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화
관저와 연무장만을 오가다시피 하는 무미건조한 생활 때문일까, 군터는 시간의 흐름에 점점 무뎌졌다. 그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건 어쩔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없는 바깥의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솔롬은 조용했다. 키리스트의 사냥개들이 겁도 없이 담을 넘었던 이후로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 내외의 실무를 맡은 수하들이 열심히 일한 덕이었다.
반면 솔롬 밖에서는 꽤 굵직굵직한 일들이 일어났다.
첫째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던 로드니 캄브라이가 판니른 총독직을 내려놓았다. 아직까지도 서부 전선에서 이름값을 올리는 데 여념이 없는 그는 이 이상 총독직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중앙 조정과 담판을 지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의 가문과.
"취임식을 할 생각인가 봅니다."
"아직 들리는 말은 없지 않았나?"
"대놓고 말은 꺼내지 않고 있습니다만… 하잘에 있는 정보원들이 이르길, 꽤 부산스럽다고 하더군요."
"흠."
둘째. 첫 번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였는데, 운바소르 아실이 로드니 캄브라이의 뒤를 잇게 됐다. 누구나 대충 예상하던 일이라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운바소르 아실은 굳이 취임식에 욕심을 내는 듯했다. 물론 한 주의 총독쯤 되면 취임식이야 당연히 해야겠지.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취임식이라면 이렇게 따로 논하고 있겠는가.
"본인이 로드니 캄브라이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면서, 동시에 본인의 영향력도 과시하고 싶겠지요."
토어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한 번이면 족하다."
예전, 하잘에서 있었던 대회의. 그때 군터는 하잘로 가서 총독 대행이었던 운바소르 아실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내막이야 어쨌건, 배려라면 배려였다.
"신임 총독이 아쉬워하겠군요."
"총독이라고 해봐야 전임의 개에 불과하다. 잘 쳐줘도 대리인이지. 여전히 말이다."
총독 대행이건 총독이건, 눈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군터는 로드니 캄브라이조차 거래의 대상으로 여겼을지언정, 존중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한 주의 왕이나 다름없는 그 자이드라 멕시스조차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자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오만함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연스레 그렇게 보이고, 생각이 들었다. 눈높이가 맞지 않는 상대와 어찌 동등하게 시선을 마주하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초대가 온다면 답은 해야 합니다. 장군께서 가지 않으신다면…공자를 보내는 것은 어떠십니까?"
"녀석의 생각이더냐?"
토어릭이 멋쩍게 웃었다.
"신임 총독이 장군의 눈에는 차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부모가 자식을 알듯, 자식 역시 부모를 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군터는 바로 허락했다. 본인이 원한다면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국들의 포섭이 진전을 보이는 듯합니다. 근래에 국경을 넘는 사신단의 수가 늘었다고 하는군요."
"헛수고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판니른의 동쪽. 주 경계가 아닌, 카라누르 제국의 국경 밖에는 제국의 손이 미치지 않은 땅이 남아있었다. 황제가 마음을 바꿔 군대의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면 그 땅 역시 제국의 것이 되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아직도 존속할 수 있었던 소국들.
제국의 헛기침 한번에도 벌벌 떠는, 그래서 어설픈연합 형태로 존재하는 그들은 아직까지도 제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나마 황제가 사라지고, 그 뒤를 잇기 위해 내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기에 조금 어깨를 펴고 있었으나 머리가 있는 이라면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콥 트라소프는 눈치만 살피고 있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편을 들라는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적당히 교류하면서,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관계도모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소국들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이 제국의 혼란을 틈타 뭔가 거창한 일을 도모할 만한 깜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승자가 되든 결국 제국의 혼란이 수습되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콥 트라소프라는 유력한 황자가 손을 내밀었으니, 잡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신이 왕래하고, 교분을 맺는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드리안이 말했다.
당장은 이쪽이 아쉬워서 손을 내밀고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교류하는 것이지, 무슨 조약 같은 것을 맺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설령 평화조약 같은 것을 맺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 간의 약속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얼마나 허무해지는 것인지는 역사가 수차례 증명해왔기에.
"사자가 당장 주둥이를 닫고 있다 해서 그 앞에 다가가는 꼴입니다. 멍청한 놈들 아닙니까."
"비유가 그럴듯하군."
토어릭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네. 멍청해서가 아니라, 똑똑해서 다가가는 것 아니겠나."
"무슨 말이지?"
