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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32화 (832/1,064)

832화

보리스는 자신이 부친을 대신해 신임 총독의 취임식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것을 듣자마자 향후 일정을 생각했다.

"신임 총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는, 이 판나른에서는 장군이 유일할 겁니다."

"몰던 가주는?"

"으음. 그는……."

로우렌이 즉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판니른에서 몰던 가주의 위상은 그들의 장군 못지 않다. 해들리르를 무너뜨린 후로 그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판니른 제일의 권세가(家)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자라면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번 취임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눈치를 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오룸이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판니른의 최고 권력자를 셋 뽑는다면 우리 장군과 몰던 가주는 반드시 들어가겠지요. 우리가 그자의 참석 여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쪽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우리처럼 궁금해하고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우리 장군께서 참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면, 십중팔구 그자도 움직이지 않으려 할 겁니다."

유치하다면 유치한 자존심 세우기다. 하지만 이 자존심이라는 것. 다른 말로 체면이라는 것은 힘 있는 자들에게는 때때로 천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닌다.

"그럼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군."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것 같군요. 알려주실 겁니까?"

"굳이 장난칠 필요 있겠느냐. 어차피 몰던 가주가 온다면 나도 부담스럽다. 신임 총독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들의 예상대로, 닷새 뒤에 몰던에서 사람이 왔다.

그는 이번 취임식에 군터가 참석하는지를 조심스레 물었고, 부친을 대신해 그를 맞이한 보리스는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부친은 참석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대신해서 움직일 것이라고,

"그렇군요."

몰던의 사자는 태연했다. 그럴 거라 예상했다는 듯이.

"가주께서는 참석하시는가?"

"송구합니다. 저 같은 자가 그분의 의중을 어찌 알겠습니까."

"나는 이미 숨김없이 말해주었는데, 그리 나오면 섭섭해질 것 같군. 그러니 솔직해지지."

잠깐 보리스와 시선을 마주친 사신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불참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보리스가 굳은 표정을 지우고 싱긋 미소지었다.

"그럼, 살펴 가게나. 가주께 안부도 좀 전해주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

"총독에 취임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소."

보리스는 만면에 미소를 띤 판니른의 신임 총독을 짧은 순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아쉬움이나 노여움 같은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하긴, 미리 통보를 받았으니 설령 그런 마음이 있다 한들 잘 숨겨두었겠지.

'운바소르 아실이라.'

사실 보리스는 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남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아는 정도였다. 전임 총독이었던 로드니 캄브라이의 심복으로, 본래는 캄브라 이의 가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으며, 대가 약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꽤나 음험한 구석이 있는 자라는 것 정도.

'해들리르의 일도, 이자의 협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을 터.'

대외적으로는 몰던이 일을 주도했던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상은 다르다. 해들리르의 몰락은 몰던과 크렘보르, 그리고 이 신임 총독 셋이 만든 합작품이다. 그 비중을 따지자면 몰던이 최고임은 변함이 없지만, 이 신임 총독도 그에 못지않게 깊게 관여했다. 직접 움직여서 피를 뿌린 크렘보르보다도 오히려 더 역할이 컸다. 크렘보르는 피를 뿌렸지만, 이자는 그 피를 깔끔하게 다 닦아 없했으니까. 피를 뿌리는 것과 사방에 뿌려진 피를 깨끗하게 닦아 없애는 것. 둘 중 뭐가 더 어렵고 번거로운지는 명확하다.

"승차하신 것은 감축드립니다만……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되셨습니다."

"맞는 말이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소."

로드니 캄브라이는 전쟁을 위해 판니른의 모든 것을 쥐어짜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가 전장으로 떠나고 난 후에는 운바소르 아실이 그 대리로 일을 진행했으니, 따지고 보면 현재의 궁핍한 판니른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현명하게도, 혹은 간사하게도 자신이 총독 대리였던 시절에 벌였던 일들을 은근슬쩍 전임 총독에게 떠넘겼다. 마치 로드니 캄브라 이가 전장에 있으면서도 판니른의 대도사를 계속 주도했던 것처럼.

당연히 머리가 있는 이라면 그런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 리가 없었으나, 백성들에게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들은 신임 총독이 전임 총독의 심복이었으며, 심지어 총독 대리로서 진작부터 판니른을 다스려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총독이 바뀌었으니 이제까지와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희망을 품어볼뿐.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벌써 말이오?"

"각하를 뵙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인데, 제가 홀로 각하의 시간을 계속 뺏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음. 그렇다면야."

기분 탓일까. 살짝 치켜세워주니 운바소르 아실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다.

