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화
"할렘이 불길에 뒤덮였을 때, 저는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불이 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어 있었습니다. 반쯤 이성을 잃고 출구로 달리던 중, 앞쪽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살라스는 카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그의 기색을 살폈다.
떨리는 눈과 목소리. 이마에서부터 내려오는 몇 줄기 식은땀까지. 꾸며낸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의도적으로 불을 놓고, 출구를 틀어막았다는 거군."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를 노리는 자들이 있음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황제를 지키던 병력 중 일부가 돌아섰다는 것도."
"그 일부가, 저 아래 갇혀있는 놈들인가?"
"일부의 일부지요."
"키리스트가 황제를 쳤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키리스트의 이명이 무엇인가. 제국의 검, 황가의 수호자 아닌가. 그런 자가 황궁 안에서 불길이 치솟게 두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카인의 말처럼 키리스트가 황제를 쳤거나, 아니면 반역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도 방관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야 말이 된다.
"믿기 힘드실 것을 압니다."
제국민들에게 황제는 절대적인 존재다. 원신의 대리자로서 세상에 강림한,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바로 황제다. 제국의 적들은 그런 맹신을 비웃지만, 제국민들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의 믿음은 확고했으니.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군주들 역시 황제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절대적인 승상의 대상이었다. 황제가 신이라면 군주들은 그 신이 부리는 사도 정도로 여겨졌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월을 멀쩡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는 제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누구도 그들의, 제국에 대한 헌신과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의심 자체가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카인은 살라스가 자신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짐작했다. 대뜸 표정을 구기며 욕설이나 날리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짐작과는 달리 살라스는 카인의 말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여겼다.
'키리스트가 반역에 가담했다?'
그가 제국의 일반적인 국민이라면 경기를 일으킬만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첫째로 그가 제국과 황제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둘째로 이미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어렴풋이나마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7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군터와 이런저런 비밀을 공유했다. 그뿐만 아니라 7황자의 진영에서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황도에 파리를 튼 흑막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군터처럼 직접 들어서 아는 이들도 있었고,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의심하기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서?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왜 사냥개들이 이 먼 곳까지 자네를 쫓아온 거지? 목격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살라스의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왜지?"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다만."
"다만?"
"…여기서부터는 제 짐작입니다. 제 생각에 그들은, 단순한 반역을 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잠잠하게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그들은 황제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황제가 소유한 무언가를 빼앗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보물일 수도 있고, 어떤 신비한 힘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게 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황제가 숨겨둔 것을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날. 누군가 밖으로 빼돌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겠군."
"……."
카인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 후, 살라스는 몇 가지를 더 물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으니 일단 보고부터 할 참이었다.
***
살라스의 보고를 들은 군터는 생각에 잠겼다.
'황제를 죽여서 얻으려고 한 것?'
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큰 차이는 없다. 군주씩이나 되는 자가 얻으려고 한 무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
그 역시, 살라스처럼 카인이라는 녀석이 털어놓은 내용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나 군터는 군주라는 자들을 직접 대면한 적도 있는 만큼, 최초의 군주라는 자가 탐낸 것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아직 다른 놈들이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만……."
살라스는 카인이라는 녀석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무턱대고 놈의 말을 믿을 수는 없는 일.
가장 확실한 것은 황도에 정보원을 보내는 것일 테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들은 척 넘길 수도 없는 일이지.'
이미 야밤에 성벽을 넘어 들어온 놈들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외곽이라고는 하나 도시 안에서 병사들을 상대로 칼부림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런 놈들이 조용히 덮고 넘어간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조용히 덮고 넘어갈 생각도 없지만.
"잠시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놈들이 다시 움직인다고 해도 황도에서부터 이 먼 북쪽 땅까지 오려면 적잖은 시일이 걸릴 터. 그러니 그 전에 확인부터 해야 한다.
"어디로 가십니까?"
"헤이모라."
***
줄카는 아직도 주인이 사라진 적막한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헤이모라의 관리는 군터의 일이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그렇게 알려진 것일 뿐, 줄카와 자콥 트라소프 간의 거래가 맺어진 후로 헤이모라는 줄카가 다스리는 땅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잊은 모양이군. 이곳은 내 관할구역이오."
