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부터 카인은 펜에서 손을 반쯤 놓았다. 그의 예상대로, 문이 열리고 들어선 자는 보리스에게 공손히 고개 숙이며 늘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공자님. 이제 슬슬……."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사람을 보는 기준이 꽤나 높은 편인 카인이 보기에도 보리스의 집중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일을 마치거나 누군가 부르기 전까지 멈추는 일이 없었다. 본래 전장을 전전하던 무관이었다는데, 그런 자가 분서 업무에 저렇게까지 열의를 보인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지, 문서 업무가 아닌가.'
단순한 문서 업무가 아니라 후계자의 일이라면 어떨까. 솔롬의 대소사가 저 책상 위에서 다뤄지고 있는 거라면, 저 지루할 만큼 반복적인 일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예."
업무를 보는 공자와 한 방에 있으면서 시간을 죽이는 일은 본래 서기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보리스는 카인에게 서기의 일을 벗어난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꼼꼼함이 예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
불러온 이들과 나누는 대화, 생각 없이 흘리는 말 한 마디까지, 카인은 모조리 기억했다. 그 비상한 기억력, 은 사람에 따라 껄끄럽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으나, 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서기로 두기에는 아까운 재능이군."
그러나 재능은 재능이더라도, 카인의 지위를 바로 올려줄 수는 없었다. 서기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를 재차 중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여러 수하와 협력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될 테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보리스는 자신과 부진의 차이를 재차 실감했다.
부친이었다면, 마음을 먹었다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 뜻대로 모든 것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갖지 못한다. 그가 조언은 허용해도 참견은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선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꿔 말하면, 보리스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장점이 있지 않겠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이만 일어나지."
"예. 공자님."
***
솔롬의 밤은 조용하다. 물론 예전, 그러니까 지금처럼 명실상부한 도시가 아니라 일개 성이었던 때에 비하면 밤을 잊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끌시끌해졌지만 아직도 다른 번화한 도시들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었다.
그래도 상술했듯 근래 들어 여러 밤 문화가 유행을 타면서 이 도시의 밤을 지배하던 고요함도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아아. 시간도 더럽게 안 가는구만."
"왜. 또 근질근질해?"
"당연한 걸 문나."
남쪽 성분의 경계를 서던 병사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그걸 지켜보던 옆의 병사가 끌콜 혀를 찼다.
"아주 푹 빠졌구만 그래."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는군. 자네도 나 못지않다는 말이 들리던데."
"뭐? 누가 그런 말을 해?"
"아니라고 부정부터 하지는 않는 걸 보니 틀린 말은 아닌가 보지?"
"커, 커험!"
그 누가 즐거움을 마다할까. 하물며 그 즐거움이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즐거움이라면, 제아무리 목석같은 자라도 일단 눈은 돌아가는 게 정상이다.
"하아. 야간 근무라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어."
"어차피 열흘에 한 번은 서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투덜대지 말라고."
"허! 속도 좋구만."
"자네가 너무 불평불만이 많은 건 아니고?"
날이 저물면 도시 내 거리를 통제하지는 않지만, 일단 성문은 봉쇄된다. 이는 그들 같은 수문병들이 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 그러니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이렇게 시시껄렁한 대화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수다스럽던 병사도, 점잔 떨던 병사도 근래 들어 탐닉하기 시작한 밤 문화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들의 눈은 간간이 성벽 바깥을 향했으나, 보이는 것 없는 어둠만 잠깐 확인하는 데 그쳤다.
***
"확실한가?"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답하는 수하도 확실하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부터 카인이라는 이름의 젊은 외지인이 후계자의 눈에 들어 꽤 중용 받고 있다더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족해도 턱없이 부족하다.
근거라고는 그 카인이라는 자가 외지인이며 젊다는 것 뿐이었으니.
하지만 그런 자그마한 근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쫓고 있는 도망자는 그만큼 자신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
"규모는 작지만,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성주부터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그런지, 그 휘하의 군졸들도 기강이 잘 잡혀 있는 듯합니다. 검문을 통과해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한 번에 그들 모두가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소리다. 물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행한다면 못할 것 없을 테지만, 바로 그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다른 곳에 숨어있던 쥐새끼가 눈치채고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몇몇만 들어가서 확인하는 건 어떤가."
"말씀드렸듯, 그 카인이라는 놈은 후계자의 총애를 얻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기라더군요. 거의 항시 후계자와 함께 움직이는 듯합니다."
대낮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야밤에 움직이는 것도…만약 그 카인이라는 놈이 정말 그 쥐새끼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성벽을 넘는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을 내린 후로도, 가장 어두운 밤을 택하기 위해 꼬박 사흘을 기다렸다.
"좋아, 움직인다."
