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화
솔름에 자리를 잡고 나서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지만, 몸과 감각은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와 분노가 여전히 생생한데,
푸푹!
그렇기에, 카인은 갑작스레 날아든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꼬리를 잡혔다. 그렇게 멀리 떠나왔는데,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결국.
"호오."
어둠 속에서 십여 개의 신형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여태 저들을 피해 도망쳐왔는데.
"몸놀림이 잽싸군. 일개 서기가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데."
"웬 놈들이냐!"
카인은 당황과 두려움을 연기했다. 저 사냥개들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저 냄새를 맡고 이빨부터 들이댔을 뿐.
"표정과 목소리는 떨고 있는데, 몸은 그렇지 않군."
십여 명 중 가장 앞에 선 자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벌린 두 발. 살짝 낮춘 자세. 누가 봐도 당황한 자가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머리는 꾀를 부리는데,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떠돌이였다지? 황도에서 온 몰락 귀족? 사실이라면 기구하군. 하지만 왜일까, 난 그게 아닐 것 같단 말이지."
"……."
"제안을 하나 하지. 간단한 실험 한 가지만 하겠다. 네가 우리가 찾는 이가 아니라면, 그 후로는 풀어주지. 무사히 말이야."
"이미 이런 짓을 벌인 암살자 놈들을 어찌 믿지?"
"믿어달라 한 적 없다. 서로 덜 피곤해지는 쪽을 택하자는 거지. 내키지 않는다면…좋아."
공기가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웠던 기세가 아예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어지간한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몸이 굳었으리라.
"몰락한 귀족 나부랭이에게 한 제안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이제 그만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는 집어치우시지 그래."
카인이 이를 갈았다. 냄새만 맡을 줄 아는 사냥개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슬쩍 눈을 굴렸다.
예상대로, 마부석에 앉은 마부는 목과 눈에 화살이 박힌 채 고꾸라져 있었다. 심지어 고비에 묶인 말 두 마리는 목이 잘려 쓰러져 있었다. 언제 손을 쓴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독하군. 참으로 지독해. 늙은 괴물의 탐욕이 과해도 너무 과하구나."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가 널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죽일 수는 없어도 혀를 자를 수는 있거든. 물론, 다른 곳도 가능하고."
"좋지. 어디 한번 해봐라. 네놈들에게 잡혀 끌려가 느니 내 혀를 깨물고 죽고 말 테니!"
비장하게 외진 카인이 몸을 돌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추적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뒤를 쫓았다.
"팔다리 정도는 괜찮다! 허나 절대 죽여서는 안 돼!"
"그런데…안에 있는 놈은 어찌할까요?"
"내버려 둬라. 제법 신분이 있는 놈 같던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
적막한 거리에 살기가 감돌았다. 카인은 골목 사이로 쉼 없이 달렸다.
그는 이곳에 집을 장만했을 때부터 부근의 지리를 외우고 또 외웠다. 그는 항상, 어쩌면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올지 모르는 그 날을 대비해서 할 수 있는 준비를 해두었다.
그리고 지리를 외우는 것은 그 준비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허억 허억……."
사냥개들은 고도로 훈련된 전사요 암살자들. 그냥 달리기만 해서 그들을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지금쯤이면 순찰대가 대로를 이동하고 있을 터인데.'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달리면서도, 카인은 그간 외워두었던 순찰대의 동선을 떠올렸다. 여느 도시의 순찰병들이라면 이런저런 시시한 사정으로 순찰 시간이 들쭉날쭉하기 마련이지만, 솔롬의 병사들은 기강이 잘 잡혀있었다. 그들은 다른 도시의 병사들에 비해 근무에 상당히 충실한 편이었고, 특히 시간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탁!
지금쯤 그들이 대로변을 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카인은 주저 없이 방향을 들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쥐죽은 듯 조용한 골목길에서는 그 나직한 목소리가 귀를 바로 앞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오른쪽으로 꺾었다."
떨어져서 상황을 살피는 놈이 있다. 위쪽일까? 어중간한 높이의 벽 정도는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놈들이니 지붕 위에 올라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다면.
"흡!"
골목을 도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검 한 자루가 찔러 왔다. 카인은 다급하게 몸을 틀면서 주먹을 뻗었다. 어깨 관절을 노리던 검은 살가죽을 얕게 베고 지나갔고, 그의 주먹은 상대의 왼쪽 가슴을 두들겼다.
사냥개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하긴, 벽을 넘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려면 무거운 갑옷 같은 것을 입는 것은 힘들지 않겠나. 어쨌든 그들의 그런 가벼운 무장이 카인에게는 행운이었다. 길을 막기 위해 덤벼든 자를 손쉽게 제치고 대로로 뛰어들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도와주시오!"
