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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4화 (834/1,064)

834화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흥미였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노래하는 모습 그 자체에 호기심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 흥미, 내지는 호기심이 조금 더 커진 것은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던 길에 우연한 사고를 목격하면서부터였다. 불량배 몇을 손봐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지만, 노래하는 재주만 있는 음유시인이 쉽사리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실비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 평범하지 않은 음유시인이 뭔가 더 숨기고 있는 게 있으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새장 속에 머물러 있다 보면 자극을 갈구하기 마련이니까.

실비아에게 있어 카인이라는 자는 그런 신선한 자극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덩치를 키워, 진한 흥미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오라비가 어쭙잖은 훼방을 놓으면서부터였다.

본래 그들 남매의 사이는 그렇게 두텁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여느 남매만큼은 되었다. 적당히 가족이라는 유대감 정도는 느끼는, 그런 사이였다는 말이다.

그랬던 그들이 멀어지게 된 것은 보리스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귀족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서일까, 보리스는 점점 귀족스럽게 변해갔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실비아가 느끼기에는 주로 후자였다. 가문의 체면이니 뭐니,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달갑지는 않은 온갖 이유를 대가면서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었다.

가문의 위신? 체면?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혜택에 걸맞은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걸 왜 부친이 아닌 오라비가 지적한단 말인가. 부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왜 아무것도 아닌 오라비가 나서느냐 이 말이다.

'사내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계자.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아닌 자리다. 후계자는 후계자일 뿐이지, 주인이 아니지 않은가.

'그 여자가 부추기고 있는 거겠지.'

실비아는 올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 얼마간은 사이좋게 지냈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음흉한 속을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이 한스러웠다.

'아버지가 건재한데, 벌써 헛바람만 잔뜩 삼키고 있는 꼴이라니.'

부친이 오라비는 물론, 오라비를 충동질하고 있는 올케까지 아주 단단히 혼내주기를 바란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부친은 오라비가 헛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실비아는 그런 부친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이해 하지 못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는 걸까 싶다가도, 자신이 아는 부친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우습게도.

"그자와 공자와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세간에는 '아가씨의 몸종' 내지는 '근접 호위' 라고만 알려져 있다. 그들이 사실 성주의 친위대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슨 생각일까?"

"하옵고, 그자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지켜보는 눈이라니?"

"공자가 부리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도시에서 이렇게 입조심 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 뿐이었으니.

"그자에게 확실히 뭐가 있기는 있다는 뜻이구나."

"저…아가씨. 그자에 대해서는 이만 관심을 거두심이 어떨는지요."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공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장군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다면, 자칫……."

"걱정 말거라. 어떻게 되더라도, 너희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일은 없도록 해줄 테니."

성주, 하지만 그들에게는 '장군' 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군터가 그의 두 자녀에게 너그럽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았다. 그리고 그 너그러움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딸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물론 보리스 공자의 곁에 머물며 선 근처를 오가는 이들이 아직 멀쩡히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용, 혹은 무관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걱정하지 말래도."

"예. 아가씨."

하지만 실비아가 눈에 힘을 주자 그들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잘 살펴주는 너그러운 아가씨였지만, 그녀 또한 군터 크렘보르의 피를 이은 자식이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실비아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보리스와 후계 경쟁을 했을 거라 말하고들 했는데, 그녀를 가까이서 섬기는 그들의 생각 역시 같았다. 그녀에게는 타고난 기질이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풍기는, 위에 서는 자 특유의 기질이.

***

카인은 보직을 옮겼다. 그는 이제 서기가 아니라 재무관이었다. 비록 앞에 3급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재무관은 재무관이다. 돈을 관리하는 것은 어느 조직에서나 중요한 일이니, 재무관이 된 자체 만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봐도 좋을 일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정작 당사자인 카인은 담담했다. 그는 언제까지 자신이 들리는 것을 받아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에 붙들려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서기 일을 맡았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중간에 의도치 않은 사고가 벌어지는 바람에 그 시기가 꽤 뒤로 밀리게 되리라 생각했다.

"공자께 감사드리게."

"공자께서 먼저 찾아주시지 않는다면, 제가 어찌 공자를 찾아가겠습니까. 바오룸 공이 부디 잘 전해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카인의 개인사에 얽혀 목이 달아날 뻔했던 그 날 이후, 바오룸과 카인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 시간이 약이었다. 본래 카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바오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 감정이 옅어지고, 카인 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얼어붙었던 마음도 차츰 녹아내렸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지름길이나 샛길 같은 것은 없네. 그저 충성과 능력을 보이는 것뿐이지."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한발더 나아가고 있었다.

"모두 카인님의 노력하신 덕분이지요."

레온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카인도 웃으며 화답했다.

"고맙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전에는 알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친구라는 말을 너무 쉽게들 사용하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놓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소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그대가 생면부지의 내 목숨을 구해주었지. 이 정도면 범상치 않은 인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레온은 카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생명의 은인이라는 생각에,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소. 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는 덤이었지. 하지만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대에 대해 알아갈수록 처음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 대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더군."

"부끄러운 말씀이군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대와 같은 사람은 없소. 아니,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본 적이 없소. 그렇기에 그대와의 연을 더 값지게 여긴다오."

"으음."

맨정신에 이런 노골적으로 띄우는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레온도 그랬다. 그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고 싶었을 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소. 무리한 부탁으로 비추지 않았으면 좋겠소만."

"무엇입니까?"

"난 그대와 단순한 지인이나 친우를 넘어, 형제처럼 지내고 싶소."

"… 과분한 말씀이군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소. 그대도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이해 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군요."

도시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지만, 그 시간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수도자에게 여러 교훈을 선물해주었다. 이제는 레온도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순진한 청년이 아니었다.

물론, 닳고 닳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젊은이로 보였지만 말이다.

"카인님. 혹시 일전의 일 때문에 부채감을 느끼시는 거라면……."

"아니. 그런 것은 아니오. 설마하니 내가 내 마음도 모르겠소."

"그런 이들이 많더군요. 그렇지 않은 이들을 찾기 힘들 정도로."

"……."

레온이 싱긋 웃었다.

"좋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라. 저 또한 같은 마음이니까요."

"그렇다면……."

"형님으로 모시지요."

"하하! 고맙소."

"말씀 편히 하십시오. 아시다시피, 제가 더 어리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지."

카인은 환히 웃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한껏 웃는 것일까. 스스로 웃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만큼 기뻤다. 리비암에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깨달았을 때만큼.

***

"재무관? 그를 다시 거두기로 하신 겁니까?"

"버린 적이 없었으니 다시 거둔다는 말은 적절치 않지요."

"그렇습니까."

보리스는 살라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유로운 척하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여느 사람들이 살라스의 앞에서 느낄 법한 두려움이나 껄끄러움은 아니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추궁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가.'

카인이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던 사실이다. 하지만 부친은 분명 카인에 대한 처우를 자신에게 맡겼다. 그렇다면 그를 재무관으로 올리든, 정무관으로 올리는 살라스가 관여할 바는 아닐 터.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오?"

"그것만은 아닙니다."

"허면?"

미처 다 숨길 수 없었던 까칠한 반응은 살라스도 알아차렸다. 그래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했고, 목소리에도 고저가 없었다.

"공자님의 의중을 알고 싶었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자는 아직 저희의 감시 대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의 처분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예. 하지만 동시에, 저희에게 그자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별도로 내리셨지요."

"……."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경계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고요. 저희는 각자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장군의 뜻대로 될 테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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