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화
"뭐?"
간밤에 침입자로 인해 소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군터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으나 그게 전부였다. 굳이 감상이라고 한다면 그간 너무 조용하기는 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 침입자라는 놈들이 얼마나 조직적이었기에 살라스가 직접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을 뿐.
그러나 짤막하게 끝날 줄 알았던 살라스의 보고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면서, 군터는 이게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예사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는 각인을 새기고 있더군요. 술사들에게 일러 조사하게 했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살펴보기는 했을 터.
그런데 아직 성과가 없다는 것은, 그 침입자 놈들의 각인이 솔롬의 술사들이 모르는 부류의 것이라는 뜻. 즉,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다. 물론 그 이전에, 일개 도적놈들이 각인의 힘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니 그 침입자라는 놈들이 살라스의 말처럼 예사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겠고.
"아바시스 놈들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이유는?"
"놈들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가 물러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설령 다시 움직였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도발을 걸어올 리 없습니다."
군터는 잠깐, 일전에 아바시스의 군대를 이끌었던 적장을 떠올렸다. 뱀 인간. 나가라고 했던가? 이름이 분명 가르비아였을 것이다. 독특한 외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모로 인상적인 면모가 있던 자.
머리 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살라스의 말처럼 이런 식으로 어설픈 도발을 걸 인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밖에 알아낸 것은 없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뭐지?"
"카인이라는 자를 알고 계십니까?"
"……?"
"근래에 보리스 공자가 대동하고 다니는 젊은 서기입니다. 황도 귀족 가문 출신의."
"알 것 같군. 그런데 왜 갑자기 서기 이야기를 하느냐."
"침입자 놈들이 노리던 것이 그 서기였습니다."
침입자 놈들이 노린 것이 일개 서기라. 아니, 일개서기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겠으나, 어쨌거나 황도 귀족이 아닌가. 뭔가, 황도에서부터 이어진 은원 같은 것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말이다.
"해서, 그자를 신문하고자 합니다."
"하면 될 일 아니냐."
"보리스 공자가 그자를 총애하는 듯하여……."
"거칠게 할 생각인 모양이군."
살라스가 잠시 말을 고르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석연치 않은 느낌입니다. 말씀드렸듯, 침입자 놈들은 예사 놈들이 아니었습니다. 황도 귀족이라 한들, 황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그런 놈들을 보낼 정도라면 사정이 있어도 평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해야지. 보리스가 네게 뭐라 할 것이 걱정이더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살라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 허락을 구하는 살라스의 표정만 봐도,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려하는 자들이 많더군요."
"그런가?"
"생각하시는 이상일 겁니다. 공자의 수완이 이 정도였을 줄은 소관도 미처 몰랐으니까요."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살라스는 다 무시하고 생각 대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랫것들을 비롯해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컸다는 것이겠지. 즉, 보리스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
여느 권력자였다면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식이고 후계자라고 해도, 그건 자신의 사후를 맡길 대상이라는 뜻이지 생전에 권력을 나눌 대상이라는 뜻은 아니기에.
그러나 군터는 개의치 않았다. 일전에 토어릭에게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으니까.
"개의치 마라."
"예."
허락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살라스는 사로잡은 침입자 세 명과 함께 카인이라는 서기를 신문하겠다고 했고,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독한 놈들입니다. 이제껏 독종이라고 할 만한 놈들을 한둘 봐온 것이 아닙니다만…이 정도로 지독한 놈들은 처음입니다."
도구를 가지고 방에 들어설 때만 해도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감을 내비쳤던 기술자는 한참이 지난 뒤 낭패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살라스는 고개를 떨어뜨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르게,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다 내려놓은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침입자 놈들을 봤을 때부터.
"뭔가…어떤 술법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근거 있는 소리인가?"
"그,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반응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무능을 핑계로 덮는 건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니지."
"소, 송구합니다."
고개 숙인 기술자를 일단 돌려보내고, 살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짧은 시간 안에 침입자 놈들을 토설하게 하는 것은 힘들 듯했다. 아니,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고 해도 뭘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정말 술법으로 금제라도 걸려있는 것이라면 단순한 고문을 반복하는 건 헛수고일 뿐일 터.
'조언이라도 구해봐야겠군.'
술사들의 조언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에 모페이브와 나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런 쪽의 지식에 더 해박한 쪽은 음지의 지식을 연구했던 이들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살라스는 모페이브와 나짐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조금 나중에 해도 될 일이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침입자 놈들을 가둬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지하와 지상의 차이는 있었으나, 분위기는 별로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저는 지금 죄인의 신분인 것입니까?"
"글쎄.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젊은 서기는 갇혀있었으나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좁은 실내도 그럭저럭 깔끔한 편이었고, 아침 식사도 일러두었던 대로, 부족함 없이 배급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서기, 카인은 담담한 기색이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러시리라 생각합니다."
