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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819화 (819/1,064)

819화

묘해진 분위기.

나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시에 위기감이 갑작스레 그를 지배했다.

취기로 달아오른 몸도, 옆에서 살을 맞대고 있는 미녀의 체취도 그 순간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야 성주의 후원을 받으며 연구하고, 이렇게 신세 좋게 향락을 즐기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제국의 그늘에 숨어 살던 사령술사였다. 뒷배도 없어 언제 발각되어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그런 떠돌이.

근래의 안락한 생활로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경험과 감각이 예고도 없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굉장히 좋지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지금의 안락한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잘 보여야 한다. 쓸모가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누구에게? 솔롬의 성주, 군터크템보르에게.

물론 그의 독자이자 후계자인 보리스 크렘보르에게도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잘 보여야 한다.

그러나 현 성주에게 밉보이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계산이다.

여기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배짱 없는 놈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기라면 오기였다.

"아쉽습니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주님의 허락이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말할 수 없다는 부분까지 듣고 표정이 심술궂게 변했던 이들은 성주의 허락을 운운하자 바로 표정을 바꾸고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색이 변하지 않은 이는 로우렌뿐이었다.

"괜한 것을 물어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소."

"아닙니다. 충분히 궁금해하실만하지요. 어울린 지도 꽤 되었는데, 저에 대해 들은 것이 거의 없으실 테니까 말입니다. 저도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아, 됐소, 성주께서 입을 무겁게 하라 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러신 거겠지."

로우렌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조금 딱딱해졌던 분위기는 그의 주도하에 다시 흥겹게 변했다. 물론,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교태도 한몫 단단히 했다.

"즐거운 자리요. 다들 딱딱하게 있지 말고 오늘 하루는 모두 내려놓읍시다."

그 후로는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나 정작 모두에게 즐길 것을 종용한 로우렌 본인은 겉으로만 웃고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의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군.'

아주 잠깐이지만, 로우렌은 나짐의 얼굴에 떠오른 노기를 읽을 수 있었다. 세상 대부분의 사내라는 술과 여자 앞에서 배짱 두둑한 허풍쟁이가 되기 마련이고, 나짐도 예외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짐은 이성을 되찾았다. 무엇때문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의 끈을 붙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두려움뿐일 것이다.

두려움. 성주에 대한 두려움이겠지. 대수롭지도 않다. 이 솔롬에는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그를 공경하는 이들보다도 많으니.

아쉽지만,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지는 않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지지 않았나.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짐은 성주의 지시하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바깥에 알려지면 좋을 것 없는, 그런 일을.'

그 비밀스러운 일은 성주의 드러나지 않은 약점일수도, 혹은 역시 드러나지 않은 무기일 수도 있다. 적잖이 호기심이 생기지만, 위험한 호기심에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로우렌은 나짐에게 두었던 은밀한 시선을 거두었다.

***

"요즘은 좀 어떠십니까."

"매번 똑같은 물음이군. 지겹지 않나?"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려야겠군. 똑같다. 뭐가 달라졌겠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달라진 게 있지 않겠습니까? 똑같은 하루가 이어진다고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매일 날씨가 다르듯 말입니다."

"그렇군. 달라진 게 있다면, 전보다 이 시간이 더 쓸모없게 느껴진다는 점일까."

"까칠하시군요."

"냉정해진 거지."

"사실, 그런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짜증도 감정이죠.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적…이라."

무심코 던진 말에 곱씹을 만한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가면 너머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끊겼다. 나짐은 조용해진 할렌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이 자가 그 로우렌의 아버지란 말이지.'

한번 죽고 살아나면서 사람이 변했다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전혀 닮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첫째 아들 그라모트는 제법 그를 닮았다던데, 둘째 아들은 모친을 닮은 것일까.

"자제분들을 보고싶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건 왜 묻지?"

"혈연, 나아가 자식에 대한 애착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본능이니까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지요."

"그래서?"

괜한 말을 꺼낸 것인가. 나짐은 서서히 마르는 입을 달싹이며 말을 이었다.

"할레님의 그 육체는 분명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어긋나 있지요. 저는 그것이 영혼과 육체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불균형은, 육체가 아닌 영혼의 문제에 있다고 추측하고 있지요."

"조금 더 자세히."

"할레님은 자신이 할렌이라는 인간임을 인지하고 계시지요. 정확하게는, 그리 생각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진정 그렇습니까? 제 말은, 정말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계시냐는 겁니다. 약간의 의구심도 없이 말입니다."

