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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29화 (829/1,064)

829화

"변명하지 않는군."

"어떤 이유에서든, 신뢰를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거짓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다 말하지 않았을 뿐. 뭐 이런 건가?"

"노하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난 화나지 않았네. 조금 실망했을 뿐."

보리스는 '높으신 분'치고는 제법 담백한 자였다.

무가의 자제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보리스는 그런 것치고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말이나 행동에 꾸밈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니 지금 하는 말도 그의 본심이라고 봐야 하리라.

"떨쳐버리고 싶었겠지. 두렵기도 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저 머나먼 곳에서의 사정 때문에 내 아래로 들어온 사람을 내치는, 그런 겁 많은 비겁자로 보였나?"

고마운 말이다.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카인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입을 닫고 보리스 크렘보르의 너그러움을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카인은 희망적이었다. 만약 보리스의 노기가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올랐다면, 자신을 버리기로 했다면 굳이 그 음습한 감옥에서 멀쩡하게 빼내 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독대할 필요는 더더욱 없을 테고,

"자네는 명석한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자네와 이렇게 독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고 있겠지?"

"……."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의 능력보다. 그 신분을 보고 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휘하에는, 아니 크렘보르의 휘하에는 온통 이 지역 출신뿐이라네. 그들에게는 이 북부가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야. 시야가 협소해서일까, 사고방식도 한계가 있지. 하지만 자네는 달라."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니야. 내가 자네를 괜히 곁에 두었던 것이 아닐 세.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그 독특한 견해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나는 자네의 그 특별함을 높이 평가하네."

그즈음, 담담하던 보리스의 목소리에 냉기가 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 자네의 말처럼, 자네는 내 신뢰를 잃었네. 믿지 못하는 자를 계속 곁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자기변호는 하지 않는가?"

"구차한 변명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후회스럽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그렇다고 뻔뻔해질 생각은 없습니다."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네. 떠나기를 원하는가?"

"아닙니다."

"아, 잘못 물었군. 이곳을 떠나는 순간 그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길 텐데 말이지."

"……."

"좋아. 이렇게 하지. 난 이제 자네를 믿지 않지만, 자네의 능력은 믿네. 그러니 그 능력을 힘껏 쓰도록 하게. 쓰임새를 증명하라는 말이지."

"그리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어떻게 들렸을까. 담담하게 들렸을까? 아니면 결연하게 들렸을까. 카인은 되도록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더할 것이 아닌가.

보리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정확했다. 이곳에서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이곳을 떠나는 순간, 크렘보르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냥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 두려워서였다.

"……."

카인은 죄인처럼 몸을 낮춘 채, 조용히 보리스의 집 무실을 빠져 나왔다. 지나가는 관리, 하인들의 눈길이 한 번씩 머물다 떠나갔다. 아무도 말을 걸거나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카인은 그 모든 눈길 속에서 모멸감을 느꼈다. 마치 저들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도망자 신세는 익숙하지만, 이건 그것과 다른 의미로 곤욕이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카인은 애써 담담함을 가장했다.

'신뢰를 잃었다면, 다시 얻으면 그만이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싸구려 여관방에서 몸을 누이고 돈 몇 푼 받아가며 노래를 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 상황은 훨씬 나은 편이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시 시작하면,

'하지만 그 전에.'

만나봐야 할 자가 있다.

***

사냥개에게 뜯기기 전에 그를 구했던 것은 살라스였으나, 살라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를 지켰던 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청년이었다. 얼핏 보아도 실력이 출중해 보였고, 거기다 술법인지 뭔지 모를 신비한 힘까지 구사했으니 당연히 살라스의 눈에 띄었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럴듯한 지위를 얻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구명의 은혜에 대해 감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어째서 생면부지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는지도 묻고 싶었다.

"레온이라 합니다."

그 청년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평소 친분을 쌓아놨던 관리를 통해 수소문하니 하루도 되지 않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카인이라 합니다."

카인은 자신의 이름을 레온이라 밝힌 청년을 표나지 않게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준수한 외모였다. 북방계 특유의 느낌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에서 온 이는 아닌 듯했다.

