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화
평소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이 집결했다. 심지어 솔롬을 떠나 있다고 들었던 이들의 얼굴도 보였다.
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급하게 돌아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본래 카인은 이 성대한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줄의 힘으로 어떻게든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물론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대접은 받을 수 없었다. 그저 이곳에 조용히 발 붙이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그는 이 널찍한 회장에 들어서고 난 후에야 솔롬의 진정한 권력자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공간 안에 솔롬의 모든 권력이 몰려 있었다. 누구라도, 심지어 보리스 공자조차도 이만한 인사들을 며칠 만에 불러모으지는 못하리라.
그것은 오직 한 사람, 솔롬의 성주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 공간, 이 시간이야말로 군터 크렘보르의 힘을 증명한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는데, 이렇게 모두 참석해주어 기쁘군."
시끌시끌하던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종을 친다거나, 시종이 목청껏 외친다거나 하는 사전 작업은 없었다.
그저 연회장 끄트머리의 상석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들으라고 소리친 것도 아니고, 적당히 힘 있게 한마디 한 것뿐.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더 기이한 것은, 이 기현상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전에도 이런 것을 봐왔기에 익숙한 것일까?
"먼저 말해두지.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를 위한 자리고, 그대들을 위한 자리다. 조금 더 일찍 이런 자리를 마련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하군, 하지만 늦게라도 그간 쌓아온 그대들의 공을 치하하고자 하나. 다들 아무 근심없이 이 자리를 즐겨주길 바란다."
"장군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장군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누군가의 선창에, 모든 이들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그 모습이 전혀 우습지 않았다. 별 것 없는 개회사였음에도, 그 목소리만으로 좌중은 숨을 죽였다. 그렇기에 한 용기 있는 자의 선창은 긴장의 끈을 끊어놓는 효시와 같았다. 막힌 숨을 토하듯, 사람들은 후창하며 잔을 들어올렸다.
***
"살라스 공. 안녕하십니까."
"살라스 공."
"살라."
연회에서 살라스는 인기인이었다. 회장에 있는 이들 중 손에 꼽을 정도였다. 평소 이런 사람 많이 모이는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였기에, 이번 기회에 그와 연을 트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성가신 놈들.'
마음 같아서는 적당히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귀찮게 들러붙는 자들 모두 솔롬에서, 혹은 솔롬 밖에서까지 큰소리칠 수 있는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로 그런 자들에게 반감을 심어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럼 잠시 실례."
"아. 예."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정도 이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 떨쳐낼 수 있었다. 일단은 면식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일까.
'이런 성가신 명령을 내리시다니.'
살라스가 쓴웃음을 짓자, 유령처럼 그를 뒤따르던 할렌이 말했다.
"저 때문에 괜히 고생하시는군요."
"뭐, 필요한 일 아니겠나. 언제고 한 번은 이런 일을 해야 했겠지."
살라스가 인기인이라면, 할렌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단지 살라스의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면을 쓴 그의 모습이 눈에 띌 수박에 없어서였다. 게다가 가면도 가면 무도회 같은 데서 쓰는 가면이 아니라 딱 보기에도 금속제로 보이는 가면이니, 어찌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군이 원망스럽지 않은가?"
"예?"
"필요해서 그랬다지만, 너무 거창하게 일을 벌이신 것 같아서 말이야. 분명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뭐……."
"저기 있군. 그러지 않을 거라 믿지만,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예……."
***
"공자."
회장 한 쪽에서 인파에 둘러싸여 있던 보리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살라스를 보고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됐다.
"살라스 님."
다른 이들과는 호칭부터가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보리스에게 살라스와 할렌 같은 자들은 부친의 수하이기 이전에 가족과 같았다. 한번도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보리스는 내심 그들을 자신의 숙부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나이를 좀 먹었다고 해서 딱딱하게 '살라스 공'으로 부를 수가 있겠는가.
물론 나이를 먹은 후로 그들과의 관계가 조금 소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살라스 같은 자는 굳이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었고, 일 없이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화가 뜸해지고, 얼굴을 보는 일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살라 스와 할렌은 어렸을 적에 무술을 가르쳐주었던 스승이다. 그들은 엄했지만 자신이 울먹일 때는 조용히 다가와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때는 종종 원망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남은 것은 그리움뿐이다.
