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8화
"당신도 마찬가지인가?"
[의미를 더 명확히 해줬으면 좋겠군.]
"키리스트가 원하는 물건, 그걸 당신도 원하느냐는 말이오."
[물론, 자유롭고 싶은 것은 모든 존재의 본능이야. 본질일지도 모르지.]
"그런 것치고는, 찾으려 애쓰는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어떻게든 찾으려고 안달이 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줄카는 줄곧 헤이모라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말, 혹은 마음에 거짓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자는 어째서 이리 태연하고 여유로운 것인가.
[물속에 잠긴 자그마한 티끌을 건지려는 것과 같지.]
"음?"
[건지려고 손을 넣으면 물살이 인다.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은 그 물살을 타고 도망쳐버려. 그래서다. 내 손에 들어올 운명이라면 결국 들어오게 될 터. 아니라면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지.]
"운명론자였을 줄은 몰랐군."
줄카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만큼은 꾸며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군터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진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한때, 난 내가 내 운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나 역시도 거대한 흐름에 속해있는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너도 언젠가 느끼게 되겠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마치 나이 지긋하게 먹은 노인이 젖살도 안 빠진 아이를 보며 훗날 이럴 것이다, 저 럴 것이다며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이곳에 온 목적은 이루었으니.
'언약비라.'
맹세라는 것이 얼마나 구속력을 갖는지는 모르지만, 줄카의 말을 들어보면 그 강제력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스스로 목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바로 돌아가나?]
"그럴 생각이 오만."
[답해준 값은 치러야지 않겠나. 시간 좀 내지.]
줄카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몸을 일으켰다.
***
군터가 돌아간 후, 점점 색이 짙어지는 노을을 보던 중.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음?]
줄카는 옆에서 들려온 아라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아라얀은 늘 한 몸처럼 쓰고 다니던 투구를 벗은 채였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인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마치 아바시스의 이족 같았다. 뱀의 비늘같은 것이 피부를 덮고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너무 여유 부리고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말을 하려는 거겠지?]
"……."
아라얀이 줄카를 섬긴 것이 백 년이 조금 넘었다.
평생을 함께한다는 부부조차 넘볼 수 없는 세월을 그와 함께 한 것이다. 그런 만큼 아라얀은 당연히 줄카를 잘 알았다. 하지만 줄카는 그 이상으로 아라얀을 잘 알았다. 이 충직한 수하가 하는 생각쯤은 말투나 몸짓, 표정만 봐도 다 읽을 수 있었다.
[너도 들었잖느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고, 느슨하게 한다고 안 될 일도 아니다.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 그럴 필요가 없기에 서두르지 않을 뿐.]
"하지만 황도의 노괴는 사냥개들을 풀었습니다. 멍청한 거인은 모르겠으나 환야, 그자는 필시 움직이고 있을 테지요."
[그렇겠지.]
줄카는 어떤 면에서는 키리스트, 그 노괴보다도 더 음침한 칼잡이를 떠올렸다. 키리스트와 결탁하여 움직이고 있을 그 녀석은, 지금쯤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가고 있을 터였다. 거느린 세력이 없기에 그만큼 자유로운 녀석이니까.
[그래도 상관없다.]
"어째서입니까?"
[덩치 녀석도 바보는 아니니까.]
"예?"
[정국은 노괴가 주도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자콥녀석이 기세등등하니 균형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지금 당장일 뿐이지.]
거기까지 들었을 때, 아라얀은 이해했다. 그의 주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은 자콥 트라소프가 건재하다. 하지만 황도의 노괴가 수작을 부리는 이상, 그의 승리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대로 간다면, 늦든 빠르든 결국 그는 무너질 것이고 제국은 노괴의 뜻대로 무너져갈 터.
[그 늙은이의 속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의도를 짐작만 할 뿐, 그 속에 무슨 마음이 차 있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건 나도, 덩치 녀석도 예외가 아니다.]
덩치. 당연히 아간투스베록을 이름이다. 환야와 마찬가지로, 지금 그는 키리스트에게 협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협력관계가 과연 얼마나 갈까?
[물론 약속받았겠지. 우리에게 거짓은 없으니, 늙은이는 분명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언제나 다음이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덩치 녀석도 야심이 있단 말이지. 협력관계라고 해도, 어느 쪽이 우위인지 모를 녀석이 아니다. 당연히 인정하기 싫을 테고, 불만이 있겠지.]
그리고 그 불만은 지금도 더 커지고 있을 것이다.
