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화
"어리석은."
훼방꾼이 누구인지 따위는 중요치 않다. 가로막았으니 베어버리면 그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세와 풍기는 기세를 보아하니 한가락 하는 것 같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저 애송이는 오지랖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음?!"
그렇게 생각하며 박차고 튀어나가려던 순간. 그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그림자로 지내온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온갖 경험을 다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이란 전투 경험,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의미했다.
술수에 걸려든 것인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그의 기감은 평범한 술사들 이상으로 예민했다. 선천적인 재능에 후천적인 노력과 경험이 어우러져, 어지간한 술수는 다 발휘되기도 전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당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저 애송이가 쿠엘단에 버금가는 수준의 술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뿐.
"교활한 놈!"
몸을 구속한 이 힘이 사실은 아주 미약한 잔재주일경우,
뚝!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움직였다. 그러자 무언가 끊기는 느낌과 함께 몸을 억누르던 무언가가 깔끔하게 사라졌다.
"쳇!"
애송이가 혀를 찼다. 조금은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줄 알았겠지,
"곱게 죽을 생각은 마라!"
분노에 찬 일갈. 사내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
꺼질 듯 흐려지던 의식이 점차 또렷해졌다. 몸을 파고든 독은 분명 흉악했지만, 그의 몸에 흐르는 피는 그보다 더 강력했다.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안개가 낀 듯 뿌옇기만 하던 시야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무게 워, 반쯤 주저앉은 채 헐떡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누구지?"
우두머리 사냥개와 대적하고 있는 청년. 단언컨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전혀 모르는 자가 생면부지의 자신을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저 청년덕에 당장은 목숨을 건졌으니.
"으윽!"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던 카인이 다시 주저앉았다.
목숨을 건졌다지만, 어디까지나 '당장은'이다. 저 정체 모를 청년이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으나, 카인은 그가 끝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보지는 않았다.
청년의 솜씨는 뛰어났다. 칼솜씨도 칼솜씨지만, 뭔지 모를 술수도 부리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저 우두머리 사냥개, 그야말로 인간 도살자라 해도 무방한 놈은 그냥 뛰어나거나 평범하지 않은 수준의 재주로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 청년이 당장은 버티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합세를 하든. 도망을 치든 해야 할 터인데…….
'글렀군.'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그뿐, 일어서는 것조차 안 되니 지금 당장은 합세는커녕,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사나운 일갈과 함께 청년이 크게 튕겨 나갔다. 그는 수세에 몰린 채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받아내기 급급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카인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예상했던 대로, 청년은 몰리기 시작했다. 잘 버틴 셈이었지만, 카인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아직인가.'
믿는 구석은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나.
하나는 순찰병들이다. 십여 명에 달했던 사냥개들이 지금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분명 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러니 저 우두머리 놈 혼자서 날뛰고 있는 것이겠지. 시간이 흐르면, 분명 이상을 감지한 솔롬의 병력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터.
하지만 그러려면 대체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인가. 그들이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고 해도…….
'힘들겠지.'
그렇기에 카인이 기대하는 것은 다른 하나. 바로 바오룸이었다.
자신을 잡기 위해 눈이 뒤집힌 놈들이지만, 그래도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분명 뒷일을 고려했을 것이고, 바오룸이 이 도시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권력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그에게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바오룸이 칼을 빼 들고 완강하게 저항이라도 했다면 혹시 몰랐겠지만, 바오룸은 만취하여 마차 안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자를 굳이 죽였겠는가? 그럴 리 없다.
'각성초를 물렸으니, 내가 도망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찾았을 테지. 바로 움직였다면, 분명 지금쯤.'
놈들이 바오름의 신병을 어딘가에 가둬놓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마차에 둔 채 움직였을 때의 일이다. 희망 섞인 가정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희미한 희망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다.
"크앗!"
우두머리 사냥개가 반쯤 발광을 하며 청년을 몰아붙였다. 우세를 점하고 있는 쪽이 오히려 더 화가 나 있는, 꽤나 기이한 광경이었다.
***
금발이라고 하기도 뭐한, 옅은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이 종종 허공에 휘날렸다. 목을 노린 칼이 머리카락을 베이비린 탓이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검술은 훌륭한 수준이었으나, 그 정도로는 사선에서 한 발자국 빗겨 나오는 것만도 버거웠다.
힘, 기술, 경험,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가 아직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재주 덕분이었다.
"으음!"
금방이라도 끝장을 낼 것처럼 날아들던 칼날이 잠시 멈칫했다. 그 사이, 청년은 재빨리 뒤로 몸을 했다.
"하아… 하아."
청년은 숨을 몰아쉬며 상대를 주시했다. 다시 한번 속박을 끊어낸 상대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정말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슬슬 한계인가.'
