짐작했겠지만, 하베르트 자체는 그리 변변한 자들이 아닐 것이야.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지."

"배후가 있을 거라는 말씀이군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크렘보르 가문은 아직 그리 유명하지 않을지 몰라도,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이미 7황자의 세력권 내에서는 상당히 유명했다. 그가 황자의 총신이라는 것도, 그 능력이 빼어나다는 것도.

그런 이에게, 역사야 깊다지만 현재는 별 권세도 없는 귀족 가문이 시비를 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가 손상됐다며 떠들어대지만,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크렘보르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을 건드렸을까?

과연 그럴만한 배짱이 있는, 혹은 앞뒤도 재지 못하는 머저리들일까? 그럴 리가.

"그래.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변변찮은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우리를 가늠하고 있는 적이 존재하는 거라면… 신중해야 하네."

"그렇다면 일단은, 장군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말에 보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심하기는.'

물론 사안이 사안인 만큼, 부친께 고하기는 해야 할터.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확실해지지 않았고, 아무 결론도 나오지 않았는데 일단 고하잔 말인가? 겁쟁이 같을뿐더러, 무책임하지 않은가. 고작 이딴 말이나 지껄이라고 녹을 먹고 있는 게 아닐 텐데.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보리스는 표정 관리에 힘썼다.

"일러. 아직 아무것도 명확해진 게 없지 않나."

"으음. 그렇기는 합니다만."

"조금 더 정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

"밥버러지들이 따로 없군."

자신을 따르는 심복들만이 남은 자리에서, 보리스가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는데, 로우렌만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본래 저런 자들임을 모르셨습니까? 새삼스럽게 뭐그리 노여워하시는지요."

"알고 있었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지."

"노여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실망하고 계십니까?"

"둘 다. 하지만 둘 중 하나라면 후자겠지."

"어쩔 수 없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안다. 시간만이 해결해줄 문제겠지."

어떤 이들은 사람은 많은데 자리가 부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보리스가 보기에는 반대였다. 자리는 많은데 사람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능력도 안 되는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쪽일 것 같으냐?"

"가장 유력한 것은…아무래도 중앙 조정 쪽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그간 잠잠했지 않으냐."

"그간 잠잠했으니 이제 움직일 때가 됐다고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보리스도 부친과 중앙 조정의 대신들이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임 총독이었던 로드니 캄브라이가 돌아갔으니, 중앙 조정과의 관계도 조금 더 원만해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그간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한순간에 변하는 것도 우습지요. 게다가, 전임 총독도 결국은 굴러들어온 돌일 뿐입니다. 당장 캄브라이 가문에도 그를 경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테니, 그가 당장 뭔가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보리스는 중앙 조정과의 관계 개선을 필수라고 보았다. 중앙의 권력자들이 변경 주의 권세가를 경계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경계하는 것과 적대하는 것은 다른 일 아닌가. 부친이 자초한 바가 크다고는 하나, 언제까지 지금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가능성이 큰 정도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보리스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린 듯, 로우렌이 말을 더했다. 하지만 위로 아닌 위로의 말에도 보리스의 굳어진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는데, 그 역시 이 일이 중앙 조정과 관련되어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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