황제에게 굴종하는 것도 탐탁잖게 생각했던 녀석이 아닌가. 그런 녀석이,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자에게 굽히고 있으니 얼마나 굴욕적이겠는가.
억지로 맺은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그렇게 되기 전에 언약비가 노괴의 손에 들어가면 어찌합니까?"
[그렇게 되면 별수 없지.]
"예?"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만들 수는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세와 재물을 가진 자라면 세상만사를 마음 내키는 대로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틀렸다.
권세와 재물을 가진, 소위 권력자라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자들이라면, 정말 그러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틀렸다.
저 큰 존재일수록 더 큰 그물에 갇히는 것일 뿐이다.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 단적으로, 홀로 백 명의 목을 꺾을 수 있는 자신조차도 똑같이 숨 쉬는 데 얽매여야 하지 않는가.
'아아. 그렇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줄카는 아라얀과의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형태만 갖춘 터가 눈에 들어왔다.
'요람인 줄 알았더니, 무덤이었나.'
결이 안 맞기로 따지면 키리스트가 으뜸이었지만, 이해가 안 되기로 따지면 쿠엘단이 최고였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으니까.
그런데도 사이가 비교적 가까울 수 있었던 것은, 통하지 않는 것이 압도적이었으나 간혹 정말 완전하게 통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는 쿠엘단이 남겨놓은 것을 비로 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혼자서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둘 다인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다 보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보였다. 그녀석은 이 도시 같지 않은 도시를 세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흥분되고 기뻤겠지.'
괴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괴짜가 부러워졌다. 정말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는지, 누리고 있는지는 모른다. 평생 미지를 갈구하다가 진정한 미지로 떠나버린 녀석. 하지만 그 녀석은 어쨌거나 굴레를 벗어났다. 진정 자유로워진 것이다.
헤이모라에 왔을 때. 그리고 주인이 사라진 도시에서 다 사라져가는 흔적을 더듬었을 때. 그는 아주 오랜만에 감상에 젖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것인지.'
죽지도, 사라지지도 못하는 망령이 되어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꼴이라니.
'너는 진즉 알았겠지.'
그래서 누구도 생각지 않은,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줄카는 곧 실소하며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인가.'
너무 감상에 젖었던 모양이다. 한 번 물꼬가 트이니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줄지어 새어 나온다.
본래 미친 녀석이었다. 그래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것을 생각했을 뿐. 이제 와 그것이 부러 워 보이는 것은 그저 세월이, 상황이 이토록 짐작할 수 없게 흘러 그러할 뿐인 것이다.
'그곳에서는 네가 원했던 것을 얻었기를 바라지.'
태양이 지고 어둑해진 하늘에는 어느새 달이 떴다.
***
"운이 좋군."
"그렇소?"
얼굴을 익힌 간수의 말에 카인이 되물었다. 그러자 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들 중 살아서 나가는 이들은 몇 없소. 특히 사지 멀쩡하게 나가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
"물증이 확실한 이들만 들어오는 모양이군."
"글쎄."
간수는 비릿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시 볼 일이 없길 바라야겠군."
"같은 생각이오. 보아하니 공자께서 그대를 상당히 아끼시는 모양인데, 나 같은 사람은 높으신 분들의 관심이나 눈길을 받는 것이 영 껄끄럽거든."
"그런 말을 대놓고 해도 되는 거요?"
"흐흐.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소. 장군에 대한 충성심만 굳건하고, 할 일만 잘한다면 바깥에서 돌아가는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군."
카인은 담담히 대꾸하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 달이 넘게 있었지만, 이곳의 공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곳은 단순히 음습한 것을 넘어, 뭐랄까…불길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방금 간수가 말했듯,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어 나갔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신세 많이 졌소."
"고생했소. 다시 볼 일은 없길 바라지."
수감 되었던 자와 간수가 이렇게 짤막한 인사라도 나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카인이 비록 한 달이 넘게 이 불길한 곳에 갇혀 있었으나 그 외에는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아는 것을 술술 털어놓았고, 신분을 감춘 것 외에는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고생했군."
"공자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보리스 크렘보르가 따로 손을 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나오지는 못했으리라.
"섭섭하긴 하군."
카인은 허리를 접다시피 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해하네. 자네의 사정이…아무래도 일반적이지는 않았으니."
"알고 계십니까."
"그래. 들었지."
얼핏 듣기에 보리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까지 그러할지는 모를 일.
카인은 입을 다문 채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