"도움을 받은 자리에서 바로 감사를 표했어야 하는 데, 그 이후로 내 사정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을, 개의치 않습니다. 감사 인사를 받고자 카인님을 도왔던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부족한 실력이지만, 나름대로 품은 뜻이 있기에 열심히 갈고닦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의에 눈감는다면, 지난 세월 들인 노력을 배신하는 셈이지 않겠습니까. 저로서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카인님이 그리 과하게 감사하실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카인은 잠깐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빡였다.

약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카인은 이 레온이라는 청년이 어떤 자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자가 있는가.'

옛날. 그러니까 카라누르가 황제의 치세 하에 제국으로서 본격적으로 발돋움하기 전, 세상에는 무수한 국가와 도시가 난립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립이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국가의 통제력이라고 해도 한 개 도시, 내지는 두어 개 정도 되는 도시에 미치는 것이 고작이었던 시대. 제국에서는 야만의 시대라고 일컫는 그 시대에는 수도 자, 혹은 구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수행하고 연구하는 자들.

지금으로 치면 술사들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조금 달랐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성의 차이였다. 지금이야 지식이 모이고 모여 어느 정도 정형화가 되었으나,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한 사람, 내지는 한 사람을 필두로 한 원시적인 형태의 학파가 전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도 있었다. 술사면서도 무술을 수련한다거나, 아예 무술을 수련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그러기 위해 조용한 곳에서 수련만을 거듭하다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수준을 시험하고, 때가 되면 다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카인은 눈앞의 레온이라는 청년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이런 자가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게 아니고는 지금 들은 말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기묘한 힘 역시도.

"제 사고관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앞에 두고 돕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저도 그랬을 뿐입니다."

"보통 사람은 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습니다."

"호기가 지나쳤다고 말씀드리면 되겠군요.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특히 젊은이가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레온의 그 경솔함이 목숨을 구했으니, 카인은 그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레온님은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하셨으나, 저는 아닙니다. 큰 도움을 받았으니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지요. 그러나…지금 제가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미리 준비한 주머니가 있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이 챙겨 넣은 주머니가.

하지만 이렇게 레온이라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대충 어떤 자인지 파악하고 나자 주머니를 꺼내기가 힘들어졌다. 어쩌면 이 청년은 자신의 성의를 모욕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정말 그가 그의 마음에 따라, 선의로 자신을 도운 거라면 말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음을 따라 한 일에 대가를 받는다면 오히려 제 마음이 불편해질 겁니다. 감사라 한다면,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이상은 원치 않습니다."

"그 말씀이 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군요."

"예?"

"아닙니다. 그럼, 오늘 하루만은 제가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는 술자리.

레온은 기름진 음식과 종류가 다양한 술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짙게 화장한 여인들이 동석할 즈음에는 얼굴을 붉히며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카인은 그런 레온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인은 레온이 정말 어렸을 적부터 스승과 함께 인적이 드문 곳만 전전하며 수행을 거듭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이 순진한 청년은 아직 도시가 낯선 듯했다.

***

"어땠습니까."

"의미 없는 물음이구나."

보리스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로우렌이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지요. 달리 선택지도 없었을 테니."

보리스가 그런 로우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악취미다."

"공자께서 마음이 너무 약하신 겁니다."

"마음이 약하다? 내가?"

"아닙니까? 그 녀석은 공자를 속였습니다. 직접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속인 게 속이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지요. 보통 이런 경우. 혹독한 벌을 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정말로 녀석이 아직도 숨기는 것이 있다고 보느냐?"

"모르지요. 모르니까, 확인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잊지 마십시오. 자그마치 그 키리스트가 연관된 비밀입니다. 그림자 검사단이라고 했던가요? 군주 직속정예들이 이 먼 곳까지 쫓아와 매달릴 정도라면 그 귀중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보리스가 대꾸하지 않자, 로우렌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적의 목을 베는 데는 가차 없는 사내가 꼭 이런 쪽에서는 소심해진다. 아니, 소심해진다기보다는 머뭇거림이 많아진다고 해야 할까.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크다고 봐야 할 텐데, 이런 점은 어떻게 보면 장점이지만 어떻게 보면 단점이다.

"일단은 두고 보십시오. 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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