"인기가 좋으시군요."
살라스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그에 보리스가 피식 웃었다.
"구박하려고 오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지요."
이상은 이상, 현실은 현실. 그것이 지금 그가 인파에 둘러싸여 있는 이유다. 살라스도 그것을 알기에 보리스를 탓하거나 구박하지 않았다.
"그쪽은……."
"알고 게십니까?"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법 유명하지 않습니까."
얼굴에 크게 흉이 있다던가, 그래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면을 쓰지 않을 때는 마치 나이 든 여인처럼 두꺼운 화장을 한다고 들었다. 이름이 분명.
"롬바드 공이었던가요."
"맞습니다. 이름까지 기억하시는군요."
"이런 자리에서까지 대동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키워주려고 노력중이십니까?"
"그런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자는 어련히 알아서 크는 법이지요. 손을 댄다고 해도 과정이 조금 변할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키워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대동하고 다닐 정도면 이미 말 다한 셈이 아닌가.
'그런데… 저 자. 뭔가, 분위기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가면에 가린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살라스의 뒤에 서 있을 뿐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권력자들 앞에서, 크렘보르의 후계자인 자신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기는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실력은 몰라도,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한 자임이 분명하다.
보리스가 롬바드를 조용히 사이, 살라스의 시선도 옆으로 움직였다.
"할렌의 두 아들.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입니까?"
그라모트와 로우렌의 상반된 반응에 살라스가 실소했다.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서로 달라도 아주 다른 형제들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뒤편에 서 있는 할렌이 궁금해졌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롬바드."
"예."
최대한 짤막한 답. 그럼에도 날카로운, 쇳소리 같은 느낌을 다 숨길 수는 없었다. 살라스는 주변에 있던 몇몇 이들의 눈매가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장군께서 말씀하셨지. 굳어있기 위한 자리가 아니니, 자네도 적당히 즐기도록 하게."
"예. 그러지요."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됐지만, 딱딱하기만 한 자리는 아니었다. 솔롬과, 솔롬 밖에서 온 솜씨 좋은 악사들과 진귀한 음식과 술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다소 경직된 문관들과 달리 무관들이 호탕한 웃음소리로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놓으니, 곧 회장은 여느 연회장과 다를 바 없어졌다.
"그래. 롬바드 공이시라고?"
살라스가 살짝 자리를 뜨고, 할렌이 홀로 남자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살라스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친위대에서 위로 올라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한 자들이 면식이라도 쌓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몸뚱이로 살기 전, 그러니까 온전히 할렌으로서 살 당시에 몇 번씩 본 자들이었다. 그때도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여전히 이 소위 권력자라는 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반갑습니다. 롬바드 공, 로우렌이라 합니다."
할렌의 발걸음이 멈췄다.
***
연회가 시작된 후로, 군터는 상석에 앉아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종들이 그의 곁에서 부지런히 술과 음식을 날랐다.
은쟁반 위에 놓인 포도를 몇 알 데어 입에 가져갔다.
그의 육신, 그의 감각은 오래 전에 인간을 뛰어넘었다. 미각도 그중 하나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탱탱한 포도알을 씹으며 달콤함 밖에 느끼지 못하겠으나, 그는 그 뒤에 숨은 다양한 맛들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소소한 즐거움이다. 언젠가는 이 즐거움마저 익숙함과 식상함으로 덮여버릴지도 모르지만,
"……."
느릿느릿, 회장 전체를 둘러보던 군터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보리스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몰려있는 곳. 그러나 그의 시선은 보리스가 아니라,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을 향했다.
아비와 자식이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자식은 아비를 알아보지 못한다. 얼굴을 가면을 벗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터.
마치 한편의 연극 같지 않은가.
연극, 연극이라. 그렇다면 저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단정짓기는 힘들겠으나, 아무래도 희극은 아닐 것이다.
할렌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다. 그 떨림은 격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직전까지 음미하던 포도의 맛이, 이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군터는 의자에 덧댄 푹신한 모피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