야음 속에서 수십의 신형이 유령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쾌속하게 성벽 아래로 붙었고, 곧 바람처럼 빠르게 성벽을 타고 올랐다. 성벽 위를 지키던 병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놈의 집은 시 외곽에 있습니다. 하지만 놈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음?"
"다른 관리들과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대원들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이 신호를 줄 겁니다."
"좋아."
그들은 복면을 쓰지 않았다. 대신 로브에 달린 후드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가렸다. 빠르게 건물과 건물 사이, 심지어 지붕 위를 달리면서도 후드는 결코 뒤로 벗겨지는 일이 없었다.
***
"하하하! 그래. 그래!"
여느 때와 같은 흥겨운 자리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할 정도로 흥을 내는 몇몇 이들 덕에 분위기가 통째로 들뜨는 그런 자리였다. 여기서 말하는 몇몇에는 당연히 바오룹이 포함되어 있었고,
"자, 자. 마시게 마셔. 오늘 마시지 않으면 다시는 마실 수 없네, 그렇지 않나? 오늘은 오늘, 단 하루뿐이란 말이지."
"철학적인 말씀이군요."
"응? 그런가? 하하."
바오룸이 호탕하게 웃었다. 어딘가 꾸며낸 것 같은,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웃음이었다.
철학적이다. 사실 반, 거짓 반이다. 말은 철학적이지만, 사람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아니니.
사람은 누구나 입을 가지고 있으니, 누구나 말을 할 수 있다. 때때로는 현명한 자의 입에서 무지한 말이 나올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말자체가 아니라 말에 담긴 뜻, 의도가 아니겠는가. 마음과 뜻이 담기지 않았다면 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꿔 말하면, 바오룸이 저렇게 기분 좋게 웃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 단순한 사내는 마냥 좋은지 계속 웃었다.
그 무지함과 순수함에 카인도 내심 웃었다. 듣자 하니 저자의 동생이 생전에 그리 총명하여 성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던데, 같은 피를 이은 형제는 왜 저런지 의문이 들었다.
술자리는 바오룸의 말이 늘어지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주가 바오룸인 만큼, 그가 자리를 파할 때까지는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것이 이 모임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 규칙은 당연히 오늘도 유효했다.
"으음. 취하는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하는데, 어떤가?"
"좋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말씀을 드리려던 차였습니다. 조금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거든요."
"하하. 이 사람. 그러면 말을 하지 그랬나. 내가 뭐, 싫다는 걸 억지로 잡아두는 사람도 아니고."
이 말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바오룹은 결코 술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취하고 즐길 만큼 마시다가 적당하게 자리를 끝내는 자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가 물주라고는 해도 그가 주선하는 자리에 모여드는 이들이 이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인. 타게.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지."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아아. 아무 말 말게나. 나도 술도 좀 깰 겸 바람을 쐬고 싶거든."
"그러시다면."
운이 좋게도, 카인은 바오룸의 마차에 올라 귀가할 수 있었다. 요즘 좀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으나, 사치를 부리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아직도 시 외곽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초라한 집을 두고 그를 아는 이들 몇몇은 혀를 차기도 했다. 바오룸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자네도 이제 슬슬 이사해야 하지 않나? 언제까지 거기서 살 건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바오룸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은지, 그는 눈을 감은 채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빚을 내서라도 일단 옮기는 게 좋지 않겠나? 매일 아침 일찍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고역일 터인데."
"어쩌겠습니까. 당장 형편이 그러하니, 맞춰 사는 수밖에요."
"에잉. 그러지 말고 내게 빌리도록 하게, 이자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도 신세를 지고 있는데, 여기서 어찌 더 기댈 수 있겠습니까. 바오룸님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두런두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마차는 부지런히 시 외곽을 향해 움직였다. 성주부를 중심으로 한 시내는 밤이 깊었어도 아직 곳곳에 빛이 밝았지만, 시 외곽으로 나올수록 소리와 인기척이 줄어들었다. 바오룸도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진 바깥 공기를 음미하느라 카인 이 오늘도 그의 호의를 거절한 데 느낀 불쾌함은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리. 곧 도착합니다요."
마부의 목소리에도 바오룸은 답하지 않았다. 언제부 턴가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해 있었다. 카인은 이대로 두면 곧 쓰러져버릴 것 같은 그의 몸을 똑바로 세워주고 다시 맞은편 자리로 돌아왔다.
"바오룸님은 잠드셨으니, 굳이 큰 소리로 깨울 필요 없소. 도착하면 내 알아서 내릴 테니, 그대로 돌아가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나리."
적막한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마부가 부르는 소리는 없었으나, 카인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내렸다.
"……!"
그러나 마차 밖으로 한 걸음 나간 순간. 카인은 다급하게 몸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자그마한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