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830화 (830/1,064)

830화

"말씀하신 대로, 조용히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보고를 마친 살라스는 바로 물러가지 않고 잠시 군터의 기색을 살폈다. 그 조심스러운 시선을 느낀 군터가 눈을 떴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괜찮겠습니까? 조금 더 단호하게 대처하셔야 하는 것이 아닐지."

"걱정되는 모양이군."

"걱정보다는…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할까요."

군터는 그날 밤 있었던 일을 모두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묻어버리기로 했다는 뜻이다. 밤중에, 인적이 드문 시 외곽에서 있었던 일이라 그날 출동했던 군졸들의 입만 다물게 하면 되었기에 소란을 묻는 것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걸로 된 걸까? 키리스트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함부로 이곳에 손을 뻗지는 못할 거라지만, 너무 안일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닐까. 살라스는 그런 우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 했다.

"분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누군가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어떤 이들은 감탄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혀를 찼을 것이다. 지금 살라스가 말하는, 분함을 느끼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안다면 말이다.

키리스트,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불경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마저 있지 않은가.

그런 자를 상대로, 살라스는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키리스트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칼이라도 뽑아 들 것 같은 기세였다.

"가라앉혀라."

"……."

"너 자신도 느끼고 있을 테지?"

두서없는 물음이었으나, 살라스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예."

새로운 팔을 얻었을 때부터 꾸준히 계속되어 온 신체적, 정신적 변화. 때로는 느꼈고, 때로는 느끼지 못했으나 가끔 돌이켜보면 그 커다란 변화를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으나,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레 변하기 마련인 것이다.

살라스는 자신의 변화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 들떠있는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할렌이 너처럼 변했는데, 너는 할렌처럼 변했어. 재미있군."

질책이 아닐 터인데, 살라스는 그 말이 질책처럼 들렸다. 그는 경솔하게 입을 놀린 자신을 반성했다.

"시정 하겠습니다. 하옵고."

"음?"

"보리스 공자 말입니다만, 그 녀석을 그대로 둘 생각인 듯합니다."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으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더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혹 다른 생각을 품은 것이 아닐지."

"다른 생각?"

"군주마저 탐내는 보물이 아닙니까. 호기심 정도는 가지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내버려 둬라."

"괜찮겠습니까."

"내 손을 떠난 녀석이다. 알아서 하겠지."

***

살라스가 돌아가고, 홀로 남은 군터는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갖게 된 습관이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겠지만, 이럴 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또렷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신을 관조하는 것이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자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타인이 되어,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다 지금처럼, 툭툭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하고 있지?'

'무엇을 원하나.'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 때문일 수도 있고, 생각 자체를 안 해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때는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자에 속했을 때가 있었으며,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후자가 되기도 했었다. 출세하겠다는 꿈, 혹은 목표가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예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건 마치 평생 눈을 감고 있던 이가 한순간 눈을 뜬 것과 같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밝은 세상의 존재도, 눈을 뜰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이가 한번 눈을 뜬 뒤로는 빛을 갈구하게 되는 것처럼.

공허함이 정신을 좀먹기 시작하면, 붙들고 버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 그렇기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하다.

군터는 그 의미를 자식들에게서 찾았다. 보리스와 실비아.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까지.

아직은 너무 약한 그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충분히 강해져서, 그늘 밖으로 나가도 괜찮게 될 때까지.

'글쎄. 그것으로 괜찮은가?'

근래 들어 종종 의문이 들곤 했다. 처음부터 어렴풋이 존재했던 것이나, 지금까지 모른 척 해왔을 뿐인 의문.

군터는 애써 그 의문을 무시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라져라.'

잡념을 지우는 것은 간단했다. 그에게 있어 정신을 통제하는 것은 이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으니.

"장군."

조용히 문이 열리고, 할렌이 들어왔다.

"시간입니다."

"그래."

친위대원들과의 훈련, 할렌이 지금처럼 다른 이름을 쓰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기 전부터 쭉 해왔던 일과다. 친위대원들 사이에서는 전통이라고 불리는 듯했다.

섬기는 주인과 함께 땀을 흘린다는 것.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일을 그들은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들의 굳건한, 어떤 이들은 비정상적이라고까지 말하는 충성심은 이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네 자리를 찾은 듯하구나."