"순순히 답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래 줄 텐가?"
"그리 하겠습니다."
"좋아."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살라스는 기뻐하거나 흡족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차피 당장 무슨 말을 들은들.'
믿을 수 없다. 최소한 침입자 놈들을 입을 열어서 놈들의 말과 대조라도 해보기 전까지는.
"그전에 한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사냥개…아니, 침입자 놈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셨지요?"
"……."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놈들에게서 무언가를 듣는다는 건…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단언하는군."
"그렇게 길러진 놈들입니다. 입이 있으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놈들이지요. 사람이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사냥개 같은 놈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냥개들의 정체는?"
"그림자 검사단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순간. 살라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음 듣는 이름도 아니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헤이모라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을 때였다.
제국의 그늘에서 움직인다는, 군주 키리스트가 부리는 하수인들. 작게나마 이미 한번 충돌한 적이 있기에, 또 언젠가 다시 부딪치게 될지도 모를 자들이기에 살라스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할 수 있는 만큼 수집했다.
'대단한 것은 없었지.'
군주의 하수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일을 주로 처리하는 이들이기에 그들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그렇기에 수집한 정보도 기껏해야 세간에 알려진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이건 솔롬이 황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벽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보원들을 푼다고 해도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인근 몇 개 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작정하고 더 깊게 파고들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묻어두었던 이름을 이렇게나 빨리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그림자 검사단? 그들이 어째서 자네를 쫓은 거지? 귀족이라고 해도 몰락한 가문의 생존자에 불과한데."
당사자 앞에서 몰락한 가문의 생존자 운운하는 것은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살라스는 카인이 불쾌해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귀족이든 뭐든, 지금은 일개 서기일 뿐이다. 아주 큼지막할 것으로 짐작되는 구원(舊怨)을 솔롬에 끌어들인, 상당히 발칙한 서기. 자연히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다.
"사실, 저는 귀족이되 귀족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지?"
"저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몸입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가문을 떠나 황궁으로 들어갔지요. 볼모로서요."
"아직 한참 부족한듯한데."
"볼모로 들어갔으나, 귀족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했습니다."
"……."
"황제가 각 가문들에게 볼모를 요구한 것은 그들의 변절을 우려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충성의 증표를 받고자 했을 뿐."
카인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시험하고 드높이는 것에 관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이런 무리한 요구에 휘하 귀족 가문들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을 수 있음을 알았으나, 그럼에도 이런 강압을 이어갔다.
물론 그런 황제도 약간의 융통성은 발휘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끝없는 굴종이었고, 귀족 가문들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황궁으로 자식들을 보내야 할 때를 대비하여 미리 양자를 들이곤 했다. 이쯤되면 한 편의 연극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으나, 황제는 이 어설픈 연극을 용인했다.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터져 나오는 귀족들의 불만을 억누르지는 못했으리라.
"그런데 자네는 왜?"
"가문 내에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정도로 말씀드리지요."
"좋아. 넘어가지. 그래서?"
"볼모라고는 하나, 어차피 가문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가문에서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인데 황궁에 서라고 특별히 신경 써줄 이유가 없었지요."
어린 나이에 황궁에 들어간 카인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귀족답지 않은 생활을 해야 했노라 고백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용모가 썩 봐줄 만했던 덕에 험한 일은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험한 일을 피한 대신 다른 쪽으로 일을 해야 했지만.
"황제의 할렘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얼핏 들어는 본 것 같군."
"황제는 모든 욕망을 탐닉했습니다. 여색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의 할렘에는 수천이나 되는 궁녀가 있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신인이라 불리는 황제라도 그들을 모두 돌볼 수는 없었다. 방치되는 여인들이 있었고, 할렘이라는 새장 안에 갇힌 그녀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풀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목숨이 아깝지 않던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황궁에서 비참한 신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들어갈 그늘이 필요했지요. 게다가, 할렘은 황궁 안에서도 손꼽히는 금지였기에 외부인이 할렘 내부의 사정을 살피기는 힘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본론은 나오지 않았으나, 살라스는 카인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황궁의, 아니 황제의 비사라면 비사였다. 그 황제 말이다.
제국 벽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게다가 심지어는, 한때 제국을 등지기도 했다. 그런 살라스였기에 황제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름의 무게나, 존재감을 모르지는 않았다. 황제가 제국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이의 비사가 아닌가. 아무리 살라스라고 해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늘어지는 카인의 말을 끊지 않고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저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한 한 궁녀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황궁에서 세월을 보냈지요.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날?"
"황제의 최후에 대해 들은 적 있으십니까?"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그는 할렘에서 죽었습니다. 황제가 최후를 맞은 그날. 그러니까 할렘이 불타던 날, 저는 그 지옥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던 카인의 낯빛이 그 대목에서 삽시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거북하다 못해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