군터의 퉁명스럽게 느껴지는 대꾸에 줄카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오랜만인 것 아닌가.]
"의미 없는 말장난을 왜 하는 거지?"
[네 말대로 말장난일 뿐. 장난을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무료하기 때문이겠지.]
아닌 게 아니라,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는 줄카가 느끼고 있는 무료함과 권태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렇게 무료하다면 왜 아직도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거요."
[무료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보다, 무슨 용무인가.]
줄카가 웃음을 거뒀다. 꾸며낸 웃음이 사라지는 것은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그림자 검사단이라는 놈들이 내 땅에 숨어들어왔소. 키리스트의 사냥개라고 하던데."
[놈들이 왜? 네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 나와는 상관없소. 근래에 서기로 들어온 떠돌이가 한 명 있는데, 놈을 쫓아온 것이었지."
[서기? 이해가 안 되는데.]
"황제의 할렘에 있던 놈이라더군. 황제가 죽던 날에도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고."
[…….]
표정은 진즉 얼굴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줄카의 얼굴은 왜인지 모를 섬뜩함까지 자아냈다. 군터는 표정 변화 없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가만히 답을 기다렸다.
[그래. 용케도 목숨을 건졌나 보군.]
"녀석이 말하길, 키리스트의 사냥개들이 자신을 쫓은 것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라더군."
[무언가…라. 그 녀석도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군.]
"모르는 것일 수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군터는 카인이라는 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숨어들어온 놈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는 심지어, 카인이라는 놈이 다른 곳의 첩자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건가? 그 늙은이가 찾고 있는 것이 그 무언가가 뭔지 궁금해?]
"그렇소."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나도 그러고 싶소. 하지만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말려들어 버린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 그렇기도 하겠군.]
줄카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듯, 길게 끄는 것도 없이 그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 늙은이가 찾는 것은 언약비일 거다.]
"언약비? 그게 뭐지?"
[황제에게 우리가 한 맹세. 아니, 놈과 맺은 계약을 새긴 물건이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우리는 황제를 따를 것을 맹세했고, 그 대가로 영생을 얻었다. 말 그대로 계약이었지. 언약비는 그 계약의 증거이자, 매개체다.]
익숙한 표현이 등장했다. 매개체. 모페이브나, 다른 술사들에게서 많이 들은 표현이었다.
[언약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는 목줄이나다름없다. 자유를 잃고, 운명을 강제당하지. 그 음흉한 늙은이가 사냥개들을 풀어가면서 찾을 물건은, 내 생각엔 그것뿐이다.]
"뜻밖이군."
[뭐가 말이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말이오."
[세간에 널리 퍼진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신의 뜻을 전해 받은 황제가 그의 자발적인 추종자들과 함께 신의 뜻을 퍼뜨리는?]
축약이 많이 되긴 했으나, 줄카가 비웃은 그 내용이 바로 제국의 건국사였다. 그런데 그 전설적인 역사의 주역이 자신의 이야기를 부정했다.
[뭐, 정말 그런 부류도 있긴 했지. 대의니 뭐니 하면서 어린 녀석들처럼 꿈을 꿨던, 그런 자도 있긴 했어. 하지만 난 아니었다. 리비암에 있는 늙은이도 아니었고.]
줄카가 조소했다.
[그래. 네가 잡아들였다는 그놈들이 늙은이의 사냥개이듯, 우리는 황제의 사냥개였다. 자유를 잃고, 먹이를 받았지. 처음에는 그저 배가 부른 것에 안도하고 만족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내 마음대로는 앞으로 쭉 달려나갈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되면 남는 것은 분노뿐이야. 더군다나.]
줄카가 검지를 쭉 피더니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황제는, 그가 준 힘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바꿔놓을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이 변질됐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후였지.]
마음에서 피어난 조용한 분노가 머릿속에서 물결쳤다.
[어떤 녀석이 이르길, 이건 차라리 저주라고 하더군. 그 말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유리처럼 투명하던 두 눈에 음울한 그늘이 감돌았다.
[늙은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 그자가 언약비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수백 년 동안 자신을 짓누른 저주를 벗어던지고 싶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