***

보리스는 하잘에 오자마자 인기인이 되었다. 크렘보르의 독자이자 후계자. 그것만으로도 그를 찾을 이유는 많았는데, 심지어 그는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쌓은 명성도 있었다. 서부 전선에서 세운 군공이 멀리 떨어진 판니른에도 잘 알려져 있었던 탓이다.

신흥 권세가의 능력 있는, 게다가 그 자리를 위협받을 일도 없는 후계자라는 점은 그를 찾는 이들의 수를 늘리는 데 단단히 일조했다.

"저는 포아자 가문의 ……."

"저는……."

보리스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어떻게든 이름을 들려주려 하는 이들의 방문 세례를 받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전에도 이런 이들을 본 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도까지 와서, 그래도 나름대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는 큰소리를 쳐대는 이들의 아부를 받고 있으니 새삼 현재 자신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괜찮은 기분이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느냐."

첫날 찾아온 방문객들을 대충 다 만나고 난 뒤, 보리스는 한숨 돌리면서 느긋하게 석양을 보고 있었다.

"근사하지 않느냐?"

"그렇군요. 신임 총독이 그래도 신경 써준 모양입니다."

하잘에는 크렘보르 가문의 저택이 있었는데, 보리 스와 일행 몇몇은 이번에 그 저택 대신 총독부 안의 객관에 머물렀다. 총독부의 귀빈들을 위해 준비된 건물은 시설도 시설이지만 무엇보다 경치가 아주 좋았다. 하잘에서 이곳보다 더 경치가 좋은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도시의 전경은 무척이나 훌륭했다.

"솔롬에서도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건물을 높게 짓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듣자 하니 이 탑은 80년 전,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건축가가지은 것이라 합니다."

"솔롬에는 그런 건축가가 없다는 말인가?"

"새로 짓고 있는 건물들을 보십시오. 튼튼하기는 해도, 그뿐이잖습니까."

솔롬에 새로 들어서고 있는 건물들은 로우렌의 말처럼 효율적이긴 하지만 미적 가치는 없었다. 기존의 시가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는데, 새롭게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는 구역은 심심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보리스는 그 점을 아쉽게 생각했다. 그는 솔롬이 진정 판니른의 손꼽히는 대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실용성 외에 다른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여겼다.

"아쉽군."

"같은 마음입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겠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장군을 필두로 해서 그분을 따르는 고위층들 대다수는 아직도 군인 티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군인이 군인 티를 벗지 못하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위정자라면 좀 더 넓은 시야와 사고방식을 갖출 필요가 있지요."

"입조심 하라는 충고는 필요 없겠지?"

"안 그래도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슬슬 눈총을 사고 있는 듯해서 말이지요."

"그래?"

"뭐, 제가 여러모로 나대기는 했잖습니까."

솔롬은 한창 역동하고 있는 도시다. 도시 외곽은 지금도 꾸준히 확장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순 노동 쪽에서야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고렘이 대활약을 하고 있지만, 고렘만으로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까놓고 말해, 지금 솔롬에는 어마어마한 이권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쥐기 위한 물밑 협상, 혹은 다툼도 쉬지 않고 벌어지고 있었고, 물론 성주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만. 그렇기에 아직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좋게좋게, 협상 형태로 분쟁을 해결하고 있었다.

하여간, 그 이권 다툼에 로우렌도 발을 들였다. 보리스의 대리로 나선 것이었으나 때로는 무리한 요구를 서슴지 않는 그의 협상 방식은 여러 이들의 불만을 샀다. 감히 크렘보르 가문의 후계자에게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 그 대리인에게라도 이를 가는 것이다.

물론 드러내놓고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로우렌은 자신이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이는 순간,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득달같이 달려드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승냥이 같은 자들이 감히 보리 스 공자의 대리인을 공격할 수는 없을 테지만, 공자를 위해 충언을 할 수는 있을 테니까.

"차차 바꿔나가셔야지요."

"그래. 그래야지."

이 순간. 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솔롬의 고관, 특히 무관들의 경우 대부분 나이가 꽤 있었다. 현역으로서 끄트머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거나, 그에 근접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이 언제까지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을까?

거창하게 세대교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나이 먹은 이들이 자리를 내어주고,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잇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

"공자의 시대에, 솔롬은 이 도시보다 더 빛나게 될 겁니다."

"글쎄. 모르겠구나.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겠지."

미래에 대한 상상은 야심 있는 자에겐 그 자체로 즐거운 취미 거리다. 보리스는 근래에 들어 이 취미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별로 고상한 취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즐거우면 그만 이다.

'내 시대라.'

그러라고 한 말이겠지만, 참으로 가슴 뛰는 표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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