"생각해보게. 주둥이를 닫았건 열었건, 이미 사자는 눈앞에 있네. 자네 말대로 맨몸뚱이인 상황. 두 주먹을 쥐고 싸우려 들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치면 어찌 되겠나? 당장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던 사자도 이를 드러내거나, 하다못해 앞발이라도 휘두르지 않을까?"
"……."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일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면, 믿은 것일지도 몰라."
"믿어? 뭘 말인가?"
"지도를 좀 보게."
아드리안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거대한 탁상 위에 놓인, 역시 거대한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심에는 동서남북으로 넓게 펼쳐진 광활한 제국이 있었다.
"제국은 넓어. 거대하지. 너무 거대해. 한 주 정도의 크기만 되더라도 저 서쪽이나 남쪽 땅에서 소위 강국이라고 명명대는 나라들 못지않지. 그런데 제국은 그런 나라 수십 개가 뭉친 셈이지 않나. 비정상, 아니 기형이나 다름없지."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제국의 역사는 곧 정복의 역사 아닌가. 무수한 피와 땀으로 일군 대제국이지. 무수한 제국민들의 자부심이고."
"그래."
토어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지 출신들이 그러하듯, 그나 아드리안이나 애국심이라든지 민족의식 같은 것은 희미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제국의 국민으로서, 그들이 무엇에 자부심이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자네가 말하는 제국의 역사는 곧 황제의 역사지. 그 옛날, 널리고 널린 소국들과 별다를 것 없었던 카라 누르를 이런 대제국으로 일으킨 것은 오롯이 그의 공이고 업적이니까."
황제. 그리고 그가 일궈낸 역사. 둘은 별개가 아니었다. 황제가 곧 제국의 역사고, 제국의 역사가 곧 황제였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대제국을 일궈낸 것이 아니야. 일궈내고, 이만큼 유지해왔다는 점이지."
정복 군주라고 하는 자들의 한계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빼앗는 것보다 빼앗은 것을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함이었다.
황제는 흔하디흔한 소국을 세계제일의 대국으로 키워냈으며, 이 비정상적인 덩치를 오랜 세월 유지해왔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을까. 그 의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식자라도 '그가 황제였기에' 라는, 답 같지도 않은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였기에 가능했지. 누구도 이 말을 부정하지 못할 걸세."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제야 알겠군."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등받이에 몸을 기울였다.
"내란이 끝난다 한들 새로운 황제는 이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지 못할 거다. 이 말 아닌가."
"정확해. 늦든 빠르든 제국은 분열될 걸세. 사실 이미 분열되고 있지. 내일 당장 이 전쟁을 가정해보자고. 우리의 황자 전하가 승리한다면 어찌 되겠나? 바라늄트라소프를 따랐던 저 서쪽 땅이 어떻게 될까? 그 땅의 귀족, 백성들은?"
싸움의 끝에는 보상, 그러니까 승자의 권리가 따라 오기 마련이다. 설령 황자는 그것을 바라지 않더라도, 이제 그의 귀족과 백성이 될 이들을 용서하려고 할지라도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면 그들을 뭉뚱그려 나의 신하, 나의 백성이라 할 수는 없는 거야. 그 사실은 어느 쪽이든 이미 알고 있네. 그러니 더 필사적으로 싸우는 거고."
"뭐,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 아니겠나."
"아니. 시간이 흐르면 더 문제지."
"어째서?"
"황제가 이 거대한 제국을 어떻게 다스려왔는지 알고 있나?"
"모르는 거 알면서 괜히 물어보지 말게. 내 입으로 내가 무식하다고 말이라도 해주길 원하나?"
아드리안이 툴툴거렸다. 그러자 토어릭은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듯 손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
"군주들이지."
그만 놀리고 답을 알려주려 하는데, 느닷없이 상석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제국 곳곳에 영지와 군대를 가지고 머무르는 그들이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고, 혹은 불만들을 억제했지요."
하나하나가 나라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전력을 지닌 군주라는 존재들. 황제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세월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그 강대한 무력이 모든 것을 억압해왔다. 그것이 이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황제는 없지요."
당장 제국과 황실의 수호자라는 자가 음흉하게 암약하고 있는 판이다. 누가 새로운 황제가 되든, 제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혼란이 잇따를 것이고, 금방 사그라들지는 않을 터.
"저들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으니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겠지요. 제국은 이제 제국이 아니게 될 겁니다. 사실 이미 그렇지요."
저들은 알고 있으리라. 내일 당장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더라도 제국은 한동안, 혹은 아주 오랫동안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리라는 것을, 그러니 바깥에 쓸 여력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제국의 위엄과 영광이라는 것은, 이제 과거에 묻힐 일만 남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