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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3화 (833/1,064)

833화

신임 총독의 초대장을 받은 많은 이들이 하잘에 모여들었으나, 취임식 참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에 불과했다. 심지어 신임 총독 본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하잘에 모여든 까닭은 새롭게 바뀔 판니른의 정세, 권력 구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임 총독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 혹은 그를 떠보거나 그의 환심을 사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일이었다. 그도 그렇지 않겠는가? 새롭게 취임한 총독이라고 해도, 진즉부터 대행이라는 이름으로 총독 자리에 앉아있던 자다. 새로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반갑습니다. 보리스 공자. 이렇게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군요."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지요. 그때, 솔롬에서 한 번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긴 하군요. 하지만 그때는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요."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비오르 공."

비오르 몰던. 몰던 가주의 하나뿐인 형제.

본래 전대 몰던 가주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을 낳았다. 그 말인즉 현 가주의 형제는 열 명이 넘었다는 뜻.

하지만 지금 그의 살아남은 형제는 눈앞의 이 사내 하나뿐.

혹자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겁쟁이라고, 한다. 특히 몰던 가문에 감정이 좋지 않은 이들은 뒤에서 고자라고 수군거리기도 한다던가.

보리스는 그 어떤 말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 사내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롬에서 얼굴을 본 적은 있었으나,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이자가 어떤 자인지 직접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요즘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리던데, 괜찮습니까?"

"노만인가 하는 녀석 말씀이시군요."

"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알아보니 해들리르라는 이름을 쓰지도 못할 방계 중의 방계더군요. 그런 놈이 계승권을 주장한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게 두지도 않을 테고요."

"그렇다면?"

"부추긴 놈들이 있겠지요. 물론 진지한 시도는 아닐 겁니다. 한번 찔러나 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놈들인지는 알아보셨습니까?"

"아니요."

보리스가 말없이 쳐다보자 비오르 몰던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 드러내놓고 나선 것도 아니니, 이런 사소한 수작에 민감하게 반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야 꼴이 우스워질 테니까요."

"너그러우시군요."

"하하. 크렘보르에서 보시기에는 무르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반발하는 자들을 모두 찍어누를 만큼의 힘이 없습니다."

"겸손하기까지."

"정말입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저희 가문을 존중하지만, 그뿐입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이미 약간은 선을 넘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테고요."

"그 누구도 절대적인 힘이 탄생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 말이군요."

"대표는 인정하되, 주인은 용납할 수 없다는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은 비단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렘보르에서 더 잘 아실 테지요."

"통탄할 노릇이군요. 판니른의 일은 판니른에 맡기면 될 것을."

"하하. 저 또한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중앙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요."

***

회담이 끝난 후, 로우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리스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로우렌이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깊게.

"어떠셨습니까?"

"…글쎄. 하나는 알겠더군."

"하나?"

"세간에 도는 소문 따위는 믿을 게 못 된다는 것."

"비오르 몰던은 가주의 측근이며 몰던의 실세입니다. 제 한 목숨만 중한 겁쟁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몰던 가주의 배포도 보통이 아니군."

"무슨 말씀이신지."

"자기 손으로 죽이려던 동생을 곁에 두고 있지 않으냐."

"납작 엎드리지 않았습니까. 자기 손으로 거세를 해가면서까지요."

후계를 만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귀족으로서 특히 치명적이다. 양자를 들이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대를 잇는다고 해도 가문의 위상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오르 몰던이 스스로 거세하고 형에게 굴종한 순간, 그는 가주 자리를 노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 대가로 목숨을 건지고, 상당한 권세도 갖게 되었지만…….

"너라면 어땠을 것 같으냐. 네가 그였다면 말이다."

"모르겠군요. 뭐,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침묵했다. 그러자 로우렌이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상당히 다른 자 같았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어떤 면에서? 여러 면에서다. 소문과 다른 점을 찾기보다 같은 점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다.

"겁쟁이 같지 않았다. 그리고…이건 짐작이다만, 상당히 독기가 있는 자 같더군."