"글쎄. 모르겠군."

"그간 할렌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할렌님의 감정이 상당히 무더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떨 때는 무단 수준이 아니라, 아예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요."

"……."

할렌은 왜인지 모르게, 이런 대화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나짐이 하는 말들이 말이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지금 나짐이 하는 말들은 예전에 언젠가 자신이 군터를 보며 가졌던 생각과 굉장히 흡사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는 군터를 보며 이전에도 무뚝뚝했던 분이 이제는 아예 목석처럼 변해버렸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아니라 목석처럼, 감정이 아예 사라진 것처럼 변해버렸다고.

'내가 장군처럼 변했다는 건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왜인지는 몰랐지만,

"…그래서, 할렌님께서 감정적인 자극을 받으신다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겁니다."

"감정적인 자극? 그게 내 아들 녀석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아주 큰 관계가 있지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자식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그러니 어쩌면……."

"내키지 않는군.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으음. 그렇기는 하지요."

현실적인 문제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듣기에 광인의 헛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매우 크다. 그렇기에 그날, 코누다이안에서의 일을 아는 자들도 대다수는 군터가 죽을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이들은 지금까지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럴진대, 할렌이 다시 부활했다는 사실을 어찌 드러내겠는가, 심지어 할렌의 시신에 불이 붙는 것을 본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가면 뒤에 숨어서 얼굴이라도 보라는 말인가."

"저는 그저 조언을 해드릴 뿐입니다. 할레님께서 내키지 않으신다면 한 귀로 듣고 흘리셔도 무방합니다."

"생각해보지."

할렌이 마지못한 투로 답했다.

"예.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나짐은 그의 추측, 내지는 이론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할렌은 그의 제안이 영 내키지 않았다. 제안을 한 사람이 애송이 술사라서가 아니다. 사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할렌은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나는 것에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일까? 그들이 보고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짐의 말처럼, 그들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두려운 걸지도.'

그들의 앞에서 내가 할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어찌 반응할까. 기억속의 남편, 아버지와 전혀 다르게 생긴 사내가 내가 할렌이라고 한다면? 죽었지만 다른 몸뚱이에 깃들어 이렇게 돌아왔다고 한다면?

어쩌면, 어떻게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지. 어쩌면 말이다.

순간, 할렌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 낯선 몸으로 눈을 뜬 이후로는 거의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모페이브나 나짐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필시 기뻐할 테지만, 할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짐의 이론이 반쯤은 맞다는 것이 증명된 셈인데도,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은 군터였으니, 그의 물음은 자신을 향한 것일 터. 그것을 알면서도 할 렌은 머뭇거렸다. 이 몸으로 깨어난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네 영혼은 나와 이어져있다. 네가 흔들리고 있으면,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지."

"그렇습니까. 부담스러운 말씀이군요."

"그런가?"

"나짐이 제게 아들 녀석들을 만나보라 조언하더군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니, 무뎌진 감정을 자극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말입니다."

"……."

"생각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고심하는 중입니다. 답을 내리지 못하겠군요."

"녀석들을 만나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않으냐. 신분을 밝히고 만나는 것이야 다른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까?"

"남일처럼 말하는군. 무엇을 걱정하고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두렵군요."

"그들이 널 받아들이지 않을까봐?"

"모르겠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우습게도, 그 단호한 일축에 할렌은 오늘 내내 그를 괴롭혔던 걱정이 거짓말처럼 일소되는 것을 느꼈다.

"직접 확인해라. 두려워하더라도 그 뒤에 두려워하면 될 일이니."

***

느닷없이 열린 연회였다. 사전에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은 채, 불과 며칠 전에 연회가 열릴 것이니 참석하라는 일방적인 통보가 이뤄졌다.

이럴 경우, 자연히 이런저런 반발이 일기 마련이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 일수록 일정이 빡빡한 것이 보통인데, 그런 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는 이런 무례함에 반감이 생기지 않는다.

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이상한 일이 오히려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이 무례한 연회를 연 자가 다름아닌 솔롬의 성주였기 때문이다.

"별 일이군."

"그러게나 말이오."

그라모트와 로우렌 형제는 같은 마차를 타고 성주관저로 향하면서 이 뜬금없는 연회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성주께서 연회라니. 전승연을 제외하면 그분이 연회를 여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만에 생각이 같군."

"공자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하셨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는 뜻이지."

"어째서지?"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소?"

피식 웃은 로우렌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성주관저에 다 와가는 듯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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