점점 심해지던 가슴의 통증은 이제 더 참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다. 누군가 심장을 손에 쥐고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최대로 잡아도 두 번 정도 일 것이다. 그 뒤에는…….
'생각할 필요 없지.'
모든 생각, 감정이 사라진다. 시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칼끝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한순간, 칼과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음습한 바람이 불었다. 착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순간적이고, 미약한 감각이었으나 청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채앵!
보이는 것은 칼 한 자루이건만, 가만히 있던 칼날에 불똥이 튄다. 감당하기 힘든 힘이 몰아치며 몸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채채챙!
목, 어깨, 다시 목.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살기가 향하는 방향에 칼을 가져다 대는 것뿐. 밀어낸다거나, 흘린다거나 하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
안개가 걷히듯, 어둠이 걷히며 사라졌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힘을 발휘했다. 흉통이 밀려왔으나 그는 부릅뜬 두 눈을 감지 않았다.
"흥! 몇 번이고 바보처럼 계속 당해줄 줄 알았나?"
"……!"
상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그 잔재주. 아무래도 눈을 마주쳐야 하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나?"
상대는 눈을 감은 채 히죽 웃고 있었다. 칼부림을 벌이면서 눈을 감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 싶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재차 몸을 날렸다.
사선을 그리는 칼의 궤적이 정확히 청년의 목을 가리켰다.
"크윽!"
청년이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으나, 그의 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소 둔했다. 흉통이 그의 반응을 늦춘 것이다. 이대로는 칼날을 피하기가 요원해 보였다.
그때.
피잉!
한줄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온 것과, 떨어지던 칼날에 불똥이 튄 것은 거의 동시였다.
***
'살라스!'
활을 내던지며 말을 달려나가는 자. 제대로 본 것은 뒷모습뿐이었으나, 카인은 그를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 리가 있겠는가. 연회장에서 그가 보았던 모습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살았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현기증이 일었다.
왜 솔롬의 이인자가 이런 곳에 나타났는지, 아마 평소였다면 그것부터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뒷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어찌 둘러대야 할지 고민했겠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다른 모든 복잡한 것들을 지워버렸다.
"이, 이익!"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과 칼이 몇 차례 부딪쳤을 때, 이미 승기는 살라스 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었다.
"흠."
은신. 아니, 이걸 은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쨌거나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는 술수는 살라스로서도 까다 로웠다.
채앵!
물론 어디까지나 까다롭다뿐이지, 상대하기 힘들다.
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상대 아닌가. 그렇다면 상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푸욱!
내찌른 창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에 감각은 확실했다.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감각이 분명하게 알려주었으니, 빗나갈 이유가 없다.
"커헉!"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사라졌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흐르는 피. 창대를 부여잡은 손과, 칼을 움켜쥐고 있는 나머지 한 손.
"지친 모양이군."
"……."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살라스가 창을 휘둘렀다. 끄트머리에 꿰여 걸려있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묻고 싶은 것이 적지 않은데, 물어도 답하지 않겠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네놈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살라스의 눈은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사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바오룸이 체면도 잊고 반쯤 실성하여 들이닥쳐서는 무도한 침입자의 존재를 알렸을 때, 살라스는 침입자의 정체를 궁금해하기보다 침입자의 존재 자체에 분노했다.
가르비아라고 했던가? 그가 이끌던 아바시스의 군대가 이 땅에 발을 들였을 때.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던 그 날 이후로 살라스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적을 허락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곧 죽어 사라질 놈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야."
심문? 그런 것은 굳이 이놈에게 하지 않아도 된다.
이놈이 끌고 온 다른 놈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저기 쓰러져 있는 서기나, 이상한 술수를 쓰던 젊은이에게 해도 된다. 누구 하나 정도는 쓸만한 답을 내놓겠지.
***
"아, 이런."
막아서던 적을 처리하고 흔적을 쫓은 아드리안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살라스를 보고 혀를 찼다.
"어찌 직접 나서셨습니까."
"바오룸이 도움을 청하는데,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바오룸? 무사합니까?"
"반쯤 정신이 나갔더군."
바오룸이라. 요즘 한창 이름값을 높이고 있는 그가 연관되었다면, 아무래도 솔롬의 굵직한 이권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아드리안은 자신이 복잡한 일에 얽힌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몸뚱이를 잃은 머리에 시선을 옮겼다.
"그놈 하나입니까?"
"서기를 쫓아 움직인 것 같더군."
"서기?"
"보리스 공자가 근래 들어 아끼는 젊은이지."
"그렇습니까? 이름이?"
"카인이라던가."
살라스가 이제 막 힘겹게 몸을 가누는 젊은 서기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본명인지는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