"독기요? 비오르 몰던을 말할 때는 한 번도 듣지 못한 단어입니다만."

"짐작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런 굴욕을 감내할 자 같지는 않았다."

"그 말씀은."

"짐작일 뿐이다. 어차피 몰던과 이런저런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계속 교류하게 될 테니, 확인해볼 기회는 충분히 있겠지."

확인하고 나면, 그 후에는 어쩔 것인가. 로우렌은 묻지 않았고, 보리스도 로우렌이 묻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년을 생각하느냐?"

"최소 5년. 최대 10년 아니겠습니까."

가끔 적당히 술을 들이켠 후에 공자님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올 거다, 농담조로 말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숫자를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평소의 조심스러움을 버렸다. 하잘에 온 뒤, 조금씩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한 고양감은 조금 전 비오르 몰던과의 회담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얼마나 남았나?"

"여섯입니다."

보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여섯이라.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이미 해가 반쯤 저물어 어둑어 둑해져 있었다.

"지치는군."

"오늘 지치지 않으면 내일은 아예 퍼지실 겁니다. 5년, 10년을 이야기하기 전에 요 나흘을 먼저 챙기시죠."

"그럴 생각이다."

피식 웃은 로우렌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몸집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보리스는 앉은 자리에서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갑소. 보리스 크렘보르요."

***

제임스는 눈앞의 상관이 아직도 껄끄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 사내를 껄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이를 찾는 게 더 빠를 터였다. 빠른 진급에 대한 질투심?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런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어쨌거나 그는 실력을 보였으니까. 자격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껄끄러움은 그런 유치한 감정때문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데 근거한다.

"이상은?"

늘 짤막하게 끝나는 말, 용건 외에 다른 말은 일절하지 않는다. 차갑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화법에 인간미 없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 여겼지.

"없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불쾌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상관, 롬바드의 목소리는 듣는 순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기괴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다.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저 가면은 이제 좀 벗으면 안 되나.'

사정은 알고 있다. 보기 흉한 상처 때문에 얼굴을 가린다는 것을, 가면을 쓸 수 없는 자리에서는 어지간한 여인보다 두꺼운 화장으로 상처를 가린다고 했던가.

'줄 몇 개 없는 놈이 어디 있다고.'

제임스는 롬바드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칼밥을 먹고 사는 인생 중에 얼굴에 크고 작은 상처 몇 개씩 달고 사는 놈들은 흔하다. 자신만 해도 턱밑을 지나가는 실뱀 한 마리가 있지 않던가.

'뭐, 장군께서도 허락하셨다니.'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듣기로 롬바드는 장군의 앞에서도 가면을 쓴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감히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퇴청하고 난 후, 레온이라는 녀석하고 어울린 게 전부입니다."

"……."

"그때, 녀석을 구했던 수도자 출신 십부장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대꾸라도 하던지. 제임스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저 멀리, 어둑해진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인형이 보였다. 그들이 맡은 관찰대상이자 보호 대상, 카인이라는 이름의 서기였다.

'수상한 놈.'

서기라고는 하지만, 실력이 어지간한 무관들 뺨치는 수준이라던가. 황도의 몰락 귀족이라는 것도 그렇고, 황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추적자가 따라붙은 것도 그렇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제임스는 지금이라도 저놈을 그냥 잡아다 가두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뭐, 윗분들의 생각은 다르신 모양이니.

"익숙해지면 느슨해지고, 그러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지."

"예?"

"눈치챘다."

"그게 무슨……."

롬바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제임스는 상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음을 알아차렸다. 비록 가면 속 어둠에 묻힌 눈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한심하군. 실망스러워."

"그……."

반박, 아니면 대꾸라도 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 그보다도 더 차가운 시선에 하려던 말이 다시 목구멍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감시조 전원을 교체하겠다. 인원 선별이 끝나면 곧바로 인계하도록."

"…예."

머릿속에는 롬바드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실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제임스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움츠러든 채로 물러났다. 껄끄럽게만 여겼던 상관이 어느새, 조금이지만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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