"아직입니다."

예전 이 훈련을 이끄는 것은 할렌이었다. 그러니까, 할렌이 할렌이었던 시절에 말이다.

지금은 다른 몸과 이름을 쓰고 있지만, 할렌은 예전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본인의 말처럼 아직일지라도.

"곧이겠지."

할렌은 덧붙인 말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변의 의심 섞인 시선에 실력으로써 답하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것이어야 할 자리를 찾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군터는 확신했다.

***

카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의지위, 하는 일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전에도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아무리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주변에서 인정받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저 허투루 하지 않는 것과 최선을 다하는 것은 차이가 컸다. 카인은 정말 열과 성을 다했다. 누가 보더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적당히 하게나.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열심히 해야지. 최소한 그동안 쉰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나."

"쉬고 싶어서 쉰 것도 아니잖나. 자네 사정이야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과거 가문과 원한이 있었던 자들의 습격.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어 치료하면서 칩거. 한 달이 넘게 사라졌던 핑곗거리로는 궁색하지만, 보리스를 비롯한 윗분들이 그렇다고 하니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실제로도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기도 했고,

"오늘도 일찍 들어가나?"

"자네 말처럼, 아직 몸이 성치 않아서 말이네."

"그런 사람이 이리 몸을 막 굴리나?"

"펜대만 놀리는 일인데, 막 굴리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나."

"하여간 말은."

카인은 업무뿐만이 아니라 그 외적인, 지금 같은 대인관계에서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이런 그의 변화를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다 적응하고 반기고 있었다.

그동안 카인에 대한 인식은 잘났고, 모나지 않았으나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몰락 귀족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제껏 그의 인간관계는 주로 그를 어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윗사람들과의 친분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큰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사람 자체가 부드러워졌다. 여유도 생긴 듯했다. 이전에는 그와 말을 섞는 것도 어려워 했던 이들이 조금씩 그에게 다가왔다.

"나중에, 몸이 괜찮아지면 그때 한잔하도록 하지. 지금은 주치의 선생이 두려워서 안 되겠군."

"하하. 그래. 그러세. 몸조리 잘하게."

업무를 마친 카인은 솔롬 시가지에 있는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본래 있었던 외곽지의 집을 팔고, 여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카인은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이어갈 만큼 대담하지는 못했다.

'지켜보는 눈이 있을 테지만.'

감옥에서 나왔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으나 카인은 지금도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정확히는 감시 겸 보호겠지만.

"아직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군요."

"그렇습니까?"

"예. 당장 제 눈에 보이는 이들만 다섯입니다. 아마 더 있겠지요."

레온의 말에 카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다섯이라. 짐작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러움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크렘보르 장군은 비할 자 없을 만큼 대범한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요."

"말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솔롬 안이라면 어디에 서든."

"그렇습니까?"

"지나다니는 이들 가운데도 그분의 눈과 귀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 한들, 하고 싶은 말은 해야지요. 추궁할 것은 다 했다 들었습니다. 카인님은 결과적으로 용서받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글쎄요."

"사람을 가릴 때는 신중하게 가리되, 한 번 믿기로 했다면 끝까지 믿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머리로 아는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른 법입니다."

"안 그래도 배워가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어렵군요."

"하하.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분께서 벌써 익숙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카인은 아직 때가 덜 타도 한참 덜 탄 청년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몸이 성치 않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약속을 거절한 그였다. 하지만 애초에 크게 다친 적이 없는데 몸이 성치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약속을 거절한 것은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그의 생각에,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이런 곳에 써야 한다.

"제가 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비싼 곳에서 했어도 됐을 텐데요.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제법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그랬겠지요. 하지만 이래야 그나마 제 마음이 편해서 그렇습니다."

그 뒤로는 몇 번이고 반복했던 대화가 다시 오갔다.

어찌 은인에게 크게 얻어먹을 수 있겠느냐, 먼젓번에는 카인님이 크게 사시지 않았느냐, 하는 등의.

'내게는 사람이 부족하다.'

어찌어찌 그늘에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늘이며, 당장은 기댄다 해도 결국은 믿을 수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온전한 자신의 힘뿐.

그것을 알기에, 카인은 레온이라는 청년을 더 조심스럽게 살피고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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