멀지 않은 어딘가에 순찰을 돌고 있는 병사들이 있을 것을 믿으며, 카인은 목청껏 외쳤다.
***
카인이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헛짓거리라고 본 것이다.
물론 도시의 병사들이 저 소리를 듣고 몰려들기 시작하면 귀찮아지기는 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야심한 시각, 이런 외진 곳에 병사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기껏해야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고, 설령 그보다.
조금 더 많다 해도 상관없다. 그들이 와서 지체되는 시간보다. 목표가 제 발로 탁 트인 대로로 나온 것이 더 이득이다.
'어리석은 놈.'
추격자들을 이끄는 대장은 카인이 자충수를 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체력이 고갈된 것일지도 모른다. 늦게까지 연회를 즐기다 와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소란은 최대한 피해야겠지만…….'
황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 그것도 자콥 트라소프의 땅에서 괜히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것 없다.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웬 놈들이냐!"
불운했다. 적막한 거리에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의 병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이런.'
불운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설마 카인이 순찰병들의 동선을 꿰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찌할까요.?"
"뭘 묻느냐. 같이 처리한다."
예상 밖으로 바르게 나타난 도시 병사들 때문에 잠깐 발이 멈췄는데, 카인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대장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날렸다. 그게 신호였다.
"쳐라!"
그가 창을 겨눈 병사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창끝이 그를 향하는 사이, 그의 수하들은 그 빈틈을 바람처럼 빠르게 찔렀다.
보통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정규군이라고 해도 결국 획일화된 훈련만 거듭한 이들에 불과 하니, 일반적인 전투 양상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런 돌발상황에서 어지간한 병사들은 큰 힘을 쓰기가 어렵다.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야!"
그러나 그들이, 추격자들의 대장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건 솔롬의 병사들이 보통의 병사들이 아니라는 것. 심지어 솔름은 한 번 전화(火)에 휩쓸린 적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아바시스의 군대가 한바탕설치고 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다.
근래 들어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 같던 기강이 조금 해이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형편없는 약졸이 된 것은 아니다. 느닷없이 코앞까지 다가온 위기는 그들의 느슨해진 감각을 일깨웠다.
"뭉쳐!"
상대가 누군지. 왜 암살자 같은 놈들이 떼로 나타난 것인지, 이 순간만큼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만을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몸이 반쯤 부서지도록 굴러가며 배웠던 바를 그대로 이행했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틈을 주지 않으면서 버티기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삐이익-!
휴대용으로 제작된 자그마한 호각이 내는, 가늘지만 그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외곽이라고는 하지만 시내다. 이 소리를 들은 아군이 곧 당도할 터. 그러니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이놈들……."
추격자들의 대장은 당황했다. 동시에 그는 생각했한번 부딪쳤을 뿐이지만, 예상외로 저항이 완강하다. 처음 계산한 대로 쉽게 처리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끌릴 텐데, 그러면 목표는 어쩐단 말인가. 차라리 무시하고 지나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니야.'
무시하고 지나친다고 해서 잘 가라고 배웅해줄 놈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필시 발목을 붙들고 늘어질 터.
그렇다면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는 것이 옳다.
"목표는 나 홀로 쫓겠다. 너희는 이곳을 정리하고 바로 뒤따르도록."
"옛."
추격자들의 대장은 명령을 내리고 땅을 박찼다. 카인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으나 그런 것치고 거리는 그리 많이 벌어지지 않았다.
"허억! 허억!"
카인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추격자가 다시 따라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탁 트인 거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
보통 사람은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지위가 높아지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자각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둔하거나, 무언가에 눈이 먼 사람이라도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인지하고 나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면, 전에는 그러지 않던 이라도 결국 지위에 걸맞은 행동거지를 보이게 된다. 말을 좀 꼬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 거의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아드리안은 바로 그 예외였다. 그는 솔롬의 군부에서 손에 꼽는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일선, 전투가 없을 때는 직접 병사들을 조련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종종 직접 약간의 병사들과 함께 도시를 순찰하곤 했다.
밖에서 보기에, 그는 괴짜였다.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 직접 순찰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이런 야심한 시각에 굳이 밤공기를 쓰며 도시를 도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단순히 이상한 것을 넘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뭐라 하든, 아드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들이 다 꺼리는 이 밤공기를 좋아했다.
이런 차가운 밤에 무장한 채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으면 마치 전장에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이 야간 순찰은 일이 아니라 취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